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트윙 (1996-2009) #32~34, #41 리뷰
마블 코믹스 덕질 6년차. 나름 코믹스에 관해 '잘 안다'라고 자부할 수 있는 저도, 다른 회사의 책장에 앞에 서면 사뭇 어색하고 낯설고 또 겸손한 기분이 드는 거 같아요. 아무리 제가 6년동안 스파이더맨 코믹스 한 우물만 팠다곤 해도 오며가며 주워듣는 것이 있고, 또 스파이더맨이 등장하는 팀북을 읽다보면 같은 팀원 중에서도 호기심에 동해서 쫌쫌따리 찾아 읽는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블코믹스 사의 캐릭터들은 정통해있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많이 익숙해져있어요. 무엇보다 세계관이 어떻게 변화를 거쳐왔는지 그 흐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요 작가가 누구누구 있는지를 알아요. 그래서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면서 무언가를 알아야 하는 때가 오더라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검색하는 노하우가 쌓일 대로 쌓였다고나 할까요.
와, 근데 DC 코믹스는. (DC 코믹스라고 표현하는 게 맞나요? 디텍티브 코믹스 코믹스이니까 동어반복이라서 어색한가요? 이것조차 모르겠네요.) 정말정말 하~나도 모르겠어요. 6년전에 처음 스파이더맨 코믹스에 입문했던 시절이 생각나요. 어버버 얼타다가 닥치는대로 읽어내던 그때 그시절. 추억여행을 하게 되네요. 그래도 뉴스 사이트에서 가끔 소식 올라오는 걸 접한 게 없지는 않아서, 1) DC가 "New 52"라는 것으로 한번 세계관을 싹 대청소를 한 적이 있고 2)또 "리버스"라는 것으로 그와 비슷한 개혁을 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번 리뷰는 DC알못 뉴비가 캐릭터를 처음 접하는 순간의 경험과 감상을 소상히 적어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보고자 합니다. 아무래도 아는 게 없으니 덧붙일 말도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아요.
제가 제대로 읽어본 첫 DC 코믹스는 한국어정발된 <슈퍼맨: 시크릿 아이덴티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제 취향인 책이었어요. 1인칭 주인공의 담백한 독백 위주로 진행되는 서사? 제가 환장하거든요. 한데 이 책은 오리지널 그래픽노블입니다. 말하자면 평행세계 외전이라는 속성 때문에 이 책이 넓디 넓은 DC 코믹스로의 첫단추를 꿰어주진 않았던 거 같아요. 작품 자체가 동떨어지고 독립적이기 때문에 이것만 읽고 말아도 그만이었던 거예요. 그 다음 독서까지 몇 년의 텀이 있었어요.
그 다음은 무어가 있었을까요. 당시 친했던 지인의 권유로 귀염둥이 깜찍이 감자둥이 데미안의 오리진 스토리를 읽어봤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읽었던 책에서는 배트맨이 사망을 하는 바람에 딕 그레이슨이 배트맨이 되고 또 배트맨의 친아들인 데미안이 딕의 로빈으로 나왔었는데, 둘이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던 기억이 나요. 배트걸의 새로운 코스튬에 쏙 반해서 볼륨 1권을 사서 읽다가 관뒀던 것도 있었네요. 잔잔한 독백과 감성이 제 취향에 잘 맞을 것 같다며 아는 분께 추천을 받아서 그렉 팍의 New52 <액션 코믹스>를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무척 재밌었어요. 리뷰를 남겼었지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펜슬러인 존 로미타 주니어가 DC로 갔을 때에는 절망했었지만, 충성하는 팬이라면 같이 따라가는 게 맞잖아요. 로미타의 <슈퍼맨> 시리즈도 열심히 챙겨봤었지요. 또 2016년 리버스 <슈퍼맨> 시리즈도 재밌게 봤었습니다. 이때 슈퍼-아들램들의 케미에 완전히 반했었는데. 본진인 스파이더맨 덕질에 지쳐서 덕질의 나래를 훨훨 펼치지 못했던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열을 하다보니 꽤 읽은 것이 많네요. 이상하다, 근데 왜이렇게 내 머릿속 라이브러리는 텅텅 빈 것처럼 느껴지지. 기준이 스파이더맨 코믹스가 되어서 그런가봐요. 그거에 비하면 뭔들 그보다 못할 수밖에 없는건데 말이에요. 게다가 무려 6년 동안 읽은 책이 저게 전부라는 사실도 잊어선 안되겠죠. 정리해보자면, 아예 안 읽은 건 아닌데, 여전히 미숙하긴 한 DC 뉴비. 대충 자기소개를 주절주절 해봤습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그래서, 경찰관 딕 그레이슨 말인데요. 제가 이 설정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트위터 탐라에서 지나치듯 본 게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자경단 활동을 하는 슈퍼히어로가 경찰관이기까지 했던 때가 있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띠용 싶었죠! 스파이더맨에게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자경단은 불법활동이고 시민들에게는 사랑과 지지를, 공권력에게는 미움과 적대를 받기 일쑤니까요. 어쩌다가 배트맨의 조수였던 슈퍼히어로가 경찰 끄나풀이 된 걸까 궁금해지잖아요. 너무너무 흥미로운 설정이에요. 지금까지 제가 읽어봤던 DC 코믹스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책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아무리 한국어로 아무리 검색을 해도 "경찰관 딕 그레이슨을 보려면 어느책 어느이슈를 보면 된다"라는 소개글을 찾지 못하겠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이 동한 김에 굳을 결심을 하고 구글링 실력을 총 동원했죠. 결코 쉽지 않았어요. 온갖 키워드를 넣어서 검색하다가 한 텀블러를 찾아냈어요. 여기서 어떤 신실한 덕후분께서 딕 그레이슨의 사회적 지위와 직업들을 총정리해놓았더군요. 한 줄이 눈에 띕니다. "Police Officer, Blüdhaven Police Department, Blüdhaven, New Jersey (Nightwing (Vol. 2) #41)"
아하! 찾았다! 그러니까 1996년에 시작한 두번째 나이트윙 시리즈의 이슈41권에서 경찰이 됐구나. 그러면 경찰학교는 언제부터 다녔을까? 41권 그 이전 이슈들의 시놉시스 소개글을 쭉 읽어봤어요. Police Academy라는 글자가 보이더군요. 이슈32권이 정답이었습니다.
옳거니! 그러면 나는 32권부터 봐야겠다. TPB를 살펴봅니다. 흠흠 그렇군요. 이슈 몇권부터 몇권까지를 구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해당 이슈를 확인했습니다. 이크. 아는 게 1도 없고 복잡하기만 한 크로스오버잖아요. 입문자에게 크로스오버는 완전히 상극이니까 도망칩시다. 그러면 이슈 단위로 첫 스토리아크 하나만 구매하는걸로. 그렇게 해서 결정했어요. 딕 그레이슨이 경찰 학교에 다니는 #32~34 그리고 경찰 학교를 졸업하고 경찰로 전직하는 #41을 샀습니다. 결과가 어땠냐구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렇게 정보값 없이, 그 흔한 추천글이나 설명글 하나 없이, 어두컴컴한 복도를 손으로 더듬어가며 걸어가듯 시도해본 것치곤 정말 좋았죠. 1로 시작하지 않는 이슈, 그러니까 중도탑승하는 이슈는 입문자에게 다소 어렵다는 통념 같은 게 있어요. 하지만 <나이트윙> #32~34는 갑자기 모르는 토픽을 내세우며 "너희들 다 알지? 넘어갈게~" 라는 식의 스토리텔링이 없었고, 어느정도 전형을 따르면서도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 페이스를 맞춰주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무척 만족스러웠습니다. 뿌듯.
이슈 32는 초심자 입장에서 보기에 정말 알맞은 책이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초심자 추천 책의 조건은 총 세가지예요. 1)배경지식이 없어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 2)처음 보는 등장인물이 많지 않을 것. 3)주인공의 현재 스테이터스를 설명하는 대목이 반드시 있을 것. 어떻게 우연찮게도 이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주는 책을 제가 골랐네요.
이슈를 여는 첫대목이 무척 세련됐어요. 검게 실루엣 처리된 누군가가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아크로바틱한 솜씨를 뽐내며 수많은 총알 세례를 헤치고 나아가 유유히 빠져나갑니다. 캡션의 모든 설명이 나이트윙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이번 아크에서 처음 등장하는 주요 빌런입니다. 올드비에게도 낯선 캐릭터이니만큼 어렵지 않게 소개되고 있지요. 얼핏 나이트윙과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서 혼선을 빚을 거라는 떡밥.
경찰 학교의 트레이닝에 대한 딕의 생각도 재미있었습니다. 아침 조깅을 너무 여유롭게 즐긴 탓에 감독관의 눈에 띄어버리는 불상사(?)가 벌어지고 나서는 실수했다는 식으로 캡션을 넣어서 피식했어요. 여기서 알 수 있는 정보. 나이트윙이 경찰이 되기로 한 건 아마도 언더커버 때문이겠구나. 그러니까 정체를 숨기고 얌전히 설렁설렁 하려는가보다 싶지요. 과연 그 언더커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궁금하던 차에 바로 그 다음 꼭지로 부패경찰청장과 킹핀 같은 마피아 보스가 등장해줍니다. 누가 봐도 이녀석이 나이트윙이 쓰러트려야하는 목표라는 걸 알 수 있어요. 훌륭한 흐름입니다.
이슈를 닫는 이 페이지도 무척 센스있습니다. 경찰들이 무엇 때문에 나이트윙을 못잡아 안달이었을까 궁금해하는 딕이 멀어지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빌런의 정체를 전단지로 밝혀주는 연출! 캡션 박스가 쓸데없이 어딘가 쥐가 갉아먹은 거처럼 찢겨진 것만 빼면 더할나위 없는 이슈였네요. 제가 90년대 핸드라이팅 레터링에 이미 익숙해져서 다행이었던 거 같아요. 완전히 초심자분들이 보기에는 글자가 좀 들쑥날쑥하고 가독성이 안 좋았다고 생각해요.
나머지 두 이슈는 평범했습니다. 주머니가 탈탈 털린 마피아 보스가 범인을 찾기 위해 부하들을 출동시키고, 나이트윙은 고래 싸움에 등터지는 새우처럼 단단히 휘말려버리고. 그와중에 또 딕이 일은 너무 잘해서 인명사고도 없이 잘 수습하는 모습이에요. 한편 1999년에 발매된 작품이다보니 또 이런 장면에서 세월을 체감했습니다. 그놈의 여적여 프레임. 딕이 잘생겼다는 이유 때문에 자매끼리 서로 머리끄댕이를 붙잡는 말도 안 되는 코미디 연출이 불-편했지만... 어쩌겠어요. 감안해야죠 뭐.
도둑 빌런들에 대해서는 투 비 컨티뉴를 암시하고 스토리아크가 마무리지어졌지만, 제가 차마 그 다음 아크인 크로스오버 이벤트에 손 댈 기력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 자매의 운명은 나중으로 미루고 그 다음 이슈인 41권으로 넘어갔어요.
재밌게도 이슈 #41은 "한동안 블뤼드헤이븐을 떠났다가 오래간만에 돌아온 나이트윙"으로 시작하더군요. 딱 제가 그렇잖아요. 크로스오버를 건너 뛴 독자를 의식하고 쓴 걸까요? 친절함에 반해버릴 것만 같아. 나이트윙의 카피캣 짭이트윙(Nite Wing)이 등장하는 이슈였어요. 트레이싱범으로 유명한 그렉 랜드가 맡은 이슈라서 설렁설렁 봤던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그렉 랜드가 그린 그림은 어디의 어디가 사진을 트레이싱한 건지 알 수가 없으니까요. 괜히 의심하게 되고 그래요. 탐탁치가 않아요.
딕의 경찰학교 졸업 점수는 85점. 나름대로 너무 좋은 점수를 받지 않으려고 노력한 결과였다며 웃는 모습이 재밌어요. 페이지 마지막 캡션이 인상적이에요. "나는 경찰이다." 간단하고 담담한 사실 적시에 담겨있는 힘을 생각해봐요. 좋네요.
짭이트윙에 대한 이야기는 이 다음 이슈에서 계속 이어질 것 같은데 딱히 관심이 없어서 딱 여기까지 봤어요. 검색해보니 이런 TPB가 나와있더군요. '슈퍼경찰'이라는 보기만해도 흥미넘치는 부제를 달고 있는 구성인데, 안타깝게도 코믹솔로지 E북으로는 등록돼있지 않았어요. 그러면 다음 행선지는 나이트윙 이슈 71입니다. 마침 제가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릭 레오나디가 펜슬링을 했지 뭐예요. 아유, 너무 좋다 정말. 지금 73까지 열심히 읽었는데 그림이 좋으니 아주그냥 없던 애정도 다 생길 것만 같아요. 흐뭇하구만.
이슈 71~75는 부패경찰청장의 아내가 모종의 이유로 괴한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고, 그것을 우연히 알게 된 나이트윙이 순전히 정의감만을 이유로 여인을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게 주요 스토리입니다. 갓 댐. 그것이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소중한 연차까지 내면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 해외로케이션까지 진출해가며 사람 하나 살리려는 그의 모습. 아주 올곧다. 한편 레오나디의 펜슬링이 디비지게 좋습니다. 미친 거 아니야 소리질렀잖아요. 이 단촐한 구성이 이다지도 꽉차보이는 건 다 이유가 있었어요. 수직의 공간을 확 돋보이게 해주는 페이지 구성. 최고다. 레오나디 당신 내가 팬이야!! 바리언트 커버도 샀다고!!!
때마침 여름맞이 코믹스 할인을 하기에, 딕덩이로 유명한 <그레이슨> 시리즈와 최신간 온고잉 시리즈인 리버스 <나이트윙> 1권씩을 구매했어요. DC 코믹스는 1권을 제외하면 할인율이 생각보다 저조하더군요. 하긴, 마블이 너무 퍼주는 거지. 이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저의 독서 경험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또 만일 경찰관 딕 그레이슨에 관심이 있는 분이 계시다면 나름대로 길라잡이 역할을 해드리고 싶어서 리뷰를 남겨봤는데요. 영양가가 평소보다 많이 부족하지만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나이트윙 추천서가 있으시다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즐겁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