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희들 사람들은 말한다. 많은 걸 요구하는 게 아니다 기본만 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 기본의 기준은 턱없이 높다.
이미 수준 높은 전문가의 그 기준이 기본이 되버렸다. 기본만 하라고 해서 기본만 하면 성의가 없다고 타박을 한다. 도대체 그 기본의 수준이 얼마냐고 물으면 그가 물으면
"프로가 그런 걸 묻느냐"는
얼굴로 사람들은 쳐다본다. 어제는 눈높이가 좀 낮은 어떤 사람이 와서 그를 최고라고
추켜올려 주었다가 , 오늘은 최고의 프로가 와서
그에게 기본이 안됐다고 면박을 주곤 했다.
세상의 기준은 최고의 프로들이 정한 그 기본에 의해 움직인다.
어제의 내 기본은 오늘 나타난 나보다 나은 고수들에 의해
덜 떨어진 존재가 돼 버린다.
기는 놈
뛰는 놈
그리고 그 위에 나는 놈들이 다 헤쳐먹는 세상이 돼 버렸다.
김동호는 늘 그렇게 기본에 휘둘리는 그림을 그려야만 했다.
애니메이션 광고 영상 품평회가 있는 날이었다. 대기업 홍보기획 직원과 광고기획사 팀장 그리고 변 사장 김동호 네 명은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김 감독 자자 어서 시작합시다."
머리가 희끗한 변 사장은 어린 클라이언트들에게는 굽실대면서 비굴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
하지만 한자리에 동석한 김동호에게는
권위적인 표정으로 위엄 있게 행동했다.
김동호는 그런 변 사장을 보는 김동호의 시선은 역겨움이 가득했다.
광고 영상 외주작업을 따내기 까지 그가 들인 노력과 정성은 가히 클라이 언트들에 게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가 바칠 기세였다.
김동호는 짧은 작품 설명을 시작했다.
" 되도록 콘티 작업에 충실했지만 나머지 캐렉터드로잉은 제가 창의적으로 작업했으니
애니메이션 특성을 살려 코믹한 장면으로 제품을 홍보하는데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두 달 동안 쉼 없이 작업한 영상은 3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순식간에 스크린을 빠져나갔다.
약간의 과도한 부드러운 액션이 조금 거슬렸지만 광고주가 원하는 키포인트가 잘 드러난 영상이었다. 대기업 s사의 직원은 비교적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때 광고기획 팀장이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한 장면 한 장면 화면을 정지시키더니 주인공 모델들이 장면 장면마다 조금씩 바뀌는 느낌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변 사장은 김동호를 추궁했다.
"김 감독 어떻게 생각해"
" 어차피 이 장면은 희극적인 움직임을 살려서 작업했는데 모델에 대한 지적은 조금은 합리적인 시선으로 봐야 합니다. 최 팀장님."
그는 기획실장을 설득했다. 변 사장이 못마땅한 어조로
" 김 감독. 내가 봐도 좀 캐릭터가 이상해, 수정하도록 해"
김동호는 변사장 이야기가 떨어지기 무섭게
S사 홍보직원에게 물었다.
"최대리 님은 생각은 어떻습니까"
변 사장이 김동호 말을 가로막으며 기획실 장편을 들었다.
" 실장님 선적일이 빠듯하지만 이 부문은 얼마든지 수정 작업이 가능합니다. 빠른 시일 내로 수정해서 다시 필름을 넘기겠습니다."
김동호의 표정이 일그러져졌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이 스튜디오를 빠져나가자 변 사장은 김동호를 측은하게 보았다.
" 아까 그 시퀀스 차동혁 씨가 한 거지? " 변 사장의 말투는 부드러워졌다.
"아니 김 감독은 왜 모델도 못 맞추는 그런 사람을 굳이 쓰는 거야?"" 변 사장은 김동호를 회유하기 위해 희생량을 찾아 분위를 반전시키려고 했지만 김동호는 그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 사장님 그건 모델을 맞추는 그런 장면이 아닙니다. 조금은 과장된 장면이고 다른 이미지의 표현일 뿐입니다." 변 사장의 표정이 돌변했다.
" 김 감독 지금 착각하는 거 같은데 자기 작품 만드는 걸로? 우린 돈 받고 그들이 요구하는 걸 해주는 하청이야. 게네들이 고치라면 백번도 고쳐야 하는 거라고 이번 작품 수주단가가 얼만 줄이나 알아?"
변 사장을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미간을 찌 풀이며 뒤돌아 섰다. 그리고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그냥 기본에 충실해!
김 감독!
지금 예술하는 거 아니잖아"
김동호는 그렇게 매번 기본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늘 새로운 모습으로
짠 하고 나타나 그의 목을 비트는 기본이 지배하는
프로들의 세계를 그는증오했다.
하지만 달리 먹고 살 일이 막막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책임져야 했다.
명문대 동양학과를 졸업하고 화가로써의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지만 순수미술은 그를 권태롭게 했다. 동양학과는 교수로서의 등용문도 좁았다. 새롭게 입사한 디자인 회사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그렇게 여러 회 사를 전전하다.
일러스트를 그리게 됐지만 수입이 변변치 않았다.
출판 만화계에서 일러스트 작가가 받는 비중이 너무나 형편없었다.
그래서 만화영화사에서 레이아웃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공간을 보는 눈이 정확했고
정확한 선과 면을 그리는데 뛰어났다.
10년 만에 탑에 오르면서 여기저기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잘 나가던 시절 억대 연봉을 찍으면서그렇게 그는 한 업종에서 15년 뼈를 묻어버렸다.
하지만 그림으로 먹고사는 프리랜서의 비애는
언제나 최고의 고수가 나타나면 찬밥 신세가 된다는 것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젊은 친구들에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변상열 사장은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림에서 손을 놓은 지 10년이 됐지만 한때는 그도 유능한 아티스트였다. 최근 들어와서
자신의 자시 사항에 늘 토를 달면서 수정을 거부하는 김동호가 못마땅했다. 그의 눈에 김동호는
실력이나 감각이 예전만큼 참신하지가 않았다.
특히 변 사장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바로 김 감독이 감싸고도는 선배라는 차동 혁이라는 인간 때문에더욱 그랬다.
차동혁이 했던 씬들이 10분이라는 러닝타임 안에서 좀 질이 떨어지는 것이 확연하게 화면으로 드러났다. 그림도 데생이 안 맞았고 그 책임은 모두 감독에게 고스란히 전가됐다. 차동혁의 그림을 보면 변 사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 아니 왜 홍길동 얼굴이 차동혁 손만 거치면 이상한 사람의 얼굴이 나오느냐고?
김 감독 차동혁 잘라! 김 감독이 커버하는 것도 한계가 있어"
김동호는 말을 듣지 않았다. 한때 친구였던 두 사람은 그렇게 사장과
감독이 되어 10년을 같이 일했다.
김 감독. 기본이 안된 애들은 제발 좀 쓰지 마"
변 사장은 안경 너머로 눈을 치켜뜨며. 깔보듯 얘기했다.
그는 이제 변 사장과 면담을 하기 위해서는 비서를 통해야 했고 날짜를 미리 잡아야 했다.
" 사람 쓰는 일은 나한테 맡겨.
관여 안 하기로 했잖아."
"물론 김 감독이 잘하는 거 알아.
뭘 또 정색을 하고 그래"
변 사장은 손목 위에서 빛나고 있는 명품시계를 흘낏 보았다.
그 탐욕스러운 눈빛에서 김동호는
돈밖에 모르는 장사꾼이 돼버린 변 사장에게 친구라는 딱지를 뗀지는 오래되었다.
" 김 감독!
밑에 있는 애들은 말이야 잘하고 있을 때. 더 신경을 써야 해. 가끔씩 밟아줘야 한다고. 김 감독처럼 오냐오냐 하면 기어오른다니까!"
변사장의 얘기를 흘려버리고
김동호는 속으로 되뇌었다.
"속물 같은 놈! 그림을 돈 버는 수단으로만 그린 놈이 그림에 대해 뭘 안다고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을 쳐...."
집안의 재력과 운이 좋아 사업에 성공한 변 사장과 김 감독은 물과 기름처럼 달랐지만. 한때 변 사장은 김 감독의 실력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없었다. 하지만 변 사장은 요즘 젊은 신인 감독을 물색 중이었다. 김동호를 견제하고 컨트롤할 수 있는 일은 경쟁자를 들이는 일이었다. 변 사장의 이런 움직임은 김동호의 귀에 바로 들어갔다. 언젠가는 자신을 향해 칼날이 날아올 걸 예상했지만. 아직은 자신을 대체할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김동호는 팀장으로서 변 사장 같은 인물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10명의 아티스트중에 차동혁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았음에도 매번 차 동력의 시퀀스에서 지적을 받다 보니 난감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배고픈 신인 시절이 있다.
맘씨 좋은 차동혁은 김동호가 신인시절 그를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김동호는 그렇게 차근차근 실력을 검증받았고. 김독이 되었다. 하지만 차동혁은 그 시절 동기생들이 모두 실력을 검증받을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는 일도 많이 못하고, 늘 감독들에게 외면당했다.
"선배 왜 그런 대접을 받고 거기 있는 거야?
김동호가 발끈 헤서 물으면
" 내가 실력이 안돼서 그렇지 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안쓰러운 웃음만 지었다.
"선배! 결혼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돈도 못 벌고 그런 사람 밑에서 고생만 할 거야!
나한테 와 내가 선배 최소한의 수입은 맞춰줄게. 내가 선배 하나 책임 못 지겠어! " 김동호가 차동혁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 때만 해도 김 감독은 자신 있었다. 자신의 거울을 보듯 자신의 내면을 보듯 그는 다시금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막에서 비바람을 헤치고 가는 아름다운 낙타 한 마리를 떠올렸다.
김동호는 그 낙타를 숭배했다. 자신도 그런 낙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만 , 그는 생각했다.
"내가 이 짐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
이 짐이 깃털처럼 가벼운 날이 자신에게도 오게 될까?"
그는 차동혁을 생각하면 마치 자신이 폭풍우 치는 그 사막의 한가운데를 묵묵히 걸어가는 낙타처럼 느껴졌다. 신은 인간에게 같은 재능을 부여하지 않았다. 재능이라는 건 사회생활에서 밥벌이의 중요 수단이 된다 동종업계에서 재능이라는 건 서열을 정하는 기준이 된다.
빠른 판단으로 상대를 제압하고 마음을 움직이며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는 리더가 된다.
하지만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부류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리더는 그 장악력이 미미 하다. 분명 실력이 형편없고 누가 보아도 별로인데 본인은 최고라고 믿는 그 오만함과 고집이 있는 사람하고는 절대 같이 일하기 힘들었다. 차동혁은 순수하고 착했지만 그림에서 만큼은 고집과 아집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알아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믿었다.
모두 다 쓸데없는 데다 시간을 소진하면서 진짜 중요한 걸 볼 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맑고 순순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다. 사회성이 떨어져 숫기가 없었지만 자신이 믿는 일에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성실했고. 정직했다. 하지만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상업적이 그림에 재능이 없었다. 그의 그림은 독창적이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에서 기획단계가 아닌 후반부서에서 독창적인 그림은 소용이 없었다.
그는 매번 회사에서 잘리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자.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일용노무자가 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그 어떤 틀 안에서 흉내 내는 그림을 그린다는 게 힘들었다. 똑같은 그림을 비슷하게 그렸다고 그는 자부했지만 언제나 그가 그린 그림은 그만의 케렉터가 되었다.
창조적인 그림이 되었다. 만화는 캐릭터를 비슷하게 닮게 그려야 하는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20년을 그림만 그렸는데, 사람들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꺼려했다. 김동호가 그를 측은하게 생각해서 덥석 함께 일하 자고 한건 제발등을 찍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의 그림은 손이 많이 갔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림을 다시 그리는듯한 착각이 들었고, 아무리 틀린 그림을 지적해도 고쳐지기는 커녕 더 창의적인 그림이 되어 갔다.
그렇다고 그만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재능이 없는 사람을 아무리 가르쳐도 안된다는 원리를 차동혁을 통해서 터득하게 되었다.
"선배는 왜 복사를 떠서 그 그림을 베끼려고 하질 않아? 왜 매번 전혀 다른 애를 그리느냐고? 눈 코입 위치가 다 틀리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