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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아저씨 Oct 19. 2017

꼬꼬마 커플의 사랑스런 염장

순간의 다이어리 #3. 착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다


10월 19일. PM 10:28.


종일 바깥 업무가 많아서 노트북을 펴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외근을 자주 해야 좀 더 많은 일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데, 너무 오래 강북구에만 살았는지 한강만 한 번 건너갔다 오면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은 저녁 시간이 지나가던 차였다.

11월 부터는 광고비라도 메꿔보려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라, 열심히 신변잡기를 써내려가는 팔자 좋은 순간이 보름도 채 안 남았기에 몸과 머리가 얼른 짐싸들고 카페라도 가보라고 난리다. 몸이 영혼의 멱살을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과연 오늘 내가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하는 강박과 함께.


대체로 이런 날은 뭘 쓰고 싶어도 제대로 써 지지 않는 날이다. 글 쓴다고 가서 음료만 먹고 살이나 쪄서 오던가, 흡연실이 있는 카페의 경우 담배나 태우고 오기 마련이다. 그러면 집에 돌아와서는 음료값이 아까워서 동동거린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던 찰나였다. 내 옆자리에는 이제 15~16세나 된 듯한 앳된 커플들 둘이 마주앉아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자주 찾는 이 카페에 이 시간대 오는 10대 아이들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다.

셋 이상 모이면 고성으로 '시발시발' 을 아주 찰진 라임으로 말의 앞 뒤, 중간 가리지 않고 어찌나 보태는지 영혼이 탈출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마주 앉은 커플 중 여자아이가 공부를 지루해하는 남자아이에게 말한다.

내 예상을 뒤엎은 아주 나직이, 조곤조곤하게도.


"너어, 이거 자꾸 틀리면 앞으로 너 안좋아해 줄거야."


이 말 하나가 귀에 또르르 굴러들어 오는 순간, 귀엽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심장이 아팠다.

말 하나가 하늘에서 땅까지 진자운동을 시작하였다. 염장이었다.


"아, 그건 싫은데 모르겠는걸 어떻게 하라고. 진짜 치사하다. 아 진짜."


라는 남자아이는 엎드려서 지루한 듯 책을 보다가 일어나서 쏘아붙였지만 눈은 이미 정신이 확 깬 뒤었다.

안좋아해 준다는 엄포를 놓은 짝궁이 입술을 부푼 홍시처럼 내밀고 자기 공부를 하는 것을 가만 보더니 싱긋 웃는걸 보았다. 그러더니 손을 내밀어 짝궁이 너무 예쁜지 머리를 쓰담쓰담 해 준다.


"안좋아한다고 했다."


여자아이의 시선은 여전히 자기 책을 향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주의력을 상실해 버렸다.

뭔가를 공부하는 것 같다가 다시 짝궁을 바라보다가, 먼 산 한번 바라보다가 정신이 없다.


"아 진짜, 너 이렇게 공부 안하면 나 집에 갈거야. 집에 갈까?"

"할게, 할게. 잠깐만."


언제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연애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집에 간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정도는 세포단위로 기억하고 있었다. 순간 남자아이의 무운을 바람과 함께, 제발 공부좀 해라 라는 탄식이 입 밖으로 새어나올 뻔 했다. 다행히 또 한 5분 열심히 공부한다. 둘 다 말이 없다. 바로 옆에서 글을 쓰는 나는 조마조마해서 미칠 것 같다.


응원도 아니고, 걱정도 아닌 아저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확히 5분 뒤에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게 손을 내밀었고, 여자아이는 곱게도 흘낏, 찰나의 순간을 째려보더니 손을 덥석 잡고 같이 나간다. 뭐야. 이거.


그 흔한 욕 한마디, 고성방가 하나 없이 공부를 하네 마네 신경전을 벌이고, '고작 공부에 연애의 끝을 달릴 것 같았던' 이 예쁜 아이들이 카페를 휙 하니 떠나버리고 갑자기 멍해졌다.


간만에 되게 사랑스러운 어떤 것을 보았다. 착하고 예쁘다고 할 수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솔로로 지낸지 4년이 넘어가는 쓸쓸하고 찬란한 가을 날에 나의 멍한 이 마음은 갑자기 극심해진 외로움인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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