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가차드' 밈을 아십니까

2025. 01. 10. "GigaChad"(특별편)

by 일흔의주정

*제 글을 보러 와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끝까지 읽으실 생각이시라면, 부디 다음 글인 '변명문'도 함께 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기가차드, 오늘 일기를 못 썼어요. 저는 한심한 사람이에요."

- "My boy, 하루 정도 일기를 못 쓰게 되었다고 your life가 끝나지는 않아. 누군가 네 life를 끝내게 두지 마. 더욱 넓은 world를 바라봐."


어제(2025년 1월 10일)부로 인터넷상에서는 묘한 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자기 내면에 '기가차드'라는 어떤 남성성의 화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힘들 때마다 위와 같은 식으로 그와 대화하면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참고로 '기가차드'는 어떤 사진작가가 여러 보디빌더의 이미지를 합성해서 의도적으로 극단적 남성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 낸, '에르네스트 칼리모프'라는 이름이 붙여진 일종의 캐릭터이다


해당 밈이 부상하는 것을 본 나는 처음에 웃었다. 사람들이 참 다양한 방식으로 역경을 이겨내는구나 하고. 그렇게 하루가 지난 뒤, 나는 좀 더 진지하게 기가차드 열풍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현상이 건강한 것인가? 그보다 근본적으로, 왜 사람들은 '자기 안의 기가차드' 놀이에 열광하는 것일까?

2011년부터 2016년까지 TV에서는 '힐링캠프'라는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나는 그때 파라오께서 잠드실 신성한 피라미드를 쌓는 노동자로 징발되어 미처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지는 못했지만, 전해 들은 바로는 유명인들의 몸과 마음을 치료해 주는 컨셉의 프로그램이었다고 한다.


2010년대 초는 힐링 열풍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요새는 금서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책이 유행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결국 힐링이 유행했던 것은 그만큼 다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몸이든, 마음이든. 그리고 우리는 그만큼 간절히 누군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를 바라며 자기계발서에 기꺼이 돈을 갖다 바쳤다.


그런데 이 기조는 2010년대 후반, 정확히는 2015~2016년에 들어서 힘을 잃어버렸다. 이유는 많지만 하나만 말하자면, '수저계급론'이 기사화까지 되어가며 주목받던 것이 바로 그때였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때 우리는 세상이 생각보다 많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내 머리 위에 칼이 매달려 있고 그것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한 칼에 찔린 상처를 절대 잊을 수 없듯이, 세상도 우리에게 그러하였다.

'힐링'이 거짓임을, 애초에 남에게 자신의 상처를 치료받을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동안 견뎌내기만 했던 불합리한 세상은 이제 훌륭한 씹을 거리가 되어주었다. 우리는 정말 온갖 것들에 분노했다. 하지만 그 분노로써 세상이 바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힐링으로 바꾸지 못한 세상은 혐오로도 바꾸지 못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우리는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2010년대 후반의 5년 동안 우리는 모두 한없이 '핫'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5년이 지났다. 분노는 생각보다 에너지 소모가 매우 큰 활동이다. 그리고 때마침 기묘하게도 코로나바이러스라는, 인간이 더 이상 얼굴을 맞대고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병원체가 전 지구적으로 퍼지고 말았다. 그렇게 우리의 2020년대 초반은 '무관심'과 함께했다. 싸울 힘도 없고 코로나도 무서웠던 우리는 이제 등을 돌리고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으며 한없이 '쿨'해졌다.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함?)'과 '알빠노(내 알 바 아니다)'. 이 두 단어만 보더라도 우리의 지난 5년이 어땠는지 감이 잡히지 않는가.


그리고 우리는 2025년에 다다랐다. 또 다른 5년이 흘렀다. 이제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재미나게도 나는 이쯤에서 '절망의 5단계', 흔히 한국에서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로 알려진 퀴블러 로스의 이론이 떠올랐다. 보통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의 순서로 인용되는데, 일각에서는 첨부된 이미지와 같이 '부정-분노-우울-협상-수용'의 순서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이번에 후자의 의견을 끌어다 써 보려고 한다.


2010년대 초반, 우리는 부정했다. '힐링'을 철석같이 믿으며 우리의 상처를 누군가 치료해 줄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2010년대 후반, 우리는 분노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향하여 우리의 화를 쏟아냈다. 2020년대 초반, 우리는 우울했다. 코로나로 집밖에 나가지도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의 사정 따위는 나와 상관없다고 말했다.


비약이 심한 가정이지만, 만약 상황이 이 가정대로 흘러가리라 생각해 본다면, 다음 단계는 '협상'이라고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와 협상한다는 말인가? 원래 이론에서는 하나의 예로 '신과 협상하는 사람'을 내세운다. "하느님, 이번만 살려주신다면 정말 착하고 성실하게 살겠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은가?


"기가차드, 내가 할 수 있다고 말해 줘. 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말해 줘. 제발."

이제 우리는 '협상'의 단계에 들어섰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다음 5년은 우리가 무언가를 신봉하게 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신이든, AI든, 기가차드든 간에 말이다. 부정에 덧없어하고, 분노에 힘을 빼고, 우울함에 지친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믿으며 그로부터 자기 확신을 끌어내려 애쓸 것이다.


다만 나는 2025년의 시작을 알리는 기가차드 밈에서 희망을 본다. 이는 그 신봉의 방향이 어떤 사람이나 개념을 향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믿고 자기와 협상하는 것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는 밖을 바라보는 대신 우리의 안을 바라보는 방법을 마침내 배우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남을 향해 헛된 시선을 보내느라 힘을 빼는 대신, 우리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부정도, 분노도, 우울도 없는 '수용'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들리는, 다음과 같은 목소리와 함께:

"Damn, 드디어 해냈군, My boy. 내가 뭐랬어? 넌 해낼 수 있다고 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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