스파이더 그웬: 고스트 스파이더 (2018~2019) #1~10 리뷰
<스파이더버스>를 통해서 화려하게 등장했던 '스파이더 그웬'은 그야말로 센세이션 그 자체였어요. 책이면 책, 굿즈면 굿즈, 무엇이든 '그웬'이라면 불티나게 팔려나가면서 초고속으로 승진해 극장가에 데뷔하기도 했죠(<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스파이더 그웬>의 첫번째 작가진은 다음 세 사람이에요: 글작가 제이슨 라투어, 그림작가 로비 로드리게즈, 그리고 채색작가 리코. 이 사람들이 대략 3~4년동안 아주 꾸준하게 그웬의 이야기를 냈습니다. 저는 첫번째 그웬 솔타(라투어런)를 처음 읽을 때 꽤나 실망했어서 (그 이유는 후술할게요.) 작가진이 바뀔 때까지 오랫동안 그웬 솔타를 집지 않았어요.
라투어의 뒤를 이은 두번째 글작가는 셰넌 맥과이어. 여성이 쓰는 여성캐릭터 이야기는 경험상 재미없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퀄리티는 보장됐다는 생각에 마음이 갔어요. 그런고로 까짓거 한번 다시 도전해볼까 라는 기분으로 읽어보았던 책이었어요.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뜻. 맥과이어런 <스파이더 그웬: 고스트 스파이더>는 <스파이더버스>의 후속이벤트였던 <스파이더겟돈>의 타이인으로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이 책은 '스파이더겟돈' 글자가 붙은 모든 것중에 가장 훌륭했던 책이라고 감히 단언해봅니다. (리빙포인트: 대부분의 '겟돈'은 불태워도 좋다.)
시시콜콜하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연재됐었던 라투어런을 굳이 읽지 않아도 바로 맥과이어런으로 정주행을 시작해도 된다는 뜻이에요. 제가 그랬으니까요. 어차피 독자로서 꼭 알아야하는 건 '이전 이야기' 요약을 통해서 다 얘기해주거든요. 쌩뚱맞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절하게 쓰여져있기도 하고요. 우리가 알아야 하는건 1)고등학생때 그웬이 방사능거미에 물려서 스파이더우먼이 되었다. 2)동급생 친구 피터 파커는 리자드가 되어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3)그웬은 거미 초능력을 잃었고 4)심비오트 수트를 얻었으며 5)시크릿 아이덴티티를 포기하고 자진투항하여 일년 정도 감옥살이를 하다 나왔다. 이정도 뿐이에요. 정말 쉽죠. 현재 그웬의 나이는 갓 스무살 정도이고, 형을 다 살고 이제 막 출소한 시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멀티버스의 가능성이 무한하다곤 하나, 어떤 사건들, 어떤 순간들은 현실세계를 조직하는데에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무한정 되풀이되어 일어난다."
슈퍼히어로 코믹스는 멀티버스 설정을 통해 세계관을 무한하게 확장시켜서 '평행우주'라는 이름하에 간편하게 설정변주를 꾀합니다. [누군가 거미에 물리고, 그 누군가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겪고, 그로부터 책임감을 배운 뒤에 영웅이 된다.] 그 누군가는 대부분의 경우 미국 뉴욕에 사는 '피터 파커'라는 이름의 인물이지만, 종종 피터 파커의 주변인물--해리 오스본, 플래시 톰슨 등--이 되기도 하고, 다른 국가와 도시에 사는 인물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틀에 들어가는 내용물만 달라지는 거예요. 이렇게 익숙한 도식에 약간의 변화를 가미해서 나오는 책은 독자들에게 낯설지 않다는 이유로 완전히 밑바닥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위험부담이 덜하고, 또한 기존 이야기화소의 교환과 재해석을 통해 오리지널의 이야기를 훨씬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줘요. '파생캐'의 서사는 그 자체적으로 독립하게 의미를 갖지만, 그 렌즈를 통해 오리지널 캐릭터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무엇이 오리지널을 가치있게, 특별하게 만들었는지를 역으로 느낄 수 있는 거죠.
멀티버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책중에서 스파이더 그웬--고스트 스파이더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그렇게 불러줘야겠죠--은 특히나 멀티버스 설정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어요. 그웬 캐릭터는 "모두가 아는 비운의 연인 그웬 스테이시가 만약에 피터 파커 대신 거미에 물린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단순한 아이디어로부터 출발했어요. 하지만 그 데뷔 무대가 하필이면 여러 멀티버스 출신의 거미들이 한데 모여 공공의 적과 싸운다는 <스파이더버스>였기 때문에, 그웬은 초창기부터 멀티버스를 종횡무진 오고가곤 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보통의 파생캐와는 달리 '히어로 그웬 스테이시'는 기본 서사 자체가 멀티버스 모험에 가까이 뿌리를 두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온갖 거미 바리에이션들을 목격했고, 거기서 그웬 스테이시들은 일찍 죽는 경향이 있다는 공통점을 발견해냈다는 거예요. 오리지널 그웬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생각해본다면 그리 놀라울만한 일은 아니지요.
피터라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거의 대부분 그웬도 있다. 그리고 그녀는 대개 죽은지 오래다.
하지만 그걸 보는 그웬의 심정은 미어지지요. '또 다른 나'가 대부분 냉장고 당했다는 사실, 무한정 넓은 평행우주에 그웬 스테이시를 위한 자리가 너무도 없다는 사실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제이슨 라투어가 쓴 첫번째 타이틀 <스파이더 그웬>(2015~2018)에서는 그웬이 갖는 우주단위의 고독함을 매우 잘 조명해주었습니다. 저기 위에 제가 처음 라투어런을 읽었을 때 실망했었다고 써놨었죠? 그 이유는 제가 예상했던 거랑 완전히 다른 책이었기 때문이었어요.
"나는 나의 그웬 스테이시를 구하지 못했어."
"있지, 나는 나의 피터 파커를 구하지 못했어. 이건 어때, 우리 이번엔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거야."
스파이더 그웬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건 바로 댄 슬롯이었다고 합니다. <스파이더버스>에서 댄 슬롯은 그웬을 피터 파커와 1:1로 대응하는 캐릭터로 묘사했습니다. 이 장면이 가장 대표적인데, 사실상 댄 슬롯 버전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서로를 구해주지 못한 비운의 커플. 끝. 댄 슬롯이 스파이더 그웬을 오로지 피터와의 관계 속에서 그려냈다면, 라투어는 달랐어요.
들러리 아닌 주인공으로서의 그웬은 피터 파커를 오리진 배경이야기에서만 품을뿐, 오로지 그웬 스테이시라는 단독 개인에 집중해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피터에 대한 죄책감이 있다 하더라도 그걸 말하는 주체가 그웬이라는 거지요. 이런 차이를 둔 상태에서 첫이슈를 읽어봐요. 데뷔 이슈 <엣지 오브 스파이더버스>#2는 가능성이 아주 충만했어요. 스타일리쉬한 작화, 리듬감 있는 액션, 불굴의 의지, 그리고 첫등장부터 아버지에게 복면을 벗고 정체를 밝히는 쇼킹한 전개까지. 2014년 이걸 읽을 당시에 정말 엄청나게 흥분했던 게 기억나요. 진짜 이건 된다. 후속작 나와야 된다! 무조건 본다!
하지만 기대감이 너무 컸던 것일까요, 첫 아크를 다 읽지도 못하고 실망감에 놓아버리고 말았던 라투어런. 위에서 말한대로 저는 완전히 다른 책을 예상했었나봐요. 돌이켜보면 <엣지>#2는 그웬의 이야기라기보다 스파이더우먼의 이야기였어요. 그 둘은 상당히 달라요. 그웬 스스로가 둘을 별개로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웬의 이야기는 우중충합니다. 친구들, 아버지, 죽은 피터네 어르신들, 모든 도시 사람들에 의해 압박받아서 무척 괴롭고 힘겹거든요. '그웬'일 때에 그웬은 피터의 죽음에 관한 자신의 책임에 억눌려서 입을 꾹 닫고있기 일쑤예요. 감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끙끙 앓는 보통의 청소년이에요. 하지만 '스파이더우먼'은 달라요. 스파이더우먼은 그런 압박감을 유머로 승화시켜서 해소합니다. 거미줄을 타고 도심을 가로질러 날으며 스트레스를 풀고, 나쁜놈이 나쁜짓하는 것을 막으면서 크고 작은 보람을 느끼고요. 그렇다고 거미 복면을 뒤집어쓴다고해서 완전히 다른 인물로 스위칭된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보다는, 그웬의 이야기 안에 스파이더우먼의 이야기가 겹쳐서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다시 말해 <엣지>#2는 그웬보다는 스파이더우먼의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져있다.
그래서 저는 당연히 후속작 <스파이더 그웬>(2015~2018)에서도 스파이더우먼의 이야기가 중점적으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밴드 드러머 속성에 발랄한 유머가 섞인 범죄소탕 이야기를 기대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죠. <스그웬>(2015~2018)은 좀더 렌즈를 넓혀서 그웬의 이야기에 치중했습니다. 그웬의 고민, 그웬의 슬픔, 그웬의 고통을 주저하지 않고 묘사했어요. <고스파>가 계기가 되어주어서 요즘 천천히 정주행을 하고 있는데, 첫인상과는 다르게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는 감정 묘사들이 일품이에요. 조만간 끝까지 읽고 리뷰를 작성해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덧.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라투어의 유머 센스는 도무지 좋게 봐줄 수가 없어요. 제발 그놈의 콘도그 집착 좀 버려!)
이곳에서 나는 마찬가지로 유령인 건지도 모른다. 귀신처럼 그들을 괴롭히고 있으니까. 이건 그웬이라는 사람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세상보다 훨씬 나쁘다. 그녀를 잃은 그들은 갈 곳을 잃었는데. ...내가 없어지면 내 친구들도 이렇게 방황할까?
<스파이더 그웬: 고스트 스파이더> 1편부터 4편까지는 <스파이더겟돈> 이벤트의 타이인입니다. <스버스> 마지막에 방사능 폐허에 내쫓겼던 인헤리터들이 돌아와 거미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의 속편인데, 그웬은 (정말 다행스럽게도) 조금 독자적인 스토리를 부여받았어요. (그래서 굳이 <겟돈>을 읽지 않아도 됩니다. 안 읽는 걸 추천드려요.) 인헤리터들이 습격해왔을 때 사고로 차원간 이동기기를 잃어버린채로 평행세계에 떨어져버린 거예요. 전우들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 낯선 평행세계에서 사건사고를 겪는 것이 1~3편의 내용이고, 4편은 <겟돈>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 격의 내용입니다. <겟돈>에서 사망한 친구들의 장례식이 치러집니다. 장례식이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라투어런의 위와 같은 특징을 차기 주자인 맥과이어가 잘 이어받아서 써주고 있어요. 시리즈 시작부터 우리 그웬은 또 다른 버전의 그웬을 마주하게 됩니다.
멀티버스에 그웬 스테이시들은 현저하게 적은 수로 존재한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너무 일찍 비명횡사하지. 그 중 한 명이랑 싸우자니 기분이 이상한걸.
첫아크 그웬이 갇힌 이 평행세계에서는 해리 오스본이 스파이더맨이고 과학자 그웬 스테이시가 그린 고블린이에요. 불운의 사고로 해리가 사망한 뒤에 자아를 상실한 그웬이 빌런이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우리의 그웬은 빨리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만 하는데, 차원이동기계를 만들어줄 사람이 현재 빌런이 된 과학자 고블린그웬 뿐이라는 거예요.
아니. 그건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야. 우리는 그웬 스테이시야. 우리는 포기 안 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 너는 이것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야. 너는 이것보다 훨씬 강인한 사람이라구.
평행세계의 '죽은 그웬'들을 보면서 그웬은 비통해하고 외로워하며 스스로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죽음에 회의를 품곤 했지만, 이번만큼은 '살아있는 그웬'을 마주하면서 연대의 목소리를 높여요. 평행우주로 널리 확장된 세계관의 작품에서 주인공의 자의식은 한 개인에 머무르지 않는 모습이지요. '나'와 '너'이면서도 '우리'로 묶이는 공동체 구성에 울고 웃어요. 그 '우리'는 때때로 거미이기도 하고 드물게는 헤어밴드를 한 금발머리 그웬 스테이시가 되기도 합니다. 앞서 스파이더 그웬, 고스트 스파이더의 책이 멀티버스 설정을 잘 활용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었지요. 그렇게 평행세계의 또 다른 나를 마주하면서 결국 자아성찰로 나아가게 되는 거 같아요.
이 세계의 고블린그웬은 단짝친구 메리제인과 맞대면하면서 본래의 자아를 되찾습니다. 사랑이 아니고서야 이런 전개 불가능해... ㅜㅜ 정말 감동이에요.
1~3편은 그웬이 "빨리 늦기전에 전우들 곁으로 돌아가야해"라는 목표의식이 두터워서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전쟁이 마무리 된 직후의 장례식을 다룬 4편은 죽음의 분위기가 지배적입니다. 인헤리터로 태어나 거미를 살육하는 운명을 타고났지만 결국엔 스스로 그 삶을 포기하고 거미들의 편에 섰던 카른의 죽음을 추모하는 친구들. 오리지널 피터가 아닌 파생캐들이 중심적으로 카른을 애도하는 장면을 넣어주어서 정말 기뻤어요. 카른과 깊이 교류한 사람은 웹워리어즈 멤버들이었으니까요.
멀티버스에 하나 일관성이 있다면, 그건 죽음이 그웬 스테이시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죽음은 나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날 홀로 내버려두질 않는다.
사실 이슈를 여는 첫페이지에서부터 아주 엄숙해요. 예전에 이 페이지를 처음 봤을 때 "죽음과 멀지 않은 '그웬 스테이시'로서의 숙명적 고독이 엿보인다" 라고 평했었는데, 지금 다시 봐도 그렇습니다. 그웬이 어떤 심경으로 드럼을 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요. 다만 짐작할 뿐이지요. 그웬의 생애 첫 죽음은 바로 어머니였어요. 그 다음은 친구 피터 파커, 그 다음은 <스버스> <겟돈>에서 떠나보낸 거미 전우들... 죽음으로 가득찬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눈물 흘리는 그웬이 안쓰러워요
사실 얼마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왔어요. 적적한 빈소에 자리 지키고 앉아 있는 게 얼마나 외롭고 힘겹던지, 서럽더라고요. 그러다가 중간에 스님이 오셔서 법문을 읽어주시고 독경을 해주시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불심이나 다른 종교가 없지만, 스님이 염불외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정말 위로 받는 느낌이 들었어요. 한 사람의 존재만큼 비어있는 이곳을 소리로 가득 채워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스님의 독경은 망자가 듣기를 전제합니다. 고인이 부디 이쪽 세계와의 사사로운 집착을 끊고 편한 마음으로 저쪽 세계로 가기를 독려하면서, 가는 길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가다듬어 저승에서의 심판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하는 거지요. 불경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그웬의 드럼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했어요. 격렬하게 북을 때리는 소리로 죽은 거미 친구들--빌리 브래독과 느와르 피터--의 빈자리를 채워보려는 그웬. 드럼 스틱이 부서질 정도로 격하게 에너지를 발산하다가, 끝내 저쪽에 가있는 빌리 브래독의 망령 혹은 환상을 보는 그웬.
제가 라투어런을 드랍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작가양반의 개그센스가 저랑 너무 안 맞아서였어요. #2에서는 쓰레기장으로 추락해서 머리를 세게 부딪힌 탓에 스파이더햄의 환각을 봅니다. 이 쓰임이 너무나도 무의미하고 덧없어서 화가 날 지경이었는데요. 맥과이어런의 빌리 브래독 환각은 달라요. 의미 있어요. 그웬의 현재 심리 상태를 정확하게 대변해주는 역할을 하잖아요. 감동적이기도 하고요.
"당신은 죽었잖아요, 빌리. 귀신한테 괴롭힘 당하는 거 오늘은 사양할래요."
"내가 여기 있는 게 아니라고 말한 사람은 바로 너잖아. 나는 유령이 아니야, 그웬."
"나도 알아요. 유령은 너무 간단하죠. 조금 멋있기도 하고요. 유령이라는 건 결코 작별인사를 하지 않는 거잖아요. 나는 빌리한테 작별인사하고 싶지 않아요. 내 친구들 누구한테도 작별인사하고 싶지 않아."
"그래도 내가 제일 보고 싶을 거잖아, 그렇지?"
"당신네 영국인들은 정말. 뭐가 그렇게 잘났는지."
"내 말이 틀렸어?"
"아뇨. 그냥 빌리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모든게 망가졌고 모든게 귀신에 씌였다. 그중에서도 제일 심하게 귀신 들린 건 바로 나겠지.
그웬은 작중 내내 유령과 귀신 들림(haunted)에 대한 모놀로그를 합니다. 처음 유령이라 칭한 건 그녀 자신이었어요. 평행세계의 피터 파커와 메리제인이 자기 자신을 보며 괴로워한다는 의미로, 이 세계의 그웬은 죽은 사람처럼 멀리 떠나간 사람이나 다름 없었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지요. 이어서 위의 인용문에서 그웬은 죽은 사람이 유령이 된다는 건 영원토록 작별인사를 하지 않고 곁에 둘 수 있다는 뜻이며, 지금 눈앞에 나타난 빌리의 환각은 그만큼 빌리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그웬의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걸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어요.
이렇게 끝나는구나. 언제나 이렇게 끝나지. 친구들이 잘가라 인사를 건네보지만, 너는 벌써 떠나갔고. 너무나 멀리 떠나가서 친구들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아. 친구들은 네가 살던 곳에 오도카니 서있을 뿐인데. 너는 가고 없어. 친구들은 유령의 집조차 방문하지 않을 거야.
세번째로 유령을 언급한 건 카른의 장례식 때였습니다. 이때의 유령은 말그대로 떠나간 망자를 의미해요. 그들의 공허한 빈 자리가 얼마나 크고 아프게 느껴지는지 절절하게 와닿아요.
이게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누군가는 유령의 집의 문을 닫아주어야만 하니까. 누군가는 망령들을 보내주어야 하니까.
<겟돈>에서 평행세계를 이어주는 '삶과 죽음의 거미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현시점에서 차원이동을 할 수 있는 건 그웬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못하는 임무를 그웬이 도맡아요. 전사한 거미 친구들의 집에 방문해서 부고 소식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누군가에겐 뺨을 맞았지만, 누군가에겐 눈물 젖은 감사 인사를 받았어요. 그웬은 담담하게 해야만 일을 해나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을 전해듣는 것을 본다면 망자도 한결 마음이 편해지겠죠. 그렇게 그웬이 직접 친구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내줍니다.
"빌리 당신은... 우리 중에 최고였잖아요. 어떻게 이렇게 그냥 죽을 수 있어요? 이건 공평하지 않아, 이건 공평하지 않아..."
"그웬.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나 여깄어."
이렇게 구는 게 창피해야 될텐데.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줘야만 한다. 그게 우리의 유령 이야기가 비극이 되는 걸 막는 방법이다.
죽음이라는 건 결국 산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더라구요. 죽은 사람은 그대로 눈을 감으면 끝이지만 그 빈 자리를 느끼고, 살아생전의 모습을 추억하고, 그의 죽음에 의미를 갖는 건 산 사람의 몫이라고 말이에요. 슬퍼하는 그웬, 그웬을 위로하는 피터. 그웬은 이렇게 산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면 유령 이야기가 비극이 되지 않는다고 해요. 이 유령 이야기는 먼저 떠나간 빌리와 느와르 피터라는 죽은 영웅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고, 그런 죽음들을 떠안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는 살아있는 영웅의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그웬의 이야기도 유령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죠. 유령이 종종 출몰하는. 그 유령들을 배웅해주는 이야기.
꼭 귀신에게 쫓겨 살아야만 한다면, 그 귀신과 친해지는 게 나을 것이다. 그 귀신을 두 팔 벌려 환영하고, 내 집 식구처럼 지내게 해주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가 유령 이야기라고 해서, 그걸로 끝난 이야기가 되는 건 아니다. 전설은 죽지 않으니까.
이슈 #4 내내 반복해서 언급되는 '유령'은 굉장히 중의적입니다. 때로는 말그대로 죽은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들을 떠나보낸 산 사람들이기도 하고, 가끔은 죽음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해요. 이슈를 닫는 마지막 모놀로그에서 그웬이 어느정도 홀가분해진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렇게 죽음은 일상의 일부가 되어 함께 나아갑니다.
못하겠어. 스파이더우먼은 뭐든지 할 수 있지. 내가 마스크만 쓰면, 인헤리터와 싸울 수 있고, 친구들을 땅에 묻을 수 있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지금 나는 마스크가 없어. 나는 못해. 인생이란 건 왜이렇게 무서운 걸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내가 바보야. 나한테 평범함 같은 건 불가능해. 더 이상은.
평행세계 모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그웬. 일상은 일상 나름대로 어려움을 갖고 있어요. 그웬은 시크릿 아이덴티티를 포기하고 감옥에 다녀왔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얼굴이 알려져있는 상황이에요. 이제 갓 스무살, 앞날이 창창한데 이것 때문에 한발 앞으로 내딛는 게 어려워요. 그웬의 성격 자체가 그다지 사회적으로 활발하지 않은데, 모르는 사람이 아는 척을 해오니까 얼마나 당혹스럽습니까. 그웬으로서의 일상과 스파이더우먼으로서의 비일상을 분리하고 싶은 그웬이었는데 그게 엉망진창으로 섞여버리니 그웬 입장에선 참 곤란해요.
왜 꼭 모든게 이렇게까지 어려워야 되는 거야?
게다가 무슨 이유에선지 그웬의 초능력의 근간인 심비오트 수트가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해요. 어딘가 고장이 난 것처럼 형태를 유지하는 게 어렵고, 끔찍한 두통에 시달리고 말이에요. 이렇게 모든게 버겁고 힘겨울 때가 있어요.
그래도 그웬은 포기하지 않아요. 차근차근 하나 둘씩 해결해나가는 모습이 참 기특하고 예뻤어요. 이렇게 어엿한 히어로로서 당당하게 활동 잘하고 있다고 세간에 정립된 시각이미지를 이용해서 보여주기도 하고요.
그웬이 새로 상대하는 빌런은 '맨울프' 존 제임슨이에요. 원래는 우주 비행사였다가 우주에서 해괴한 일을 겪어서 늑대인간이 됐다는 게 오피셜 설정. 그웬네 세계에서 맨울프는 뒷골목을 주름잡는 보스라고 하네요. 어두운 밤중에 벌어진 싸움을 푸른 톤으로 일관되게 채색한 뒤에, 보색인 노란색을 배경으로 깔아서 우당탕탕 액션씬을 화끈하게 강조하는 효과 좋았어요. 맨울프에게 협력하는 음침한 과학자 워런 박사가 그웬의 심비오트 수트 샘플을 취득해서 음흉하게 흉계를 꾸리는 떡밥이 나왔는데, 지구65에도 자칼이 나온다는 뜻일지 궁금해져요.
그웬은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발각된 고향세계에서는 바라는대로 그웬으로서의 일상을 누릴 수 없으며, 또한 심비오트 수트가 고장난 이유를 알아내고 해결책을 마련할만한 브레인이 없다는 이유로 지구616 오리지널 세계관에 방문했어요. 시리즈 끝물에서 가볍게 원조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와 팀업을 해주기도 하고요.
"모르는 언니네. 언니는 누구예요?"
이곳(지구616)에서 나는 시크릿 아이덴티티가 있어. '스파이더우먼'이라고는 못해. 제시카(원조)가 날 죽이려들 거야. 드디어 새로운 코드네임을 만들어서 정착할 때가 됐구나. 죽음이 그웬 스테이시를 사랑한다고 계속 말했으니까, 그런 걸로 해둘까.
"내 이름은... 고스트 스파이더야."
이슈 10편만에 드디어 그웬의 이름이 새롭게 명명됐다는 사실! 죽음이 유령처럼 따라붙는 운명을 두고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고 했나요, 고스트 스파이더라고 당당하게 천명해버려요. 코스튬 자체가 흰색이 많아서 또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 내친김에 (거의 불필요한) 리런치까지 해버려요. 스그웬 글자는 아예 떼버리고 이제부터는 <고스트 스파이더>입니다. 땅땅땅. 새로운 시리즈에서는 그웬이 피터가 조교로 재직하고 있는 616의 대학을 다니는 것으로 방향이 잡혔어요. 두 세계를 와리가리하는 그웬의 모험. 기대돼요.
외롭고 힘들어도 "나는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그웬에게 나도 모르게 위로받고 마는 거 있죠. 그웬 스테이시는 많이들 죽곤 하지만, 살아남은 소수의 그웬들이 서로 협력하고, 또 우리의 주인공 그웬이 우뚝 서서 자리매김 잘 해주고 있으니까요. 걱정은 하지 않을래요. 으이구 기특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