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같은 장례식

죽음

by 토끼

"신부님 저 실직했어요."

" 잘했네. 아주 잘했어, 이제 좀 놀면 되겠네. 한 일년 놀면 더 놀고 싶을껄. 그런다고 인생이 망가지지는 않아"


그를 생각하면 맑은 눈이 떠오른다.
처음 만났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느 것에도 메임이 없이 자유롭게 사람의 마음을 드나들던 깊은 시선은
내 지친 마음을 꿰뚫었지만 채근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오랜 시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그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단지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그의 앞에서 말하게끔 만들 뿐이었다.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나는 건 없다. 그는 박 신부라는 이름으로 죽는 날까지 살았다. 가톨릭에서 파계한 성직자라고 해도 한번 신부는 영원한 신부였다. 그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이란 존재 대신 사랑과 자유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그와의 인연은 그가 땅에 묻히고 나서 이제 새롭게 시작된다.
길을 걸으면서도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이 떠오르고,

그의 미소가 생각나고, 차를 마실 때면 늘 그가 만들어 주었던 짜이차의 구수함이 생각날 것이다.

밤새 나누었던 대화 속에서 풀벌레 소리의 하모니까지 좋았었던 그때

그가 살았던 시골의 작은집이 얼마나 포근했는지....
애도의 시간은 슬픔은 잠시 머물다 사라지고,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평온한 안식을 가져다준다.

그때 경쟁에 밀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에 굶주리고 있을 때 그를 만난 까닭이었을까!
열심히 일하고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라, 인생에는 다른 길도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무위도식하는 삶도 충분히 가치가 있고, 인간이 누려야 할 권리이며, 하자가 있는 인간이어도 타인들을 보듬어 줄 수 있고
존엄하며,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가르쳐준 최초의 사람이다.
죽음이 벽이 아니라 새로운 문이라는 이야기를 그는 하곤 했었다.


한 사람의 죽음이 가족들에게도 지인들에게도 가벼워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은 엄숙하고 무겁고 슬프고 두려운 인식이 아니라,
애벌레가 나비가 되듯이 자유롭고, 새로운 시작이다.

타인에 대한
죽음에 대한 시선이 가벼워지려면

나의 죽음을 먼저 바라보아야 한다.

매 순간 죽음과 함께 하고 친해져야 한다.


지옥과 천당이라는 인과론적인 죽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죽음 앞에서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고, 고통으로 신음할지언정 마지막 한순간까지 지상에서의 삶을 아름답고 소중하게 살아간 사람이다.

죽음의 두려움은 탐욕에 찌든 종교단체와 , 생명의 유안함을 거부하는 인간의 집착, 도덕성으로 개인을 통제하려는 국가단체와,
물질적 풍요로움을 탐닉하는 부자들의 욕심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두려움으로 학습된 것이다.


진짜 신을 믿는다면

깊은 사유와 성찰의 시간을 통한 자신의 온전한 목소리를 통해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신이 주신 사랑을 품고 태어났다.
삶은 사랑의 에너지를 충전하는 생명의 시간이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고 실천하다가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뭐가 그리 바빠서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을까
전화 한번 못했을까.
그런 자책과 아쉬움은 들지 않는다.
박 신부는 그런 것들 쯤 가볍게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분이다.


죽음 뒤에 그 사람을 새롭게 기억으로 수정되는 사람이 있다.
마음 한구석에 무겁게 짓눌리며 기억되는 사람이 있고,
가볍게 봄소풍처럼 왔다가 아련한 즐거움처럼 남아있는 사람
박 신부님은 바로 가벼운 소풍의 기억 같은 사람이다.

그가 바라던 장례식은 슬픔으로 넘치는 추모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조촐한 파티처럼 웃음과 애정이 사람들 사이에서 넘치는 가운데,
그는 함께 잠시 마지막으로 더 지상에서 그들의 웃음을 보고 가고 싶은 건지 모른다. 그는 슬픔으로 기억되기보다 행복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나의 장례식은 그랬으면 좋겠다. 지인들이 소풍 가듯 그런 가벼운 차림으로
와서 나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서로 나누면서
지상에서의 시간들을 축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행복하게 이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