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 이건 너무 억지스럽잖아. 행동의 패턴을 읽어봐 몸의 관절운동을 생각해서 원리에 맞는 동작을 그려야지 이런 인위적이 포즈의 그림은 자연스럽지 못하잖아."
"야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어 얼마나 힘이 있고 멋진 동작이니? 만화야 만화 실사가 아니라 좀 이렇게
움직일 수도 있는 거야! 그냥 넘겨봐? 시청자들이 더 좋아할 수도 있잖아! 문제가 생기면 그때 내가 고칠 테니...."
김동호는 차동혁의 억지에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차동혁에게서 거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차 동력의 그 묘한 설득논리에 설득당해서도 아니다.
차동혁에게는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의 견고한 성을 지키고 무너지지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그의 그림을 써먹을 수 없다고 해도 그는 그 틀린 그림을 정성스럽게 그렸다.
차동혁의 그림들을 훑어보던 그는
다시 수정 지를 얻어 고쳤다.
그때 변 사장이 감독방 문을 열어젖혔다.
그는 격앙된 목소리로 흥분해서 말했다.
"김 감독 지난번 샘플 한 작품 결과 나왔는데.....
3위안에도 못 들었어..."
변 사장은 사무실 안을 왔다 갔다 움직이며 말했다.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올해 샘플한작품만해도 세 개나 되는데 하나도 안됐다고."
김 감독이 태연하게 말했다.
"지금 하고 있는 작품만으로도
충분하잖아?"
"총감독이면 좀 큰 그림을 그려야지. 내년 내후년은 생각 안 해?"
김동호는 종이 위로 싸각 거리는 연필의 거친
질감을 느끼며 부드럽게 선을 긋다가 둥근원을 채 완성도 못하고 멈추었다.
"이번 주 안으로 차동혁 잘라!
지금까지 충분히 기다렸어
이건 최후통첩이야!
안 그러면 그 팀 전체를 없앨 테니까!
기본이 안돼 있잖아.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기본은 돼야지....."
프로들한테 어려운 걸 요구하는 게
아니잖아!"
그는 용건만 말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변 사장의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서
김 감독에게 비수처럼 꽂혔다.
어지럽게 책상에 널브러진 종이들을 보면서
그는 연필을 던졌다.
변 사장은
몇 시간 후 다시 문자를 보냈다.
"오늘 중으로
깨끗하게 마무리해."
김동호는 생각했다.
그는 차동혁을 빌미로
자신의 기를 꺾어놓고 이제는 감독이 아닌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관여해서 간섭하려는 속셈이었다.
따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프리랜서의 세계는 냉혹했다. 차동혁을 자르지 않으면 팀 전체가 위험했다.
변 사장은 자신을 대체할 내정자까지 이미 물색 해 놓은 상태였다.
그는 차동혁에게 전화를 걸어 저녁 술 약속을 잡았다.
파전을 좋아하는 차동혁의 입맛에 맞추어 기름 냄새가 늘 진동하는 전집에서 막걸리를 시켰다. 고소한 기름 냄새를 좋아하는 김동호였지만
그날따라 고추튀김 냄새가 역겨웠다.
차동혁은 배가 고팠는지 입맛을 다시며 호기심과 들뜬표정으로 전집을 들어섰다.
"나 오늘 점심도 굶었어. 밥때를 놓치면 난 입맛이 없어져 버려. 근데
전 냄새 맡으니 뱃가죽이 또 난리를 치네 밥 달라고..."
두 사람은 파전을 시키고 막걸리잔을 돌렸다.
김동호는 젓가락을 잡은 차동혁의 오른손 엄지손톱에 까맣게 낀 때를 보면서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를 생각했다.
"선배 난 예술가가 되고 싶었어.
그림에 재능이 있다고 어른들이 날 치켜세워주던 그때
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그런 영혼이 살아있는 그런 그림을 그릴 줄 알았거든
근데... 난 지금 고작 움직임이나 연결시켜주는 그냥 장인 나부랭이가 돼 버렸어!
난 내 그림 하나 없이 늙어버렸어. 이젠 그림이 뭔지도 모르겠어.
주어진 캐릭터가 없으면 그림 한 장 그릴 수가 없어."
그는 젓가락이 연필이라도 된 양 허공에다가 그림 그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그 모습을 지켜보면 차동혁과 그는 눈이 마주쳤다.
차동혁의 순수한 눈을 들여다보면서
김동호는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했다.
"선배 사실은 변 사장이 선배를 자르지 않으면 b팀을 해체시키겠데
어쩌지?"
차동혁은 놀라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드디어 올 일이 오고야 말았다는 체념 어린
표정이었다.
" 괜찮아! 내가 뭐 이 회사에 목숨 걸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만두라면 그만두면 되지.... 하루 이틀 당하는 것도 아닌데 뭐...."
그는 파전을 한입 가득 맛있게 씹었다.
"선배 미안해. 내가 힘이 없어서 선배를 책임질 수가 없어"
'지금까지 일 한 게 어딘데... 너한테 폐만 끼친 거 같아 내가 미안하다."
김동호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내뱉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선배 미안한데 선배 그림은 애니메이션에서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 난 내 그림이 어디가 이상한지 모르겠어. 내 눈은 이 그림이 늘 최상의 인물로 느껴지거든.
난 그래서 그냥 버티고 있는 거야."
" 선배는 그냥 베끼는 그림이 싫은 거야. 왜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버리지 못하는 거지?"
"동호야! 우리는 누구를 위해 그리는 걸까?
난 왜 재능이 없는 걸까?
난 네가 가진 재능을 반만 이라도 가졌으면 좋겠다.
난 할 줄 아는 게 만화 그리는 거밖에 없어. 해 본일도 이것밖에 없고."
차동혁은 고개를 떨구었다.
김동호는 그런 그를 힐끗 보고 고개를 돌렸다. 눈시울이 붉어져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아참 그게 있지"
차동혁의 밝은 목소리에 김동호는 몰래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가 바지 주머니 속에서 흰 종이를 꺼냈다.
접힌 종이를 펼치자 진달래 꽃잎이 소복이 드러났다.
" 점심때 사무실 뒷산을 산책하는데 진달래가 너무 소담스럽게 피었길래
따 가지고 왔어."
그는 자신의 막걸리잔에 몇 가닥을 띄우고 나서
김동호의 막걸리 위에 나머지를
띄웠다.
" 아까 네가 막걸리 한잔 하자고 해서 챙겨 왔어.
난 막걸리는 이렇게 마시는 게 최고 맛이 나더라"
내일 책상 정리할게.
오늘은 그냥 잊고 술이나 마시자.
이렇게 좋은 봄날 이런 우중충한 얘기는 죄악이야!"
차동혁은 행복한 미소를 띠며 막걸리잔을 비웠다.
진달래 꽃잎 하나가 막걸리잔에 붙어 흔적을 남겼다.
그때 두 명의 여자가 깔깔대며 유리문을 열었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그녀들은 김동호를 보자 작은 목례를 하면서 웃음을 그치고
어색한 표정을 지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파머머리를 한 여자가 차동혁을 보면서 인사를 했다.
"아는 사이야?"
"우리 회사 동화부 사람들이잖아. 저 사람은 동화부 후배야."
차동혁은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다.
"동호야 우리 합석할까?" 그는 오랜만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난 상관없어. 선배 좋을 대로 해"
차동혁은 큰소리로 그녀들을 불렀다.
"미선아 여기서 같이 합석해서 마실래!"
그녀들은 흔쾌히 그들 자리로 옮겼다.
애니메이션 한편을 만드는 데는 많은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들은 중간 파트 일을 하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감독님"
두 사람은 동시에 김동호를 향해 인사했다.
그들은 막걸리를 다시 시키고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자연스레 일 이야기를 했다.
작품들이 점점 어려워져서 돈벌이가 안된다는 이야기부터
여자들은 툴툴거렸다.
그때 차동혁이 한마디를 던졌다.
" 나 오늘 회사에서 잘렸다.
미선아 !
너 팀장이니까 나 좀 너희 팀에 써 주라.
나도 동화 파트에서 일하면 안 될까?
나 원화는 재능이 없나 봐?"
김동호는 민망한 얼굴로 여자들을 바라보았다.
"선배 그게 무슨 소리야 여기서 그런 소릴 왜 해?"
미선은 차동혁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막걸리잔 들었다.
"차선배 선배는 동화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위에서 키포인트 잡아준 그림에 중간만 연결 시킨다고.
원화 그림 트레스 하는 정리하는 그림 시키는 일이라고 지금
우리 무시하는 거야?
잘난 원화 맨들 따까리한다고 우리 무시하는 거냐고?"
차동혁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젖히며 말했다.
"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여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 우리라고 꿈이 없는 줄 알아! 수십 장씩 중간 그림을 똑같이 베껴서 그리는 게 쉬운 줄 아느냐고? 선배 같은 원화 맨들이 러프하게 대충 그려준 그림들은 우리는
그냥 베끼고 중간에 그림들은 쪼개서 수십 장씩 넣어주는 단순노무 같은 일은
선배들이 가지는 그런 꿈조차 꾸면 안 돼.
그러면 돈을 못 벌어 , 아무 생각 없이 그려야지 이일을 할 수 있다고...
우린 말이야 그림에 대한 열정을 없애야지만 이런 단순한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자존심도 버리고 뇌도 버리고 같은 그림을 수십 장씩 선을 정리해서 그린다고...
왠 줄 알아! 내 고집이 있으면 한 장도 못 그리거든.
난 15년을 이렇게 일해서 집도 사고 애들도 키웠다고....
이런 단순한 일이어도 난 만족해... 그래도 난 아티스트라고!"
차동혁은 그녀를 보면서 말을 잃었다.
" 미안하다 미선아! 난 늘 내가 맞다고 생각했어.
한 번도 날 그림 앞에서 죽여 본 적이 없었어.
난 늘 내가 표현하는 그림이 먼저였어. "
차동혁의 얼굴은 일그러졌지만 눈빛은 번득였다.
김동호는
눈앞에 버티고 있는 남자의 큰 바위 얼굴이 부서지는 걸 느꼈다.
잔꾀라고는 하나도 없고 이기심이라고는 한올도 없는 그런 그의 얼굴 안에서
김동호는 불현듯 예술적 평온함을 느꼈다.
문득 그는 왜 지금까지 차동혁과 같이 일을 하고 했는지를 깨달았다.
그의 그림은 때로 전혀 캐릭터를 닮지 않는 그림이었다.
노란 수정 지를 대로 새롭게 수정을 하고 그의 그림은 쓰레기통에 던졌다.
때로는 한가할 때 그 그림을 다시 쓰레기통에서 꺼내보면
묘하게 위로가 되고 그림이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을 거는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김동호는 차동혁의 그림들은 모으기 시작했다.
마치 그림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아 쓰레기통에서 다시 꺼내서 자신의 서랍장에 모아두는 습관이 생겨났다.
김동호에게 차동혁은 진정한 예술가요.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자는 다시 조용히 말했다.
"분위기가 왜 이래! 아 시바 선배는 좀 변해야 해
그놈의 예술하는 그림 좀 이제 그만 그려!
차선배는 잘린 게 아니라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 거야!"
김동호가 입을 열었다.
"선배! 사람은 모두 똑같은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니야. 재능과는 별개의 사람도 있어. 이런 이야기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선배의 그 무모함이 싫어
날 약하게 만들거든.... 난 늘 날 약하게 만드는 것들이 싫어"
그래서 난 선배가 정말 싫어"
김동호는 생각했다.
프로의 세계는 재능을 사고파는 세계였다.
차동혁에게 있는 남다른 재능은 그림만이 아닌 무모함이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모함인가!
계속해서 틀린 그림만을 그리고 있는 차동혁의 그림을 고쳐가면서 그들은 서로가 다른 그림세계 속에서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김동호는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에서
서로가 공생하고 있었다. 김동호가 성인군자라서 차동혁을 데리고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세계는 공존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있는 논리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이해 불가한 논리가 많고 재능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어떤 사람도 발붙일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모순이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리더란 바로 그 힘을 가진 자리이다.
능력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능력인 것이다.
술 취한 일행들은 모두 각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두 지하철로 향하는데
김동호는 사무실로 왔다.
술에 취한 그는 그대로 소파에 기대어 잠들었다.
새벽에 깨어 어둠이 걷히는 여명을 보다가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었다.
최동혁의 그림들이 수북했다.
그림 한 장을 꺼내 바라보던 그는
피식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그릴 수가 있지? 너무 어처구니가 없잖아!
근데 이 그림 정말 인간적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슬프고 못됐고, 아프고 사악하고, 선하고........"
그는 조용히 짐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한 곳에서 너무 오래 일했어.... 애들 데리고 회사를 옮겨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