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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다예 Jun 18. 2020

한동띠 딸이 홍합 손질의
달인이 된 사연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면 엄마의 홍합 손질도 같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해물로 맛을 낸 요리를 많이 먹는 편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값이 싸고 활용도가 높은 홍합을 늘 가까이했다. 엄마는 홍합 손질을 정말 잘했다. 홍합 껍데기 사이 틈에 칼을 밀어 넣어 왼쪽 살을 쓰윽 떼어내고 오른쪽 살을 다시 한번 쓰윽 떼어내면 어느새 붉은빛 물컹한 홍합 속살이 접시 가득 쌓였다. 엄마는 손이 빨랐다. 어렸을 적 기억의 속도를 어렴풋이 재본다면 홍합 하나당 3초 남짓 걸렸던 것 같다. 홍합 껍데기와 칼이 맞닿아 내는 쓱쓱 거리는 소리에 엄마의 손이 다칠까 살짝 겁이 나기도 했지만 엄마는 빠른 손놀림으로 야무지게 손질을 끝마치곤 했다. 짭짤하고 달큼한 바다 향기. 엄마가 손질한 홍합에선 그 바다 향기가 진동을 했다. 


 

 홍합을 잔뜩 넣은 엄마표 부추 부침개는 간장을 찍어 먹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 자체로 맛이 완전했다. 부드러우면서 쫄깃한 식감, 거기에 달콤 짭짤한 감칠맛을 가득 담은 홍합은 실로 부침개의 주연이었다. 기름 듬뿍 두르고 꾹꾹 눌러 지져낸 부침개의 그 고소한 맛에 동생과 내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만드는 속도보다 우리의 젓가락질 속도가 더 빨랐으므로 엄마는 얼마 먹지도 못하고 다시 부지런히 프라이팬 앞으로 향했다. 철없는 나와 동생은 서툰 젓가락으로 부침개를 떼어내며 “엄마 홍합 많이”를 외치곤 했었다. 지금도 나는 부추에 어슷하게 썬 고추 조금, 그리고 푸짐한 생홍합살이 듬뿍 들어간 부침개를 천하 일미라고 생각한다. 


 또한 홍합은 그 국물이 달달하고 개운하여 다양한 요리의 육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엄마의 미역국은 제철 홍합으로 뽀얗게 국물을 내어 시원한 맛이 그만이었는데 그 감칠맛에 한번 길들면 소고기 미역국이 느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홍합 국물을 진하게 내어 국수도 자주 말아주곤 했다. 부추와 당근이 들어간 홍합 육수를 넉넉히 삶아진 소면 위에 부어주면 훌륭한 물국수가 되어 한 끼를 배불리 채워주었다. 특히 추운 겨울 밖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먹었던 홍합 물국수는 코끝이 빨개지도록 차갑게 얼어붙은 몸에 뜨거운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생명력이 있던 음식이었다. 



  

 엄마는 홍합을 까면서 외할머니 이야기를 많이 하곤 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경남 산청의 단성 오일장에서 해산물을 파셨다고 한다. 새벽에 도매로 물건을 떼어 장날 아침부터 팔아야 했기에 장이 서기 전날에 할머니는 바닷가로 나가 다른 상인들과 쪽잠을 주무셨다. 그렇게 고생해서 가져온 해물들로 장날 아침은 시작되었다. 그 당시에는 할머니뿐만 아니라 모두가 가난했다. 돈이 귀하다 보니 할머니의 해물들은 쌀이나 보리와 바뀌거나 외상으로 팔리는 경우가 꽤 되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는 장부가 없어 그 많은 외상을 기억하지 못하고 외상으로 해가는 사람들이 돌려주면 받고 안 주면 못 받는 식이었다. 그래서 다시금 도매로 물건을 사 오기 위해 주변에 돈을 빌리러 다니셨다는데 엄마도 그런 적자로 어떻게 할머니가 장사를 이어나갔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설이 다가오면 홍합을 찾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바닷가 시골에선 명절 제사 탕국에 값이 비싼 소고기 대신 홍합을 넣어 끓여 먹었다고 했다. 설이 시작되기 전 네다섯 포대의 홍합을 집으로 가져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는 온종일 홍합을 손질했다. 홍합의 수염을 뜯고 살을 발라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쉴 틈이 없었다. 그 이후 팔고 남은 홍합으로 떡국을 끓여 온 가족이 함께 먹었다고 했다.


 어렸던 엄마는 항상 고생만 하는 할머니가 너무 가여워 자주 울었다고 했다. 장날 전 밤에 집에서 못 주무시고 바닷가로 향하는 할머니를 보는 엄마의 눈엔 항상 눈물이 맺혀있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서는 할머니의 마음에도 시린 눈물이 가득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바닷가에서 도매로 산 해산물을 가지고 장터로 돌아오면 엄마는 할머니 옆에 붙어서 같이 조개를 깠다. 할머니의 왼손은 조개를 까다 여기저기 베인 자국들로 성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손님들은 할머니를 한동띠(띠는 댁(宅)의 방언)라고 불렀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같은 동네에 살았었기에 한동네 사람끼리 결혼했다고 한동띠라고 불렀던 것이다. 손님들은 엄마를 보곤 한동띠 딸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할머니 옆에 바싹 붙어 “엄마, 너무 많이 퍼주지 마”를 연신 말하곤 했다는데 손이 성할 날이 없을 만큼 고생해서 깐 홍합이 제값도 못 받고 팔리는 게 안타까운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엄마가 해준 홍합요리 속에는 한동띠 딸의 유년 시절이 녹아있다. 엄마가 홍합을 그렇게나 잘 까는 것도, 우리 집 국물 요리에 유달리 홍합이 자주 쓰이는 것도 모두 그 시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홍합은 7남매를 어떻게든 키워보려는 가장인 할머니의 고된 생계수단이었다. 온종일 홍합과 굴을 까느냐 할머니의 왼손은 상처들로 가득했지만 그 상처들이 아무를 틈은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가 견디고 견뎌야만 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은 엄마를 키워냈다.


 나는 사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지역이 멀어 할머니를 자주 뵙지 못했기도 하거니와 할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홍합을 볼 때면 문득 엄마가 홍합 손질했던 장면이 떠오르고 엄마가 들려준 할머니의 삶이 들려온다.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나만 바라보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위해 또다시 바닷가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했던 삶. 배우지 못해 까막눈이 평생의 한 이였지만 그래도 자식들은 당신같이 안 살게 하려고 쉴 틈 없이 몸을 혹사시킨 삶. 어쩌면 나도 나중에 홍합 요리를 만들며 자식들에게 이런저런 기억들을 꺼내게 될 것이다. 홍합 손질 기술은 이미 나 때문에 대가 끊겼지만, 그 홍합에 담긴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계속 흘러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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