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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거울 Mar 27. 2024

달동네

아침편지 10


근처 빌라 1층 주차장에 살고 있는 고양이와 마주쳤어요. 눈이 몰린 게 매력입니다.



다시 아침이 밝았습니다. 어제밤 별다른 이유 없이 기분이 가라앉더니, 아침에도 몸이 찌뿌듯합니다. 저와 남편의 신상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고, 월경도 끝났습니다. 굳이 원인을 찾아보자면 어제부터 날씨가 계속 흐리기 때문일까요? 궂은 날 아침에는 몸을 일으키기가 더 힘드니까요. 만약 흐리고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 살았다면 나는 분명 계절성 우울증으로 고생을 했을겁니다. 창 밖에 조금씩 비가 내리네요. 촉촉한 봄비가 내리고 나면 꽃이 피어난다는 걸 떠올리며 나도 나만의 꽃을 피우려는 이 삶을 또 하루 살아보겠습니다.

우리 부부는 집에서 가장 큰 방을 서재로 사용합니다. 아주 큰 책상 두 개를 양 쪽에 두고, 가운데 등을 돌리고 앉아 각자의 책상을 쓰는 구조입니다. 내 책상은 창문 앞에 있는데, 창이 한 쪽 벽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을만큼 아주 큽니다. 커튼을 모두 열어두면 창 밖의 풍경이 시원하게 보여서 좋지요. 창 밖으로 보이는 높은 구릉지에는 오래된 주택들이 줄지어 늘어섰습니다. 높은 집에서 내 모습이 훤히 들여다보일까 궁금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집은 불투명한 유리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창 밖으로 사람들을 관찰할 때가 많습니다.

바로 옆 건물의 옥상은 내 자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공간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비교적 나이가 많지 않은 할아버지 한 분이 올라와 우산을 쓰고 빗물을 받을 고무통을 정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장독대를 열고 장을 꺼내거나, 작은 임시 텃밭을 가꾸거나, 옥상에서 김장을 하는 모습도 봤지요. 그 옥상을 제외하면 다른 건물들은 아주 조용합니다. 창문은 대부분 꼭 닫혀있고요. 아, 생각해보니 엄청 이상한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좀 더 뒤에 있는 집에는 옥탑방이 딸려있는데 한 청년이 상의는 홀딱 벗고 반바지만 입은 채 야밤에 옥탑방 앞에 전구를 달고 있었습니다. 나와 남편은 갑작스럽게 한 젊은이의 멋진 몸매를 감상하게 된 겁니다. 카메라로 보이는 무언가를 세워두고 열심히 마당을 꾸미는 것을 보아 그 노출은 보여주기 위함이겠지만, 우리는 그 생방송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얼른 커튼을 쳤습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창 밖의 이 달동네 풍경이 낯설었습니다. 나는 전국 여기저기 많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았어요. 도시도, 시골도 다 살아봤지요. 그런데 이런 구릉지 작은 산에 층층이 올라가듯 높게 쌓은 낡은 동네 풍경은 서울이나 부산처럼 아주 큰 도시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 것 같습니다. 시골에서는 다 쓰러져가는 초가집일지라도 산비탈에 몰려 있지는 않거든요. 어쨌든 낯설었던 이 동네에 이사온 지 3년차가 되었습니다. 이제 창 밖의 풍경은 익숙하고, 이 동네의 모습도 정겹습니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이 많아 밤에는 무서운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한 번도 큰 소리가 난 적은 없습니다. 술을 먹고 난동을 부리거나, 동네를 엉망으로 만드는 사람도 없어요. 대신 보행보조기를 밀고 아주 천천히 걷는 할아버지, 해가 좋을 때는 골목 귀퉁이에 의자를 두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들, 길고양이의 밥그릇 주변을 늘 깨끗하게 청소하시는 마음 따뜻한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지하철역은 멀고, 주차할 곳은 없고, 주변에 큰 복합 상가 같은 것도 없습니다. 대신 작은 갤러리가 많고, 사장님 혼자 운영하는 작은 식당, 카페, 빵집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이 동네가 너무 좋아져서 다른 곳으로는 이사를 가기가 싫어질 정도가 되었지요.

어제는 주민대표회의에서 보낸 재개발 소식지를 받았습니다. 좁은 골목길 때문에 소방차나 구급차가 들어오지 못하고, 가파른 언덕엔 눈이 오면 차가 다니지 못하니 당연한 이야기지요. 우리 부부는 젊고, 아직 살아야 할 날이 더 많으니 잘 된 일입니다. 특별한 문제 없이 진행된다면 10년 뒤에, 더 늦어진다고 해도 20년 뒤에는 새 아파트가 될 겁니다. 그 때까지 이 낡은 동네에 계속 살 필요도 없어요. 재개발 바람으로 동네가 들썩일 때, 누군가에게 이 집을 팔고 떠나면 약간의 돈도 남길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이사를 할 생각을 하면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들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살았지만 이렇게 동네 자체에 정이 든 건 처음이라 그럴까요? 옥상 할아버지가 물통 정리를 마치고 내려간지 한참 지났습니다. 나도 일단은 오늘을 살러 가야겠어요.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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