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를 꿈꾸다.

by 토끼


악에 대한 이야기

미국의 어두운 현실을 문학적 은유로 담아낸 원작 소설을 텍스트로 영상화시키는 과정은

영화가 텍스트의 의미를 어떻게 영상으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장르로 바뀐다.



스파이더맨의 '톰 홀랜드'와 트와일라잇의 '로버트 패틴슨'의 만남!

어리숙한 톰 홀랜드는 온데간데없고

만년 청순남 로버트 패틴슨은

완벽한 속물의 파렴치범으로 변신

화려한 배우들의 이미지 변신에도

꽤 성공적이다.


음 이영화는 어떤 장르일까?

스릴러. 르와르. 잔혹범죄극.

야릇한 히어로물.


그 어떤 범주에도 넣을 수 없이 모호하다.


하지만 여운이 좀 오래갔다.

찝찝함. 불쾌함. 불편함. 해소되지 않는 의문들.




이 영화에 나오는 선함은 악에 대해서 너무나 무지하다. 착한 소녀는 악의

평범성에 속고 , 선한 사람들은 악마들의 제물이 된다. 연쇄살인마가 살인 후 시진을 찍으며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악은 공공의 이익. 예술, 믿음이라는 이상한 합리와에 의해 정당화된다.

악을 악으로 되갚아주어야 할 때도 있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다소 불편한 내용의 이 영화는 우리가 가진 악의 평범성을

지나 악의 보편성을 느끼게 한다.


가끔씩 뉴스에서

고립된 마을이나 지역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이나

강간사건들을 접할 때가 있다.

서로가 너무 잘 알고 또 일가친척인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서로가 침묵하거나 덮어버림으로써 공동체적 범죄행위에 가담하면서

악을 희석시키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인연이라는 꼬리에 꼬리 무는 인간사에서 혈연과 악연들이 서로 얽히고 썩여서 악은 대물림 되고 되풀이된다.



인간이 얼마나 악 해질 수 있는지.....

과연 이런 인간들에게 회개는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신을 믿는다는 건 나를 만들어준 창조주에 대한 감사보다는

그저 내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다.

나의 권력 유지를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해 신은 악에 의해 이용당하기도 한다.

십자가의 무게를 버티고 살아가는 인간은 많지 않다.

믿음을 단지 공동체 유지의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종교집단은 선이 아닌 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영화는 2차 대전 이후의 5,60년대의 미국의 풍요로운 현실 뒤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다.


전장에서 십자가에 피부가 벗겨진 전우를 매단 십자가를 목도하고,

그 고통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총으로 방아쇠를 당긴. 윌러드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그 트라우마를 안고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일상 속에서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조금씩 전쟁을 기억 속에 지우면서 행복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간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잊고 지낸 신의 다시 믿기도 한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 아내는 덜커덕 암 선고를 받는다.


윌러드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해보지만 아내는 가망이 없다.

아내를 살리려는 간절한 믿음이 광신으로 변하면서

기도하는 어린 아들의 기도가 성의 없다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간절한 기도만이 아내를 살리는 길이라고 믿는다.

결국 이성을 잃으면서 아들이 기르던 강아지를 제물로 바치는 기행을 벌이지만

간절한 기도를 신은 들어주지 않고. 아내는 죽는다. 그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한다. 어린 아들 아빈을 혼자 남겨두고서......



혼자 남겨진 아빈은 할머니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더 기구한 운명을 지닌 여동생인 소녀가 아빈을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살해당해서 오갈 데가 없는 소녀를 할머니가 거둔 것이다.


아빈의 아버지가 암으로 죽은 엄마를 만나지 않았으면 이 소녀의 죽은 엄마는



아빈의 아버지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소녀의 엄마는 소녀의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다.


소녀의 엄마는 어느 작은 교회에 초대되어 온 전도사인 아버지를 처음 만난 날 사랑에 빠진다.

설교 도중에 병에든 독거미를 자신의 온몸에 뿌리면서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모습에

첫눈에 반하면서 매료된다.


둘을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산다.

믿음에 목마른 소녀의 아버지는

하나님이 독거미로부터 자신을 살려준 데에 대해 기적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더 큰 기적을 시험하기 위해 자신의 아내를 죽이기로 마음먹는다.

왜냐하면

신이 자신에게 기적을 주었으니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내를 하나님의 은총으로

자신이 살려낼 수 있다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살인을 부활의 증거로 바꾸는 기적을 자신도 행 할 수 있다는 광기에 휩싸인다.

하지만 송곳으로 목을 찌른 아내는 피를 토하며 죽고 부활의 주문을 외치지만 신은 아내를 살려주지 않는다.

신을 향해 절규하지만 신은 아내의 주검을 거두어 갈 뿐이다. 도망자가 된 소녀의 아버지는

또 다른 연쇄 살인자 부부의 사냥감이 된다.



아빈이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된 영화의 배경이 미국 남부의 작은 시골마을이라는 설정이 주는 복선은 그 시대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 마을의 모테가 된 신앙. 영화 속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신을 믿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극단적으로 신을 믿는 성직자와 교인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의 존재에 압도된 인물들의 비틀린 믿음과 그로 인한 악행을 보여 준다.

보안관마저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악의 든든한 보호자가 되고,

도덕이란 탈을 쓴 악마이다. 마을 전체가 악에 발 담그고 있거나 악에 대해 모른 척하거나

서로서로가 악과 연결되어 있어 선은 놀림감이 되고 이용당하지만 쉽사리 마을을 떠나지

못한다.


그 속에서 어린 아빈이 자신의 선을 지키며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세상은 위험해 보인다.

또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무언가에 대한 잘못된 의지와 믿음은 완전한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선한 마음으로 살려고 발버둥 쳐도 시련이 닥치고 상황이 꼬이고, 악이 마음을 지배하면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악이라고 믿어 버릴 수도 있다.

착한 엄마에게서 자란 착한 아이는 다시 착한 소녀로 자란다.

아빈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소녀를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한다.

악에 대해 무지했던 소녀는 또 너무나 쉽게 악의 표적이 된다.

파렴치한 유부남 목사에게 걸려 성적으로 유린당하고 수치심과 모욕감에 결국 자살한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위안이 되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잃고 아빈은 동생의 죽음 뒤에 목사가 있다는 걸 알아낸다.

하자만 동생을 짓밟고 죽음을 목격하고 나서도

아무런 죄책 감 없이 또다시 다른 어린 소녀와 관계를 갖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내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목사를 미행하고 나서

어빈은 결심한다 악을 응징하기로.... 하지만 마지막으로 목사에게 속죄할 기회를 주기로 한다.


목사는 뻔뻔스럽게도 네 동생이 먼저 날 유혹했다고 발뺌한다.

결국 아빈은 준비해온 총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그 뒤의 상황은 마을 떠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해필 히치하이킹으로 탄 차는 연쇄살인마 부부의

차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살인을 한다.

결국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된다.


모든 연결고리의 한가운데 있는 주인공 아빈의 탄생 전부터, 어빈이 살인자가 되기까지, 그 한 인물의 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것을 하나의 축으로, 어빈을 둘러싼 가깝고도 먼 인물들과 상황들까지 모두 보여준다.


시간의 흐름과, 근거리 지역을 넘나들며 종국에는 겹쳐지는 인물들의 인연까지, 촘촘하게 펼쳐진다.


인물의 면면과 그들의 행위들이 꽤나 뒤틀려 있어 충격적인 영화이다.

악의 평범성은 악이 자신을 지키는 방편이 되었을 때, 어리석은 것은 선이 된다.

한 번의 실수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으로 낙인찍히면 우리는 어쩔 수없이 악을 선택하면서 악인에서 살길을 찾는다.


악마에게 희생당하는 대상은 악인들이 아니다.

언제나 착하고 순수한 사람들이다.


악은 늘 가면을 쓰고 접근한다.


약한 모습을 하고 도움을 청하면서 접근하기도 하고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으면서 나에게 줄 것처럼 달콤하게 접근하기도 한다.


악의 실체는 언제나 달콤한 유혹과도 같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착함이 희생당하지 않으려면 악함뒤의

가면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착함이 곧 선이 아니라.

단지 도덕적 억압 속에 숨겨진

잠재된

악의 얼굴 일수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악마란 어떤 모습일까?


살인마. 강간범. 사기꾼. 폭력배.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



어린 시절 악에 대한 기준은 모호했다. 우리는 디즈니 만화 영화 속 권선징악으로 선과 악의 대비를 통해 분별력을 키웠다.



Tv를 틀면 언제나 정의는 악을 무찌르고 승리했다. 악은 잠시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언제나


선 앞에서 초라하게 무너졌다.


흥부가 결국 착하게 살아서 부를 거머쥐고 아톰은 언제나 악을 무찔렀다.


짱가는 늘 위기의 순간에 나타나 착한 사람을 도와주고 악을 처단했다. 그렇게 동화책을 펼쳐도 악마는 마지막에 늘 최후를 맞이하고 정의가 승리했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했다.


착함이란 바로 정의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내 눈을 통해 본 현실은 아니었다. 어른들은 착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기분 좋게 앉아 술을 마시다가도 나중에 술상을 엎으며 서로 싸움질을 하기 일쑤였고, 어제 함께 나란히 마늘을 까던 동네 아줌마들이 다음날 무슨 이유에선지 서로 토라져 서로 소금을 뿌려대기도 했다.


어른들이 혀를 차면서 보고 있는 뉴스를 보면


마치 동화 속에서나 일어날 일들이 현실 속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악은 늘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나에게 모든 악은 하기 싫은 일을 나에게 억지로 시키는 집에의 군림자들이었다.


어린 나는 힘이 없었다. 악은 늘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나를 굴복시켰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담배 심부름을 시켰고, 엄마는 아버지가 술 마시는 자리에 갈 때면 어김없이 나를 딸려 보냈다. 아버지가 이뻐라 하는 막내딸이 아버지의 알코올 농도를 약하게 할 줄 알았겠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곤드레만드레가 된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집에 올 때 나는 술 취한 아빠가 불쌍했고 엄마가 미웠다.


아버지가 술을 못 마시게 특명을 내렸지만 난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


엄마는 새벽에 곤히 자는 날 깨워 가기 싫다는 새벽 불공을 함께 가게 만들었고. 싫어하는 파를


먹지 않는다고 저녁은 굶는다 라고 협박했다. 생양파를 먹지 않는다면 불고기도 못 먹다고 해서


눈물을 머금고 울면서 생양파를 먹어야 했다.


편식을 한다고 밥을 안주기도 했다.


언니는 언제나 내 몫의 간식을 엄마가 없을 때


뺏어 먹었고. 엄마에게 고자질해도 엄마는 언니 편만 들었다.


오빠는 딱지 접기를 하면 돈을 주겠다고 해놓고 열심히 모아둔 돈을 다시 갈취해 갔다.


온 집안에 내편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는 마당에 묶여있는 천덕꾸러기 털북숭이 강아지 한 마리뿐인 것만 같았다.



우리는 이 집에서 소외받는 동지였었다.



내가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말을 안 들을 때면 언니는


나를 굴다리 밑에서 주어 왔다고 겁을 주었다.


어쩌면 난 굴다리 밑에서 주어왔다는 그 말이 위안이 되기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착하디 착한 나를 그렇게 구박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언니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며. 지구 어느 한 도시에서 예쁘고 맘씨 착한 진짜 엄마가


날 찾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을 하면 가끔씩 행복해 지곤 했다.



하지만 이런 시련만이 늘 있는 것이 아니고 행복한 순간들이 더 많았기 때문에


코찔찔이 나에게 악이란 그렇게 잠시 괴롭다가 이내 행복해지는 순간들을


방해하는 모든 시간들 속 참기 힘든 시간들 일 뿐이었다.



7살이 되고 학교에 들어가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선생님이라는 존재 앞에서 악에 대한 정의는 하나둘 바뀌기 시작했다.


조금만 노력했는데도 선생님은 언제나 칭찬 일색이었고 잘한다 잘한다 치켜세워 주었고.


내가 괜찮은 아이라는 걸 일깨워 주었다. 집에서는 맨날 떼쟁이이던 내가 학교에만 가면


아주 의젓한 아이가 되고 다른 존재가 되는 듯했다. 나는 공부 잘하고 예의 바른 어린이로 선생님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것은 의외로 쉬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인 것 같다. 집에서도 예의 바른 어린이가 되었을 때 부모님도 언니 오빠도 날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때 드디어 알게 됐다.


"아 세상은 참 살아가는 게 쉽구나 "


"내 의지를 조금만 꺾고 고분고분하면 사람들은 날 착한 아이로 봐주는구나!"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어른들이 좋아하는지 어떤 말을 했을 때 어른들은 관심을 주는지 그렇게 하나하나씩 어른들을 위한 어린이의 삶이 시작되었다.



너무 일찍 나는 어른들의 세계와 타협해 버렸다.


어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세계를 버리지 말고 치열하게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 세계를 버림으로써 어른들에게 사랑받는 쪽을 선택했다.



그때부터 나에게 악의 정의는 바뀌었다.



하기 싫은 일 시키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 알아서 한다면 아무도 때문에 나를 건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가족들은 더 이상 악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이쁨을 받는 법을 안 어린이의 세상은 아름답게 변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아름다운 세상 안에서 나의 악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하고 선한 세상만을 꿈꾸면서


착함이라는 선에 눌려서 악의 진짜 모습에 무지했는지 모른다.



악이란 것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선함의 무거운 굴레를 칭칭 감고 마음속의 악을 발산하지 못한 무늬만 착한 사람으로 성장해 버렸다.


왜냐하면 싸움보다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중도를 늘 선택했었다.


또한 악을 행한다는 것 자체가 죄를 짓는 것이며


그 악이 드러나면


바로 추락이라는 잘못된 도덕관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악은 악마일 수도 천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체 선만


떠받들고 있었다.


악을 모르고서 선을 알 수도 없다. 악과 선은 같은 얼굴이라는 걸


선이라는 굴레 속에서 찌들어가는 훗날에서나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행하는 악은 실수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죽여놓고서


그것은 한순간의 제 실수였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살인자의 면전에 대고


뭐하고 사람을 죽인 게 실수라고 하면서 계란을 던지는 사람들을 볼 때


과연 악이 실수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실수라는 가벼운 면죄부가 때로는 희망적이기도 하다.


실수라면 바로 잡을 수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가


떠오르기도 한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다고 해도 참회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악마가 될 수 없다.


유전인자 자체가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해도 인간은 타인의 희생이나 사랑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몇 프로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형이라는 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에 희망을 건다.


왜냐하면 모든 악의 시작은 아주 작고 평범한 선이라는 것들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성장과정 안에서 부모나 사회관계의 결핍에서부터 악이라는 불씨가


마음속에서 변형되어 자라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악이란 어쩌면 잘못된 아주 작은 실수들이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 서서히 커져나가서 악이라는 뿌리를 내리게 되는지 모른다.




요즘 영화의 트렌드는 악의 평범성이고 악과 선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악역이 매력이 없으면 영화는 줄거리의 힘을 잃는다.


이제는 악당들이 제목소리를 내고 악마가 자신들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합리화시키면서 빌런 무비라는 장르도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악마라고 해도 이제는 죄의식이 없고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마음이 라걸 가진 새로운 종의 탄생을 알린다.


수십 년을 악의 축으로 단단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던


조커조차도 이제는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하고 있다.


이제는 악이 아니라


악의 근원인 마음의 본질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세상이 되었다.


악을 세심하게 다루지 않으면


예술도 문학도 영화도 더 이상 우리의 감성을 채울 수가 없다.


내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악의 진짜 모습을 정겹게 보고


선한 모습에 더 이상 도덕적 집착을 내려놓고


자유롭게 선과 악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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