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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 Mar 17. 2024

구몬

아침편지 2



어제는 결혼을 앞둔 친구 커플과 만났어요. 감사하게도 맛있는 커피를 얻어 먹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구몬이나 빨간펜, 윤선생 등의 가정 학습지가 유행이었는데요. (저는 세가지를 다 해본 것 같아요.) 갑자기 그 기억이 생각나서 찾아보니 아직도 구몬이 있더라고요. 요즘 어린이들도 학습지를 하기 싫어서 미루다가 선생님이 오시는 날 부랴부랴 몰아서 풀까요? 차마 몰아서 다 할 수 없을만큼 밀렸을 때는 학습지를 숨기고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어요. 저는 제가 거짓말을 잘 하는 어린이라고 생각했지만, 방문 선생님이 눈에 빤히 보이는 저의 거짓말을 모른 척 해주신게 틀림 없겠지요.

  하루 이틀 밀리다보면 감당이 안된다는 문제가 있긴해도 사실 가정 학습지는 꽤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었어요. 매주 찾아오는 선생님의 격려와 응원 덕분에 저는 많은 공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한글도, 영어도 모두 학습지로 배웠던 것 같아요. 특히 윤선생 영어는 매일 아침마다 전화 영어 서비스를 제공했는데, 제 인생 첫 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윤선생 영어로 시작했어요. 영어를 대단히 잘 하진 못하지만, 그 때 배운 영어로 학교 시험이나 수능을 보는 데 문제는 없는 정도는 됐으니 얼마나 효과가 좋은 학습 방법이었는지 모릅니다.

  많은 아이들이 요즘도 학습지를 풀고 있구나, 여러 블로그 후기를 보며 추억 여행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성인 구몬 후기를 봤어요. 성인을 대상으로 학습지 형태로 제공하는 언어 학습 서비스가 몇 년 전에 크게 유행을 했는데 그러고보면 원조가 따로 있었죠. 구몬 학습을 신청한 어른들은 대부분 어릴 때 이미 구몬을 경험한 20~30대 같았어요. 왜 어른들이 다시 구몬을 할까요? 생각해보니 구몬은 다른 외국어 학습 서비스에 비해 비용이 비싸지 않고, 학습량이 부담스럽지 않고, 선생님이 방문하니 꼭 해야하는 약간의 압박감도 있다는 점이 장점입니다. 태어나는 아이들이 워낙 적다보니, 학습지 회사 입장에서도 어른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시간이 꽤 여유가 있는 요즘 나도 구몬 해볼까 싶더라고요. 영어, 중국어, 일본어도 배울 수 있지만 저는 한자를 골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때 한자 공부를 열심히 안했거든요. 그 때는 한자 급수를 따는 어린이가 많았던 시대였는데, 저는 한자 급수 시험을 본 적이 없어요. 학교 공부는 성실히 한 편이라 기본적인 한자에 익숙하지만 그래도 한국은 한자문화권이니 좀 더 잘 알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늘 있었거든요. 겨우 눈에 익숙한 몇 글자만 알았지만 일본이나 중국, 홍콩에 갔을 때 도움이 됐던 기억도 있고요.

  요즘 배우는 피아노도 비슷합니다. 어릴 때 엄마가 분명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해줬거든요. 나름대로 꽤 오래 다녔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엄마가 피아노를 전공할 게 아니라면 그이상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제가 가기 싫다고 했는지 몰라도 열 살 전에 그만뒀습니다. 한 번 연습하고 포도알은 두 개 채웠던 기억이 우리 세대 어린이들에겐 공통의 추억입니다. 그리고 30대 중반인 지금, 그 때보다 훨씬 비싼 돈을 내고 피아노 레슨을 받고 있어요. 엄마가 시켜줄 때 열심히 할 걸 싶을 때도 있지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지금,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을 더 만끽할 수 있답니다. 재미있어요. 아마 구몬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니까 좀 더 재미있게 할 수 있겠죠? (사실 구몬 학습지를 미루던 어린이는 여전히 구몬 학습지를 미루는 어른이 되었다는 후기가 많긴해요.)

 일찍 아이를 낳은 친구들은 이미 학부모가 되었는데 저는 제 자신을 피아노 레슨에 보내고 구몬 학습지를 시키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게 그동안 제가 엄마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유겠지요. 저는 제 자신을 돌보고, 더 성장시키고 싶어요.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싶고 언젠가는 유학도 가고 싶고요. 안해봤던 운동도 해보고 싶고, 안가본 나라에도 다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일단 오늘은, 구몬 한자 학습지 열 장을 풀겠습니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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