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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쥐아저씨 Oct 07. 2017

사는 대로 써내려 간다는 것

가장 나답지 못한 글쓰기는 '잘 보이기 위해 쓰는 글' 이었다.



유시민 선생님의 다양한 말과 글 중에 '사는 대로 쓴다' 라는 귀절을 참 좋아한다.

무언가를 쓰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은 것은 아니지만, 써내려간다는 것의 자율성과 인간미를 이보다 더 함축적으로 담아낸 표현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글쓰기 방법을 논하는 많은 서적들의 일괄적인 핵심인 '아름답게 글쓰기' 라는 도식에 슬슬 지쳐가고 있던 찰나였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바라보고 고민하는 많은 것들을 두고 때로는 자기만의 방에서 스스로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글자로 옮기는 일 마저 도식화 되는 것 같아서일까. 물론, 글을 쓴다는 것의 절반 이상은 타인과 공감하고 보여지기 위한 욕구를 반영하는 것 또한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문장, 세련된 단어 선택, 가끔은 구어체를 섞어서 사용할 만큼 우리 살아가는 일상과 관찰들이 늘 고고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는 대로 쓴다는 것은 유시민 선생님의 의견과는 조금 다를 지 모르겠지만 보고 듣고 느끼는 자신의 모든 순간을 '최대한 많이' 써 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너 사는 대로 썼기 때문에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여섯 번의 백일장 기회 중에 네 번의 장원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당시의 기억이 생각을 글로 정돈한다는 즐거움을 후일 살아가는 데 선물했다면, 한 편으로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 한 번이면 족하지 않았었나 싶기도 하다. 

어린 나이였던 만큼 '평가 받는 글쓰기 대회' 에서 장원이란 선물을 받게 된 계기가 무척 궁금했던 나는 은사님들께 이유를 여쭤보았고, 그 분들이 웃으시며 하셨던 대답은 간결하고 한결같았다.


"너 사는 이야기를 편하게 잘 써서."


고3 무렵에는 쓴다는 것에 대한 즐거움이 자만감으로 변질되어 갔던 시기였다. 그 즈음 해서는 대학에 들어가면 다른 공부를 해 보고 싶다는 목표를 망각하고 막연하게 유수 대학들의 문예창작학과 입시에 지원하려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냉정하게 아직 더 많은 경험을 해 보는게 중요하다는 은사님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학교 대표로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주관하는 전국 백일장에 나갔다. 가을 날 따듯한 햇살, 살랑거리는 바람과 함께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마음 편하게 글을 쓴다는 로맨스만을 바라보고 나갔으면 오히려 좋았을 뻔 했다. 마음 속 목표가 '좋은 평가를 얻는 글을 써서 대입 특차를 획득하는 것' 이었으니 결과는 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꽃', '전통', '가을' 이라는 정해진 산문 주제를 받아 들고 나서야 제대로 평가 받는 글이 얼마나 어렵고 재미 없는 작업인지, 나는 학문적인 작가로서는 한참 부족함을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특정 주제에 대해 세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끄집어 내어 학문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내려 간다는 것. 학교 망신을 시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원고지 위에 눌러 쓴 그 글자들은 지금도 전혀 기억 나지 않는다.

단지, 자괴감에 같이 참가했던 동창과 함께 평택 거리 포차에서 소주 한 잔 사먹은 것 밖에는.


 

쓰는 재미를 알게 된 혼자만의 환상 소설 쓰기와 톨킨


이후에도 결국 허상이 만들어 낸 목표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추계예술대학교, 명지대학교, 고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입시 실기에 도전하였고, 한 글자의 기억도 나지 않는 글을 쓴 후 탈락의 고배만을 마시게 되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글, 인정 받는 글' 이란, '어렵고 멋지게 쓴 글 또는 은유와 비유가 오케스트라 악상처럼 잘 맞춰진 글' 이라는 편견에 사로잡혀 한 동안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그 즈음 해서 누군가가 '너의 글은 문장의 호흡이 너무 길다' 라는 비평을 한 것 또한 가시처럼 박혀 있기도 했다.


입시를 위해 어설프게 노력했던 어렵게 쓰는 글은 다행스럽게도 대학에서 각종 레포트를 작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기는 했다. 어려운 책을 보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서 내가 하고 싶은 주장과 잘 조립하는 글.

평가를 위한 어려운 글쓰기 기법은 어려운 책의 어려운 글을 정돈하는 데에, 문장의 긴 호흡은 주제에 대한 나의 주장을 막힘 없이 쓰는 데 아주 좋은 도구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아주 보통의 이야기, 로직에서 자유로운 글쓰기에 대한 욕구는 마음 안에 살아있었고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은 영문학 공부를 하며 우연히 읽게 된 J.R.R 톨킨의 반지전쟁과 실마릴리온이라는 서적이었다.

빠르고 간결하며 정돈되고 보기에 예쁜 것으로 글을 평가하는 시선에서, 그의 환상소설은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일 것이다. 상상의 서사를 가능한 모든 글쓰기의 방식을 망라하여 아주 느리고 자세하게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느림의 서사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동화로서 들려주기 위함' 이었다는 점이 몹시 매력적이었다. 아이를 위한 동화, 즉 편한 이야기로서의 쓰기였던 만큼 더욱 정성이 들어가고 세밀하며 섬세하며 우아해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스물 두 살 입대 전, 다시 원고지를 꺼내 들고 매일 환상소설이라는 것을 쓰기 시작했다. 

용과 검, 마법, 신화가 공존하는 그 뻔한 이야기를.

강의가 끝난 매일 저녁이 그렇게 신날 수가 없었다. 톨킨과 같은 섬세하고 느린 글쓰기도 충분히 공감과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글쓰기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위안을 얻었고, 텅 빈 커다란 흰색 종이에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예전에 은사님들께서 말씀하신 '내 사는 이야기' 가 점점 채워졌기 때문이다.

평가 받을 생각에서 자유로워 진 1,500장 넘는 원고지 속에서 숨쉬었던 사람, 사건,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은 나, 함께 해 준 사람들, 눈에 담았던 풍경들, 나를 만들어 왔던 수 많은 배움들이 재료로서 반드시 필요햇다.

심지어, 어떤 순간에서는 짝사랑의 아픈 기억이나 설레었던 첫 연애의 달콤한 대화들도 필요했다.

이 모든 것들은 가상의 세계에서 내가 아닌 것들을 통해 자유롭게 구현되었다. 20년 삶의 자서전이 써 졌다.

톨킨이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간 동화, 자신의 상상과 경험이 어우러 진 이야기를 쓸 때 얼마나 행복했을 지 문득 깨닫게 되었다.


가장 위대한 글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세상 모든 사람이 쓰고 싶어 쓰는 글이라고 믿는다.



황혼길에서 한글을 깨우치신 노부모의 편지는 비평가의 글보다 아름답다


모든 글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감흥을 줘야 할 이유는 없다. 

글은 애초에 보여지기 위한 욕망과, 자신의 텅 비고 고독했던 부분을 차근차근 채워나가는 욕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마다 다른 신념과도 관련이 있다. 가령 내가 선하다고 믿는 길고양이에게 밥 주는 행위가 누군가에게는 길고양이를 더욱 혐오하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누군가의 글을 가운데에 맞게 비평하고 재단하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깊은 감흥을 얻을 기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기에, 나는 여전히 타인의 글을 비평하고 평가하는 것을 업으로 하는 행위들을 가장 소모적인 엘리트주의로 생각한다. 비평이라는 옷을 입은 자본주의의 안타까운 사생아일 뿐이다.


어떤 문체던, 살아 있는 모든 삶의 순간들이 담긴 글이라면 아름답다라고 여긴 가장 큰 계기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한글을 처음 배운 어르신의 손글씨 편지이다. 서툰 글씨에 오탈자도 많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명확하지도 않지만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준다. 어떤 명필의 예술적인 글보다 아름답기만 하다.

얼마나 쓰고 싶었을 까, 전하고 싶었을 까. 자신의 세상을. 자신의 마음을, 진심을.

삶이 담긴 이 조약한 글, 문장을 그 누가 감히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비평할 수 있을 것인가.


지하철 각 역사에 시민글쓰기 응모작으로 여러 가지 시나 글들이 스크린도어에 게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글들에 대해 '내가 써도 이것 보다는 잘 쓸 수 있는 것', '게재 될 만큼의 퀄리티가 아닌 것들' 이라는 불편한 비평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헌법 상 자유인 만큼 비평할 권리도 매우 당연하다. 하지만 그 비평이 대부분 조약하고 아직 원석에 가까운 것들, 너무나 평범해서 나도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날 선 비판을 하는 것에 앞서, 평범한 삶에 대한 느낌을 어떤 방식으로라도 표현한 사람은 미학적이고 기술적인 비판으로 삶을 꼬집는 사람들보다 훨씬 용기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어떤 글이던 쓸 수 있는 사람들인데, 평가라는 잣대로 인한 두려움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들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중일 수도 있으니까.



뭐든 많이 쓰고 행복해하자. 최고의 미학은 평범함임을 믿고.


읽었던 소설 중에서 가장 카타르시스를 느낀 장면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 마지막 장면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 2권>, 다시 말해 '두려움을 없애주는 희극이 우리의 기쁨을 자극하는 방법' 을 불경한 것으로 여기던 호르헤 신부가 책과 함께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다.

이렇게 요약해도 어렵다. 나도 머리 아픈 저 문장을 좀 더 분해해 보면 아마도 '쉽고 평범한 것을 저급하다고 여기는 어려운 것들의 종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어렵고 고결한 것들을 통한 구분짓기로 권력을 소유한 모든 것들에게 웃음은 고뇌에 비해 쉽고 경박한 것이었지만, 절대 다수라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협적으로 느껴졌을 중세 시대였다. 문제는 이 중세시대가 글쓰기에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멋지고 아름답다는 것 또한 원래 개인마다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는 한 가지 추상적인 감정 상태일 뿐 <미학> 이라는 학문으로 연구하고 통찰할 대상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을 어떻게 느끼는 것이 제대로 된 아름다움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시간의 낭비일 것인데다가, <미학>의 정의를 당장 책과 웹에서 찾아본다고 한들 평범한 삶이 눈을 부비고 수 없이 읽어봐도 이해되지 않을 말들 뿐이다.

살아가면서 '아! 아름답다' 라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아름답지 못한 어려움으로 만들고 심지어 그 안에서 순수한 미학과 그렇지 않은 미학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틀로 누군가들을 계몽하려 한다는 것 자체가, 그로 인해 서로 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수 없는 별과 같이 다양한 글쓰기의 '퀄리티' 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바보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되게 어려운 문장이지만, 미학이라는 녀석에 대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방예술을 <삶의 보편적이고 조화로우며 마음을 움직이며 만족스러운 방식으로 자유로이 재현하며, 그 재료는 현실에서 주어진 재료를 통해서> 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를 놓고 철학에 철학을 거치며 <순수예술> 과 <모방예술> 로 나누어, 순수한 예술이 예술의 원래임을 부각시킨 모양이다. 원래 말한 그리스 아저씨가 이러한 확대해석과 소모적 논쟁을 보고 굉장히 웃고 있을 것 같다. 또는 내가 괜한 소리를. 이라고 후회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니까, 용기를 내어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다면 어떤 글이라도 많이 쓰는 것이 좋은 것 같다.

글의 퀄리티는 타인이 쉽게 평가하고 재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의 글을 평가하려 한다면 기꺼이 물어보았으면 좋겠다.

"당신은 얼마나 열심히 당신의 삶을 기록해 보았는가" 라고.

또 한마디를 더 붙여보자.

"자신에게 찬란하게 빛났던 기쁨, 슬픔, 생각 모두를 써 내려 갔을 때의 행복함을 알고 있는가" 라고.


아마. 없을 것이다. 아니, 무엇인가를 용기내어 쓰는 당신보다는 덜 할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한 비평, 사회가 그런 것 처럼 구분짓기 안에서 당신을 굳이 재단하고 카테고리화 하려는 모든 평가의 순간은, 인생의 수 많은 재료를 가지고 자기 입맛에 맞는 맛있는 레시피를 만들어 가는 당신보다 덜 행복할 것이니까. 아름답다는 탄성이 지극히 평범한 것 처럼, 우리의 모든 평범함이 가장 아름다운 미학이 담긴 글로서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아. 물론 악플이라는 글은 빼도록 하자. 그건 글이 아닌 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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