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09년 독일 리더작센주의 주도 하노버에 살게 되었다. 이사오기 전 트리어 도시보다는 제법 큰 도시였다. 초등2학년이 된 딸아이는 유치원을 함께 다녔던 독일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한국을 떠날 때는 6살이라 이별에 대한 감정을 알지 못해서였는지 슬퍼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등학생이었던 녀석은 1년을 함께한 친구들과는 뭔가 달랐다. 독일어가 익숙해지고 동네 소꿉친구가 생겨 방과 후가 즐거웠을 무렵 이사여서인지 내향형인 아이는 더욱 말이 없어졌다. 하노버는 겨울에 유난히 눈이 많이 왔고 세차게 부는 겨울바람은 무서울 정도였다. 아이의 학교는 시내에 위치한 영국학교였다. 독일어에서 영국식 영어로 공부를 하게 된 녀석은 생각보다 적응이 빨랐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담임선생님이 독일인이었다는 건 윤에겐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업 시간에는 독일어를 쓸 수 없었지만 윤에게만은 소통의 어려움을 느끼면 쓸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녀석은 생각보다 학교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독일에 있는 영국 학교를 다니다 보니 여러 나라를 이사하며 살아야 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가 섞여 있는 환경에서 딸아이는 더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자신처럼 모국어가 더 편한 아이를 발견해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배운 외국어가 독일어인 딸아이는 영어를 독일식으로 읽기 시작했다. 자신이 배운 독일어 글자와 비슷한 글씨들을 읽으며 더 재밌어했다. 가끔 영어와 비슷한 단어가 나오면 더욱 흥미로워했다. 알파벳 발음도 달라도 너무 다른 언어였지만 독일어를 처음 배웠던 속도보다는 더 빨리 언어를 배웠다. 윤은 7살 때부터 언어 공부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역할놀이였다. 방과 후 집에서 혼자 놀며 하루종일 선생님 놀이를 하며 익힌 언어였다.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덕분에 그림카드 단어장을 만들어 놀기를 즐겼다. 단어장 자체제작의 달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공부가 아닌 놀이였다. 영어를 독일어처럼 읽어도 비웃지 않는 친구들의 배려도 한몫 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는 열심히와 성실히라는 단어보다는 재밌다 신기하다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이는 그렇게 각국에서 모인 아이들과 때로는 알 수 없는 언어를 섞어가며 놀았던 어린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기억한다.
언어는 관계고 수단일 뿐 인생에 훈장이나 자격증은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