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고 편드는 거 아냐!

부활의 증인

by 토끼


2018년에 아무런 이슈도 없이 조용하게 사라진 영화이다. 호아킨피닉스 루니마라 두사람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종교영화이면서도

종교인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이영화가 종교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일 테고,

종교영화가 아님에도 일반인에게 외면받은 이유는 이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종교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강렬한 메시지가 어둡고, 때로는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을 이해하고. 그 사람의 결을 읽어 내려가는 과정은 어쩌면 평생 함께 살고 있는

가족조차도 힘든 일인지 모른다. 인간은 평생 그런 타자들의 어려움과

그 타자들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주제들 앞에서 고민하고 상처 받으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하물며 신앞에서는 얼마나 더 힘들까!

하지만 신은 늘 자신을 쉽게 풀어가라고 시종일관 말한다.

이영화 속 예수님은 그러한 질문을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들에게 끊임없이 던진다.

어린아이조차도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다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어려운 일인지

이 영화는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만약 비신자의 눈으로 예수라는 인물이 실존했다면 실제상황은 이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생생한 그 시대적 느낌을 전달하는 수작이었다.

예루살렘의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과 빈곤하고, 고단한 예수님의 여정의 흔적들이 생생하게

그 시대로 돌아간듯한 상상 속의 실제 모습처럼 영상 속에 담아내고 있었다.

자애롭고 평온한 예수의 모습보다 자신의 고통 앞에서 고단하고 고뇌하는 모습 속 예수는

때로는 그렇게 누군가의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점에서 제도권 안에서의 신앙인들에게는 굉장히 불편한 영화였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신앙인들이 반드시 보아야만 하는 비판의식이 가득한 메시지였다.

왜냐하면 인간 예수를 신적인 위치가 아닌 인간과 비슷한 모습과 고뇌들로 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의 마지막 증인을 막달라 마리아인 여자에게 자신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건 1차원적 해석으로 풀어내자면 남자 사제들인 주류인 종교 안에서 얼마나 불편한 일이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모든 일과 사실 심지어는 진리조차도 각자의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그런 점에서 이영화는 많은 자기 해석이 필요한 부분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증인으로 내세운 믿음의 대상이 여자 ,남자 ,가난한 자, 부유한자, 강인한자, 죄없는자, 현명한자. 이런 것들에 한정 짖지 않고,

한마디로 순결하고, 순수하며, 정결하고, 연약하고, 불완전한 그런 상징적 의미가 영화를 해석하는 시작이다.

경전을 1차원적으로 해석하고, 종교를 일차원적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이영화는

아무런 감동이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배신의 아이콘 유다는 지금껏 늘 수수께끼 같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유다를 조금 다르게 재해석한 부문이 마음에 들었다.


유다의 모습은 지금 신앙인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었다.

희망과 구원 그리고 새로운 왕국을 꿈꾸는 욕망 자체의 신앙의 모습 그 자체였다.

가진 자에게는 자신의 안위를 약속하고, 더 큰 도약을 꿈꾸게 하고,

절망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더 나은 세상을 약속하는 예수님의 약속을 유다는

믿었다. 로마인들에게 처참하게 죽은 자신의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유다는 기적으로써 세상을 구원하는 예수를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기적 이나 이적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하자.

예수를 신이라고 증명해 보이고 싶어서 그를 팔아넘긴다. 신이라면 당신은 반드시 이 고난을 기적적으로 어떻게든 이겨내고 다시 눈앞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주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성경에 의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을 당시 남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거나

당당하게 자신을 내보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곁에서 예수를 지킨 사람은 어머니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를 포함 여성들과 요한 뿐이었다.

예수가 죽은 뒤 무덤을 관리하던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것도 막달라 마리아였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부 목격한 증인으로써 성경에는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의 행적이나 중요성이 들어간 문서들은 모두 외경으로 분류되어 신약성경 목록에 빠져 있다.

속칭 영지주의 문서라고 하는 마리아 복음서 나그 함마디 문서 등은 성경의 범주에 들지 못했다.

성경은 유일한 여제자인 마리아를 지우고, 심지어 교황청에서는 마리아를 창녀라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1969년이 돼서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막달라 마리아를 중요한 사도의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성경의 12 사도 안에 마리아는 들어갈 수 없었다.

2018년도에 만들어진 부활의 증거인 이영화는 복음 서중에 가장 먼저 쓰였다고 알려진

마르코 복음서와 마리아 이야기가 있는 마리아 복음서를 참고해서 예수의 행적을 재해석했다.

이영화는 마리아 복음서의 스토리를 따랐다.

천국이란 어떤 것인가요?

마리아의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영화는 시작한다.

여자라는 지위가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 결혼은 부모가 정해준 자에게 귀속되는

것을 거부하는 마리아는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는다.

유태사회에서 절대적인 아버지의 법을 따르지 않자. 가족들은 구마 의식을 강요하며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한다. 그녀는 유대사회의 기준에서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분류되어 마귀에 들린 여자가 된다.

아버지는 남들과 같은 삶을 살아야지만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마리아를 설득한다.

타인이 강요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길을 잃어버린 여자는 절망하고 쓰러진다.


아픈 마리아를 치유하기 아버지는 예수를 데려온다.


예수 앞에 선 마리아가 말한다.

"제 안에 아버지를 거부하는 이 귀신이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는 답한다.

" 여인아 여기에 귀신은 없다. 너는 하나님을 느끼고 있을 뿐이다."

마리아는 자신이 고요함 속에서 외치던 자신의 절규와 자신으로 살고자 하던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자유의지였음을 깨닫게 된다.


이 사실을 이해한 마리아는 집을 나와 예수를 따라나선다. 그녀 앞을 가로막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거센 반발을 냉정하게 뒤로하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살 것을 결심한다.


하나님을 택한 삶이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삶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역설 안에는 아주 다양한 해석들이 있을 수 있다.

먼저 자신의 삶을 살아야지만 진정한 의미의 신을 만날 수 있고,

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사유된 신앙은 먼저 자신의 진짜 모습과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천국은 한 여인이 땅에 심은 겨자씨와 같으니. 이 작은 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고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가득 깃들게 되리라."

나 자신의 삶에 우리는 어떤 겨자씨를 심고. 가꾸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 열매는 무엇인지...


하나님을 느끼는 마음!

마음은 생각하는 곳이고 생각은 언어의 수단이다.

언어는 편의상의 언어일 뿐 애초에 없는 것이다. 마음이 허상이듯이...

이 허상인 마음 안에 텅 빈 공간. 그곳은 텅 빈 공간이 아니다.

바로 무안한 신의 사랑이 존재하는 곳이다.

천국은 거기에 잠시 실제 했다는 증거일 뿐이다.


내 자아를 죽이고 새로운 나를 만나서

또 새로운 나도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공간.


하지만 나라는 사람을 만나서 나 자신으로 살아야지만

이 모든 여정을 마무리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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