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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아저씨 Nov 01. 2017

나의 사랑을 주고 싶었어요

미미. 찌는 듯 한 여름에 다가와 여름에 사라진, 내 아픈 손가락.


보고싶고 보고싶은 바깥 내 동생. 미미야. 어디 있니.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니.


수십년 만의 폭염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던 2016년 6월 어느 날 밤이었다.

새벽 1시 쯤 빌라 계단에 주저 앉아 음악을 가만 듣고 있던 내게 미미는 아무런 경계도 없이 다가왔고, 마침 가지고 있던 한 줌의 사료를 먹은 후 내 앞에 가만히 마주 앉았다. 먀옹. 하고 울었다. 수다쟁이었다.

처음 마주하는 관계임에도 살짝 내민 손에 기다렸다는 듯이 머리와 몸을 부비적거렸다. 행복해 했다.


그리고 그 후 어머니와의 밤 산책길에 몇번 더 우연인 줄 알고 마주친 이후로는, 어머니의 다리에 자기의 몸을 부비대며 있는 힘껏 친해지고 싶어 했다. 미야 미야 울면서 애교란 애교는 다 보여줬던 아이에게 처음에 경계했던 어머니도 어느 순간 마음을 열고 '밥은 먹었니?', '어디서 잤니' 를 물어보는 순간이 늘어났다.

자기가 할 말은 많지만 대답은 잘 안했던 아이는 산책 가는 뒷 모습을 한참 지켜보다가 사라지고는 했다.


우연한 만남인 줄 알았지만, 미미는 그 이후로 빌라 주변에 아주 빈번하게 나타나는 고양이가 되었다.

학원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집은 미미가 있기에 너무나 위험천만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곳이었다.

자기를 조금만 이뻐해 주는 아이들 앞에서는 체통 없이 발라당을 시전하면서 온갖 맛있는 것들을 얻어먹기도 하고, 학원과 독서실을 다니던 아이들이 전용 간식을 가지고 다니게 만들었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빠듯한 생계를 살아가는' 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빌라 주민들과 학원 건물주, 관리하는 사람은 언제든 아이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다. 싫어하고 혐오하는 감정의 상태였으니까. 없어졌으면 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으니까.




"나 있잖아요. 곧 예쁜 아이들을 낳을 것 같아요. 어떻게 하죠?"


폭우가 쏟아지기 직전의 7월이었다. 미미는 여전히 낮이고 밤이고 학원과 우리 빌라 사이에서 잘 놀고 있었다.

다만 조금 더 위험한 행동을 하나 하기 시작했다면, 빌라에 자꾸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굉장히 황망한 표정으로 한 마디 하신다.


"너, 미미 배 봤니? 심상치가 않아. 젖 물릴때 그러는 것 처럼 젖꼭지가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하고."


안그래도 요즘 부쩍 뚠뚠이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하도 잘 얻어먹고 다녀서 그랬다고만 생각했다.

나만 몰랐던 것이지, 일부 미미를 걱정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조만간 아이 낳을 것 같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다고, 이걸 어쩌면 좋겠느냐는 말이 있었단다. 물론, 이 사실은 싫어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새끼 고양이 낳으면 빌라가 온통 고양이 소굴이 될 것이라는 발칙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다가가서 지켜보니 누가 봐도 임신한 상태였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몇 번의 발라당을 끝으로 미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학원 아이들과 어머니, 나,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아이가 출산할 것임을 직감하고 찾아보고자 했으나, 고양이 습성 상 사람이 알 만한 곳에 아이를 둘 턱이 없었다.


며칠 뒤 늦은 밤, 미미찾기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집 앞에서 익숙한 고양이 하나가 나타났다.

미미는 어머니가 놀라 주의를 줄 만큼, 그날 밤 눈을 맞추고 계속 뭐라고 말했다. 나 오늘 아이 낳는데 어떻게 하냐는 말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백설이가 집에 있어서 공간이 없는 우리로서는 알아 들으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게 더욱 경황이 없도록 했다. 다만, 미미가 돌아왔다는 것은 결국 이 근방 어디에서 아이를 낳겠다는 것이므로 발견하면 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도록 이것저것 재료를 급히 찾는 일과, 혹여 옥상에서 낳을 수도 있으니 청소를 해 두는 일이었다. 그것도 살금살금.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두 천사를 품은 미미. 쫓겨나다.

그리고 나는 사람에게 처음으로 욕을 하며 싸웠다.


미미는 또 자취를 감추었고, 3일 후 빌라를 온통 뒤집어 놓았다. 미미가 지하실 으슥한 곳, 가까이 있으면서 생각도 못한 곳에 젖먹이 2아이를 낳아놓았기 때문이었다. 미미를 사랑했던 사람들, 조금 싫어했던 사람들 모두 눈도 못 뜬 꼬물이 앞에서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새로운 생명이란 그렇게 사랑스러웠고, 끝내 밖에서 아이를 낳게 할 수 밖에 없는 나로서는 미안함으로 얼굴도 들 수 없었다.


이 순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유학가서 뭘 배워오셨는지 개념 없이 중학생 아이가 부모에게 싸우면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대낮부터 밤까지 피아노를 쳐 대는 당신들은, 두려워 웅크리고 있었고, 아이를 낳아 그 수다스러웠던 울음도 고요해진 고양이 식구가 싫다고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그냥 당신들이 고양이가 싫었으니까. 싫어할 수도 있지만, 당신들의 삶의 배경에 도덕과 공존이라는 개념은 애초에 없었던 것 같다. 덜덜 떨고 있는 고양이 식구들을, 아직 눈도 못 뜬 아이들을 해칠것 같아서 내가 내 손으로 최선이라고 생각했을 보금자리를 옮겨줘야 하는 일을 하도록 만들었으니까. 당신들의 증오로 몇 번이나 다른 보금자리로 옮겨주고 와도, 미미가 아이들을 물고 지하실 그 곳으로 되돌아 오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우리 가족은 그 모습에 눈물지을 수 밖에 없었으니까. 그 절박함에.


급기야 보금자리 옮겨주는데에는 우리 가족과 맞은편 건물의 상가분들까지 합류해야만 했다. 새벽 2시에.

나는 이미, 당신이 빌라 아주머니들에게 "나는 고양이가 너무 싫어서 몇 번 때려죽인 적도 있다" 는 소리를 협박이랍시고 한 적도 있다고 들었다. 그래도 머쓱했는지 나와서 아내랑 고작 한다는 말이 '태어났어도 고양이가 싫은건 싫은거다' 였다. 그 순간에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일곱 명의 손길이 있었다.


당신들은 아마도 나보다 15~20년은 더 살았던 것 같다. 그런 당신들이 던진 평소의 말, 행동들은 36년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면전에 대고 더러운 말을 하게끔 만들었다. 당신들은 나라는 사람조차 망쳐놓았다. 당신이 고양이를 싫어해서 때려죽였다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서 삽자루를 거꾸로 들고 '나도 당신들이 싫으니까' 때려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 배웠다. 싫어하는 감정이 굉장히 권력적이고 폭력적이라는 것을.

반대로, 싫어하는 감정의 반대편에 있는 나 역시 지킬 것이 있으므로 감히 폭력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을.

엄연히, 나도 '싫어하는 것' 이니까.


쫓겨난 미미를 위해 급조한 새로운 집. 물론 미미는 두 아이를 모두 잃었다.


이제 세상에 1년 조금 넘게 살았을 미미가 처음 낳았을 것 같은 두 천사였다. 우여곡절 끝에 학원 부근에 새로운 임시 거처를 만들어 주고, 제발 건드리지 말아달라고 나와 학원 학생들의 호소 어린 글들, 전화번호들이 부착된 후, 어머니와 다른 아주머니가 고양이를 싫어했던 이들과 평소 죽이 잘 맞았던 관리자에게 빌다시피 아이들 독립할 때 까지만 봐달라고 사정한 후에야 미미는 보호라는 것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미는 육아에 너무나 서툴렀다. 손길들이 주는 사랑으로 잘 먹고 잘 움직이고 아이들을 품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이들보다는 사람들의 손길을 좋아했다. 일부러 가까이 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옮긴 날 새벽이, 갓 세상 빛을 본 아가들에게는 너무나 힘들었는지 한 아이는 곧 숨을 거두었고, 한 아이가 남자 미미는 더욱 육아에 관심이 없어져서, 결국 젖먹이를 키워본 학원 아이에게 입양을 가게 되었다.

미미는 그렇게 생명의 탄생이라는 행복함, 엄마가 된다는 작은 기쁨조차 누리지 못했다.


홀로 남은 미미가 밤을 서성이며 구슬프게 울던 어느 날인가는, 아이를 쫒아낸 집의 중학생 아들이 시끄럽다고 가까이 온 미미를 발로 걷어차려다가 나한테 딱 걸려서 욕을 먹기도 했다. '시끄럽잖아요' 라고 궁시렁대고 반론하기에는 너와 네 부모가 지은 죄가 너무 컸다.


7월 28일. 몸조리도 제대로 아직 못한 채 미미는 사랑하는 손길이 많았음에도 그렇게 자취를 감추었다.

밤산책에 아무리 애타게 미미를 찾아도, 미미는 보이지 않았다.






미미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4개월여가 지나 날이 차가워진 후였다.

빌라 앞을 다시 서성이던 미미가 너무 반가웠던 어머니와 나는 아이를 불렀지만, '야옹' 하는 한 마디만 던지고 완전 다른 고양이가 되어 있었다. 벌러덩도 다가옴도 꾹꾹이도 하지 않았다. 사랑스러웠던 눈은 깊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4개월만에 다시 돌아온 미미.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알아보고 살갑게 대하는데 또 반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미미의 경계보다 더 나를 속상하게 한 것은, 미미의 이마에 남겨진 옅은 동그라미의 담뱃불 자욱 때문이었다. 옅은 흔적이지만 이마에 남은 흔적은 최소 1-2달은 된 상처였음을 말해주고 있었고, 다행히 미미가 깊은 고통을 받기 전에 도망쳤거나 재를 떨어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는 고양이의 경우, 생각보다 활동반경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비춰보았을 때 미미는 또 이 동네 어딘가에서 다쳤을 것이리라.

또, 귀 언저리에는 고양이간에 다툰 듯 한 상처도 딱지가 앉아 있었다.


미미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미미의 아양을 보고 이 아이는 태생이 길생명이 아니라, 누군가 유기한 생명이 살아남은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만일 정말 그랬다면 미미에게 그나마 빌라와 학원 사이의 따듯한 손길들은 외로운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공간이었고, 그 공간 바깥은 길들여진 아이가 스스로 생존하기에 너무나 극복해야 할 곳이 많았다. 어쨌든 미미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다.


계속 말을 걸어도 시큰둥하고, 절대 이전만큼의 곁을 주지는 않았지만 슬픔이 가득 찬 눈빛으로 마주 응시해 주거나, 이따금 길에서 만날 때 '야옹' 하고 다시 울어주기 시작한 것 만으로도 기뻤다.


미미의 겨울은 그렇게 찾아왔다.


나름 완벽하다 생각했던 3중방수방풍 겨울용 미미하우스
고객님 어서옵쇼 ㅎㅎ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먹방 타임


모든 것이 얼어붙어 갈 때, 사진처럼 주변에 온갖 것을 활용해서 집과 밥먹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물론, 이로 인해 주변 환경이 더러워지면 안되기에 언 손을 녹여가며 매일같이 청소를 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추울까봐 안에는 다치지 않게 핫팩도 넣어주고는 했다.

심지어 날 좋은 날에는, 여기에 레몬소주를 뿌려 소독도 하고, 안에 있는 천을 탈탈 털어 일광소독도 해 주고는 했다. 내 집 하나도 없는 30대는 이 집을 지으면서 나도 내집마련을 하고 싶다며 슬퍼했다고 한다.


이렇게 겨울을 나면서, 다행스럽게도 이 곳에 밥을 먹으러 온 다른 아이들과 크게 부딪히지도 않으며 잘 지내왔던 미미가 또 홀연히 사라진 것은, 개나리와 진달래가 막 피어나던 계절 즈음이었다.




키울 수 없다면 차라리 먼 발치에서 지켜봐 주면 어땠을까..



따스해진 햇살 속에서 미미를 발견한 것은 어머니였다.

다행스럽게도 미미는 밥 주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고, 척박했던 빌라와 학원 틈보다 훨씬 나은 곳에서 예쁨을 받고 있었다. 길 가던 손길도, 주변 사람들도 애교가 많았던 미미를 그렇게 미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나가다가 먼 발치에서 만난 미미는 이따금 작년처럼 길에서 발라당을 하며 사람을 바라보기도 했다.


어머니와 내가 '치즈' 라고 불렀던 미미가, '미미' 라는 예쁜 이름을 얻은 것도 이 즈음이었다.


미미가 새로 발견된 곳에서 마음을 안도하게 했던 작은 집


더욱 다행이었던 것은, 길가 건물에서 살아가시는 한 분께서 사진처럼 미미를 위한 집과 밥, 물을 두고 미미네 집이라는 명판까지 정성스럽게 달아 주셨던 것이었다. 이 곳에서 미미는 그 동안 간절하게 원했던 사랑과 함께 고된 삶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만 같았다.


미미를 애지중지하던 어머님께서는, 이 거리를 지나면서 미미를 마주하다가 이 정성의 주인공과 만나 담소를 하며 인연을 만드시기도 하셨다. 날도 좋았고, 적당했고, 미미에게 남은 것은 꽃길인 듯 싶었다.


하지만, 여름이 될 무렵 미미는 아마 이 분의 집에도 들어가게 되고, 돌보아 준 분 역시 미미를 반려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길생활에 익숙하진 미미는 아마도 씻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던 모양이다.

물론, 대부분의 고양이가 샤워를 싫어하지만, 어찌 보면 미미에게는 고단했던 길생활을 접을 수 있던 선택지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분도 많은 노력을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완연한 여름이 될 무렵, 이 길가를 늘 산책하던 어머니와 나의 시선에 집도, 물도, 밥도 하나씩 사라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미미는 이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 지, 여전히 그 집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모두가 곤히 자는 새벽에는, 자신이 사랑받았고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공간 주변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고, 간혹 이 낮설어진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언젠가 나를 다시 찾아줄 것이라는 기다림이 지루했는지, 주변 나무 위에 훌쩍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우리 동네에 있을 때는, 그래도 간혹 친구들로 보이는 고양이들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보았지만, 100m 쯤 떨어진 이 곳으로 옮긴 이후 만난 미미는 언제나 늘 혼자였다. 드디어 마음을 나눌 누군가가 나타났기에, 친구가 딱히 필요 없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런 미미는 새 보금자리에서 한동안 먹었을 밥에 길들여 져서인지, 아니면 내가 주는 밥이 맛이 없어서인지 도통 밥을 먹지 않았다. 기다려도 보금자리로 여겼을 그 곳에서는 더 이상 밥과 물, 폭신한 잠자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였다.

많은 시간을 미미는 또 그렇게 기다렸다. 그리고 이 만남도 점차 간격이 길어졌다.


나는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사람의 마음, 미미의 마음 모두를 다 알 것만 같았기에.

다만, 조금 더 곁으로 다가올 떄 까지 먼 발치에서 바라봐주었으면 어땠을 까, 미미가 씻었으면 어땠을 까 하는 마음만 복잡하게 요동쳤다. 미미와 반려로서 함께 하지 못한 나의 상황도 큰 미안함이었다.

미미를 이렇게 만든게 나인 것 같아서. 아니. 나였기 때문에.


마지막 만남을 끝으로 비가 참 많이도 내렸다. 장마였다.




여름이 끝날 무렵, 동네에는 몇 가지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돌보던 길아이의 토막살해부터 시작해서, 집단으로 아이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실제로, 이 장마를 지내고 나서 내가 멀리서 밥을 나눠주던 아이들 모두가 사라지기도 했고, 미미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아이들의 급식소였던 곳은 어느 순간 다 치워져 있거나 부서져 있기도 했다.

산책하다가 만날 수 있는 건너마을 은행나무길의 급식소도 자취를 감췄다가 생겼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그 빗속에서 있었는지 모르겠다.


다만, 이따금 길고양이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소를 하기도 하기에 차라리 먼 길 떠났구나 인사 한 번 하고 가지 라는 마음이고 싶다. 단독주택이 다 없어지고 학다리에 비만같은 빌라들이 잡초처럼 모든 공간에 세워지고 있는 이름 예쁜 '장미원' 이라는 이 동네에, 아이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지도 걱정되지만.


미미를 그렇게 떠나보낸 지 오늘로 대략 4개월 쯤 지나가고 있다. 여전히 길에서던 어디서던 갑자기 툭 하고 나와주기를, 인사해주기를 기대하며 어머니와 나는 눈을 부비며 걷는다. 막상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좋아했던 습식 사료라도 챙겨주고 싶다.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란다.


사랑을 가득 안고 여름에 온 미미는 계속 다쳤고, 아파했고, 상처받던 생명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좋아해 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영특하게 알았고, 거기에 마음을 기대어 살아갔던 아이였다.

어쩌면 이 익숙한 공간을 뒤로 하며 미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모든 추억들에게,


"나는요, 그냥. 내 사랑을 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사랑받고 싶었어요.

  그게 인간들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어서, 서툴러서 너무나 미안해요."


라고 말하며 터벅터벅 걸어갔을 것 같다. 살아있지 않다면 그 따듯함을 끝까지 기억하고 눈을 감았을 것 같다.

나쁜 손길에 의해 생을 마쳤다고는 믿고 싶지 않다.






보고싶어. 미미야. 사랑해. 이 말 많이 못해줘서 너무나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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