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먹는 대마왕

행복

by 토끼

"내 불행을 먹고 행복해지렴...."

가끔씩 힘든 일이 생길 때 나의 베프에게 농담처럼 던진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금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주 드라이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친구는 위로나 공감보다는 내 불행에 맞불을 놓는다.

"너의 불행? 어이가 없군 나도 만만치 않아. 어디 한번 들어볼래?"

그녀는 속에 감추어둔 마음 밑바닥까지 속 시원하게 내뱉는다.


그녀의 불행을 듣고 있자면 별로 수긍이 안 갈 때도 있다.

그녀는 아침에 눈을 떴는데....

오늘 하루가 너무 길고, 문득 아무런 즐거움이 없다는 무기력에

이불속에서 나오기가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 호강이 요강에 떠받쳐서 네가 지금 아주 난리부르스를 떠는구나!"


이렇게 대꾸하지만, 마음한 구석에는 그녀의 마음의 천근만근 무게를 느낄 수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가끔 우리 서로의 불행을 속 시원하게 뱉고 나서

내 손톱 밑의 가시가 제일 아프다고 떠들어대곤해도,

서로의 불행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로 나눈 불행의 연대감이 서로에게 위안을 준 것은

우리 사이에 불행을 바라보는 속깊은 마음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행복이 늘 우리 삶을 채우고.

불행이 아주 가끔 찾아온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생명의 탄생의 본질은 태어나는 순간 불행을 바탕으로 살아간다.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면 결국 생명이란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서로 먹고 먹히는

먹이 개념의 존재들이다.


현대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경쟁하면서 먹고 먹히는 존재들이다.

부조리하고,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불행이다. 불행이라는 전재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한 출발이다.

결국 행복이란 정의는 이런 불행한 세상에서

불행이 완화되어서 아주 가끔씩 행복하다고 느끼는 상태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로 대변되는 행복이라는 강요된 언어는

소유만으로 행복을 정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좋은 부모를 가지고, 좋은 집을 가지고, 훌륭한 스펙을 가지고,

좋은 친구를 가지고, 건강한 몸을 가지고, 이렇게

갖추어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끊임없이 학습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이런 소유의 개념이라면 부자들은 절대 불행할 수가 없다.

자본가들은 불행이라는 개념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부각하면서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소유를 향해서 질주하도록 만든다.


지배층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패러다임을

세뇌시키기도 한다.

불행의 사슬을 끊어내고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불행에 대해 지나친 거부감을 걷어내고

불행의 상태을 스스로 인식해야 한다.

넘어진 사람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넘어져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불행이나 고통에 대해 우리는 아주 친숙해져야 한다.

나의 고통과 불행에 대해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불행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자신의 불행에 솔직하지 못하고,

숨기고, 행복을 가장하면서 살기 때문이다.

이런 스스로의 회피 때문에 우리는 은연중에

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나의 행복을 쌓아가고 있기도 한다.

내 불행이 남의 행복이 된다는 이 잔인한 말을 처음 느낀 건 초등학고 3학년 때였다.

두 살 터울인 언니와 싸우고, 부모님에게 한바탕 야단을 맞고 세상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잠시 옆동네 친구 집으로 가출을 할 맘으로 달려 간 적이 있었다.


친구의 집 철대문 앞에 섰는데. 시끄러운 소리에 조용히 숨죽이며 집안을 살폈다.

집안의 온갖 가구들이 다 난장판이 되고, 머리와 옷가지가 찢기고, 술병들이 굴러다니는

집안에서 몸뚱이를 든 아빠와

울고 있는 엄마 옆에서 넋이 나가 있는 친구를 보고 말았다.

그때 무서워서 몰래 그 집 앞을 지나쳐 뒤도 안 돌아보고 골목길을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소꿉친구의 모습은 충격적이었고, 마음 아팠고, 나의 슬픔이 되었지만,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안도의 햇살이 쏟아졌다. 난 그래도 한 번도 맞은 적은 없잖아.

우리 부모님은 날 야단치기는 해도 때리지는 않아. 난 적어도 맞고 살지는 않아.

가난하기는 해도 우리 집은 화목하잖아! 난 괜찮아. 난 저런 집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

그 뒤로 늘 그날의 기억은 나의 위안이 되었고,

친구의 불행을 몰래몰래 숨겨놓고, 가끔씩 꺼내보면서 남에 불행을 먹고사는 대마왕이

마음속에 자란다는 걸 느꼈다.


유튜브를 터치하다가 너무나 쉽게 만나는 타인들의 불행.

다이어트 강박증에 걸려

마흔 살의 나이에 몸무게가 26킬로그램밖에 안 나가는 불행한 여자.

호스피스 병동의 말기암환자들.

자살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울증 환자들.

세계 속 난민들.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사는 국민들.

누구누구의 불행이 더 불행할까?

유튜브 속 미디어들 속 고통받는 많은 사람들의 불행은 저마다 참담하고 마음 아프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타인의 불행을 먹고사는 대마왕이 산다. 타인의 불행을 잘 먹고 소화시킨 대마왕이 다스리는 왕국은 번성한다. 나는 대마왕이 타인의 불행을 납치해 와서 잘 다스리고, 잘 채찍질 해주기를 바라면서

타인의 불행을 손쉽게 먹는다. 불행을 바라보는 편협된 마음. 사실 나의 불행을 꾹꾹 눌러놓고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타인들이 겪고 있는 불행에 대해 우리가 공감하고 이해하는 방식은

그만큼 내가 인식하는 불행의 깊이만큼이다.


불행 속 고통을 회피하고, 행복이라는 포장 속에서 즐거움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진짜 자신 앞에 찾아온 고통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타인의 불행에 안도하면서 살아온 시간 속에서

나의 불행이 최고의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내 불행이 눈덩이처럼 커졌을 때 , 대마왕은 나를 삼켜 버리고 만다.


그동안 먹었던 타인들의 불행까지 한꺼번에 내 불행 속에 폭탄을 투하한다.

타인들의 고통에 함께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타인들의 행복에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


불행이라는 것에 솔직하고, 담담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은 인생이 곧 고통이요 불행이라는 이 당연한 본질을

행복보다 우선시해야 한다.

그렇게 고통과 불행이 완화될 때

찾아오는 행복이 소중하고,

행복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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