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쳐 시즌 2

그 이상의것

by 토끼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서사는 어떤 스토리일까!

아마도 마법, 초능력 , 양자이론 속 평행우주, 외계인, 이런 이야기들일 것이다.

이중에서도 마법 이야기는 어린아이들이 눈만 감으면 행복의 나래를 펴고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하면서 어딘지 마치 실제처럼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믿고 살았다.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산타가 없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고 나면 눈에 보이는 것만 믿게 되고

상상하는 것들은 이제 드라마나 영상만으로 대리만족하면서 판타지는 그냥 판타지로만 즐길

뿐이었다. 어른이 되어서 아직도 상상 속 이야기들을 떠들어대는 사람은

정신병자이거나, 비현실적인 사람이거나 , 좀 이상한 사람으로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람이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넘치는 상상력으로 소설을 쓰는지 모른다. 현실에서는 미쳤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상상력으로 구성해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세상, 만들고 싶은 생명체를 창조해 낸다.

그래서 판타지 장르를 읽다 보면 행복해진다.

판타지 영화든 소설을 읽다 보면

그 세계에는 죽음도 불행하지가 않고, 또 다른 스토리 속으로 부활하는 것만 같은 희망적인 마음이 된다.

악마나 악당이 파멸하거나 소멸하고,

선과 정의가 승리해서가 아니라 선과 정의가 그 어떤 법칙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믿음을 마음속에서

가지게 하기 때문에 늘 행복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

넷플렉스가 작년 말 선보인 위쳐 시즌 2를 아주 조금씩 보았다. 한동안 드라마 중독에 빠져 지냈기 때문에

중독의 고리를 끊어내는 첫 드라마여서 더 의미 깊었다.

하루에 잠깐잠깐씩 짬이 날 때마다 보았다. 아침을 먹으면서 보다 식사가 끝나면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도달해도 끊었다. 한참 재미있을 때 플레이 버튼을 중지시킨다는 건 엄청난 쾌감을 선사했다.

더 보고 싶은걸 보는 욕망을 제어하는 그 쾌감은 보고 싶은걸 계속 보게 하는 쾌감만큼 짜릿하다.

중독된 뇌에게 더 이상 먹이를 주지 않고 내 의지가 이겼다는 그 쾌감. 그리고

더 재미난 이야기들을 기다리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드라마를 즐기는 과정이 더해져서

이 드라마는 두배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다.


정주행으로 하루 만에 다 봐 버린 시즌 1 때와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이었다.

우선은 한편이 끝나는 시점에서 많은 생각과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스스로의 상상력으로 내가 만들어내는

추측성 이야기들이 즐거움을 주었다.

문득 하루 만에 드라마를 정주행 하는 행위는 뇌의 허기를 채우는 원시적인 행위처럼 느껴졌다.


위쳐는 마법사들의 이야기이다. 아무런 개연성 없이 마법이라는 이야기 속에 여러 가지 세계관을 담는다.

요정이 나오고, 돌연변이가 나오고 , 상상으로 표현되는 모든 괴물들이 나온다.

위쳐라는 말은 이런 괴물들을 퇴치하는 헌터라는 뜻이다.


괴물들을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돌연변이 위쳐 게롤트. 감정이 없는 종족이기에 전사처럼 싸우고 두려움이 없기에

그 어떤 험한 일도 기꺼이 달려가서 싸운다. 그들은 돈을 받고 싸우기도 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한다.

게롤트는 냉혈한 같은 돌연변이지만 괴물들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예니퍼라는 마법사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자신이 변화되어 가는 걸 느낀다. 감정이 살아나고 새로운 신념이 생겨난다.


예니퍼라는 마법사는 혼돈의 마법사이다. 요정의 혈통이지만 추한 모습으로 태어나 여자로서 모든 이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으면서

자라난다. 그녀가 마법을 지녔다는 걸 알아본 마법학교의 스승에 의해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결국 자신의 외모를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써서 아름다운 외모를 갖게 되지만 아이를 나을 수없는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단순한 마법이 아니라 인간이 가지는 내면 속 결핍에 의해 만들어내는 혼돈 안에서 여러 가지 마법적 능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마법이라는 능력을 학습을 통해 만들어낸다면

위쳐라는 드라마 속 마법은 인간이 가진 본성을 자극하고 그 다양한 결핍의 욕망에 의해 각자의 마법이 완성되고

자신만의 능력이 드러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예니퍼는 자신의 결핍된 마음 때문에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좌충우돌 실수를 연발한다.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 탐욕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녀의 본성은 원래 선해서, 점점 자신의 내면 속

아름다움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인물이 바로 시리라는 신트라의 공주이다. 의의성의 아이라는 인물로,

게롤트와 예니퍼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내려는 예언의 아이이다.


스토리는 간단하다. 바로 이 예언의 아이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이 일어난다. 이 아이만 손에 넣을 수 있으면 자신들이 원하는걸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론 자신들을 지켜줄 생존을 위해서, 더 막강한 힘을 선점하기 위해서, 영원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를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시작된다.


이 스토리라인 안에 바로 시리라는 공주는 어떤 신비스러운 능력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의문은 드라마를 보는

아주 단순한 핵심 궁금증이다. 이 궁금증이 드라마를 보게 하는 원동력이다.


그렇게 한 꺼풀 한 꺼풀 시리라는 인물의 궁금증을 벗기면서 드라마는 전개된다.


그리고 게롤트와 예니퍼 이 두 사람은 시리라는 존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건다.

그렇다면 이두 사람의 목적은 무엇일까?


이런 판타지물을 보면서 인간의 말초신경이 자극받는 건.

시리라는 인물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그 능력을 지켜주고 키워주기 위해서 그녀를 위해 희생하는 인물들이다.

그 희생에 감동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그들이 시리를 통해서 희생하는 목적이다.

게롤트는 그 목적을 "그 이상의 것"이라고 말한다.

현실에서는 있지 않은 그 이상의 것. 하지만 현실에서도 만나고 싶은 그이 상의 것.


그것은 인간의 숭고한 마음, 사랑, 아름다움 이런 추상적 언어가 아닐까!

현실 생활에서 희생이라는 단어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왜냐하면 그 희생이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다.

그 희생을 근거로 기생하는 인간들이 많고

그희생을 이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사람들이 많고, 그 희생을 강요하는 인간들로 인해 희생이란 마치 어리석은

착함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환타 지속 세계 안에는 희생이 없이는 스토리가 이어질 수가 없다.

복종과 헌신도 마찬가지이다. 현실 속에서 불편한 복종과 헌신 희생이라는 단어가

환타 지속 세계 안에서는 아름답고 숭고한 언어가 된다.

인간이 꿈꾸는 순수한 이상적인 욕망. 그런 거룩함을 우리는 꿈꾸고 있다.


마법은 그런 순수한 욕망을 끌어당긴다. 믿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 같고, 모든 것이 용서되고,

자유로워지는 순수한 마음.

게롤트와 예니퍼가 지키고 싶은 목적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절대적 선을 향한

순수한 자신들만의 욕망과 열정을 향해 자신을 바치는 것.

그렇게 위쳐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나도 그런 마음으로 행복해졌다.


끝내 열리지 않을 것 같은 한 사람의 마음의 문 앞에서 기다린적이 있었다.


당신의 변하지 않는 마음은 때론 강함이고 신념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단한 마음 때문에

스스로를 불편하게 한다면

자신을 깨고 나와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다.

우리는 많은 결핍을 가지고 있고 . 실수도 하고 너무나 나약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 나약함이 때론 나를 자유롭게

하기도 한다.


나는 당신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관계의 깨짐속에 서로를 일깨워 주고

서로를 해방시켜 주는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틀을 깨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내가 아름다워집니다. 마치 마법의 세계처럼

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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