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제사를 지내지 말자고 말해보았다
엄마는 ‘프로제사러’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시집을 와 30년 넘게 제사를 지냈다. 소고기 탕국부터 각종 전과 과일, 고기 적까지 혼자서도 1~2시간이면 뚝딱 제사상을 차리는 경지에 이르렀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도 제사를 치렀다. 눈이나 비가 와도, 어깨를 다치거나 허리가 불편해도 엄마는 한 마디 불평 없이 제사상을 차렸다.
내가 머리가 조금 컸을 때, 나는 엄마를 보며 결심했다. 이 부당한 제사 관행에 반기를 들자고! 사실 나는 제사에 불만이 많았다. 엄마가 고생하는 모습도 보기 싫었지만, 이 유교적 의례가 현대를 사는 우리 삶에 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떠도는 말마따나 진짜 조상 덕 본 사람들은 명절에 해외여행 가느라고 제사 같은 건 지내지 않을 것 같았다.
기회를 엿보던 나는 어느 날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선언했다. 나는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앞으로 제사 일은 하나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그러자 돌아온 엄마의 한 마디.
“이놈아! 그래도 제사는 지내야지!”
내 눈동자가 적잖이 흔들렸다. 엄마는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오히려 숨겨진 최종 보스였다. 반대로 아빠는 내 말을 듣기라도 한 건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이후 나는 제사를 지낼 때마다 더 투덜댔다. 일부러 제사 시간에 늦기도 하고 제사를 지내고 난 뒤 하나도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섭섭한 기색 없이 꿋꿋하게 계속 제사를 지냈다. 설득도 회유도 했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한 마디.
“그래도 제사는 지내야지!”
엄마의 이 말에 나는 결국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거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엄마를 이해할 수 없어 하루는 엄마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엄마, 대체 왜 제사를 자꾸 지내려고 하는 거야, 엄마가 너무 힘들잖아.”
그러자 엄마는 자신의 옛날이야기를 부분 부분 들려주었다. 20대 초반, 사무직을 관두고 시집을 온 엄마에게 양육과 집안일은 일과의 전부가 되었다. 그중 제삿날은 가장 중요한 행사로 엄마의 존재가 가족이라는 집단내에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인정받는 날이었다. 가족은 엄마가 유일하게 속한 집단이었기에 그 인정은 엄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엄마가 나에게 딱히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 이유도 제사상을 차리는 건 온전히 본인 몫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엄마의 노력 덕에 내가 무탈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빼놓지 않으셨다. 30년 세월 동안 제사는 ‘엄마’에게 포기할 수 없는 무엇이 되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란 말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꿀꺽 삼켰다. 엄마를 설득하는 일이 지난 30년의 시간을 설득하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말을 마친 엄마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 앉아 유튜브로 영탁의 무대를 보고 미소 지으셨다. 한 트로트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영탁과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 찾아보는 ‘찐팬’이 되셨다. 그런 엄마를 보고 나는 몇 년 전 엄마에게 권유했던 컴퓨터 학원이 생각났다. 컴퓨터 학원을 권유하던 내 말에 미소 짓던 엄마는 일이 바쁘다며 미루고 미루다 결국 가지 못하셨다. 영탁의 노래가 끝나면 컴퓨터 학원만큼은 꼭 가시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해야겠다. 제사를 지내는 엄마보다 소녀같이 웃는 엄마의 그 모습이 나는 더 좋으니까. 미소 짓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엄마가 엄마만은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