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황색 친절

by 강여자


주황색 친절



초록이 성성한 4월 끝

문 사이로 삐죽 고개를 밀어넣은 어르신이 있다


몸에 익은 친절로 어서 오세요 했던 책방 주인은

화장실 좀 가고 싶은데요. 멉니까?

한 마디에 어정쩡한 미소를 띤다

공공 근로 주황 조끼가 쨍하다


다른 사람도 가려나 모르겠다는 투박한 물음

이럴 땐 어째야 하나

찰나의 순간

주황색 한 무리가 들어온다


마수걸이도 못 했는데 너무 하시네 싶은 것이 어느새 장사꾼 다 됐구나

누구는 이 책방 주인이 시종일관 친절해 힘들지 않겠나 했다던데

엄마가 경비원 아저씨 보며 아빠 생각하라 했다는 그이는

주황색 그녀들을 보며 엄마 생각을 한다


책 팔아주는 사람에게만 친절할 거냐 혼자 나무라더니

금잔화 한 다발이 웅성웅성 떠날 적에

가까스로 함박 웃음 짓는


초록이 좋아 초록 지붕 얹은 책방을 하면서도

그의 친절은 어째 주황색이다.






한산한 오후였다. 아이 바람막이를 하나 사려고 아동복 매장에 들렀다.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옷이 있었지만, 찾는 치수가 없다. 고개를 돌려 카운터를 바라보니 점원이 나를 빤히 보고 있다.



“160 사이즈 없나요?"

“거기 있는 게 다예요."

“다른 바람막이는 없나요?"

“저기 가보세요."



가리킨 곳으로 가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잘 봤습니다" 하고 나오는데 잠시 조용하더니 이내 등 뒤에서 쌀쌀맞은 목소리가 들렸다.


“문 닫고 가세요.'


말은 안 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문은 원래 열려 있었거든! 내가 다시 오나 봐라!'



분개하면서도 오늘 장사가 안 돼서 그러려니, 이유가 있겠거니 하며 삭였다. 종종 겪는 일이지만, 이런 경험은 오프라인 매장의 문을 여는 일을 망설이게 한다. 소비자로 살아온 시간이 짧지 않으니 나름의 대처법도 있을 법한데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가게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자연스레 온라인 쇼핑몰을 이용하거나 오픈 구조의 셀프 쇼핑 매장만 찾게 되었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전화 공포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내 경우엔 '쇼핑 공포증'이 있는 셈이다.



그런 내가 책방을 오픈하고 어느덧 가게 안쪽에 서는 사람의 입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처음 얼마간은 지금까지의 소비자 시선을 잊은 채 나 역시 투덜거렸다. 오래 책방에 머물던 손님에게 그 정도 봤으면 책 한 권은 사가지, 푸념하곤 했다.



나는 동네 책방 마니아다. 책방을 하겠다고 마음먹기 전부터 내 여행의 중심은 늘 책방이었다. 구경만 하고 나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직접 책방을 운영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야, 겨우 책 한 권, 굿즈 하나만 사기로 결심했다.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지만 공간을 충분히 즐기고도 빈손으로 나오면, 다음에 갔을 때 그 책방이 없을지 모른다. 실제로 책방이 문을 닫는 경우도 많이 보았다.



하지만 사람은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책을 사러 오고, 누군가는 공간을 즐기러 오고, 또 누군가는 다정한 시간을 보내러 오기도 한다. 직접 책방을 운영하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마음에 드는 책이 없나 보다, 학생이라 여유가 없나 보다' 생각했다. '그냥 놀러도 오는구나' 했던 시기도 지나 지금은 아예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의 모든 행동에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 않나.



듣던 대로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 책이 팔리지 않는 날을 '영 권 데이'라고들 하는데, 아무도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이 있다. 그런 날이 며칠 이어진 뒤, 누군가 한두 시간씩 서가를 샅샅이 살펴보고 빈손으로 나갈 때는 야속하기도 하다. 얼마 전에는 한 커플이 들어와 책은 보지도 않고 컬러링 노트로 한참을 놀다가, “잘했죠?" 하며 내게 보여주었다. 그러고는 “다음에 와서 책 한 권 살게요." 하는 것이다. 딱 봐도 이십 대 후반쯤 되어 보였다. '알만한 사람들이….'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은 삼켰다.



그럴 때마다 마인드 컨트를을 한다. 어느 가게든 물건을 보지 않고 살 수는 없고 본다고 해서 꼭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아니라고, 그게 소비자의 마음이라고 마음에 새긴다. 나는 다행히 스스로를 잘 달래는 편이다.



사실 이런 경우는 흔하고 어려운 축에도 들지 않는다. 어려운 건 손님인 듯 손님이 아닌 분들이다. 종교인, 잡상인, 정치인 등.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마음이 힘든 분이다.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사이가 아닌데도 일방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어느새 한 번 쓰려고 베어지는, 일회용 대나무숲이 되어 버린다. 그들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개의치 않는다.



손님이 책을 고르신 후에 말을 건넨다는 원칙이 있다. 한창 책방을 다닐 때 책방지기님과 대화한다고 책을 보지 못한 때가 간혹 있어서다. 그런 이유까지 보태어져 점점 손님들과 긴 대화를 하지 않게 되었다.



책방이 한가해 보여도 책방지기에게는 분명한 일터다. 책을 사고 정리하고 홍보하고 판매하고 반품까지 모든 일을 혼자서 해야 한다. 종일 혼자 있을 때도 많아서, 손님을 보면 반가워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시간을 쏟으면 제대로 책방이 돌아가지 않는다. 직장인만 잔업에 시달리는 게 아니다. 자영업자도 마찬가지다.



책방을 시작하고 1년이 되어간다. 손님으로 살아온 시간과 책방 안쪽에서 보낸 시간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의 친절이 누군가에게 닿아 다정함이 되길 바랐으나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친절한 사람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는 이도 있지만, 친절 이상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다. 그 또한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친절하고 싶은 마음을 오래 지키려면 마음을 조율하는 법을 알아야 했다. 생각을 보태 건네는 나의 친절은 단순하지 않다. 초록으로 시작된 친절은, 겹겹의 생각이 쌓여 주황이 된다.



그래서 내 친절은 주황색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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