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이라는 고통

카렌시아

by 토끼

작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날 이명이 찾아왔다.

건강한 사람에게 이런 예기치 않은 손님은 그저 좀 당황스러운 일이겠지만,

나 같은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핵폭탄급 쓰나미를 몰고 왔었다.

하루를 정리하고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들떠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터졌다.

무슨 일 이지?

처음에는 말 그대로 귀를 의심했다. 양쪽 귀에서 동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뇌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이명 때문에 지금까지 고요했던 세상이 갑자기

혼돈으로 변했다. 안절부절못하다가 다시 눈을 감고 잠자리에 들었다. 30분이 지나도 계속되는 굉음 같은 소리에 잠은

완전히 달아나고,

삑 하는 소음이 나의 세계를 점령했다. 다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나의 심장과 온몸이 긴장으로 경직되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대장에서는 신호가 느껴졌다. 배가 아파왔다.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을 갔다 온 뒤 자리에 누웠는데.

이때 마음이 외쳤다.


" 아 다시 지옥문이 열리는구나"

그렇게" 삐"하는 굉음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이명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결국 병원에 갔지만 모든 건 정상이었다. 증상은 원인불명이었고, 처방된 약은 신경을 안정시켜주는 신경안정제가 전부였다.

문제는 이명이 아니었다. 이명으로 마음이 놀랬는지 불면증이 찾아왔다.

과거 외상 후 스트레스 때 나를 괴롭혔던 불면증. 평생 불면증이라는 걸 몰랐던 나는 잠을 잘 수 없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그때 알았다,

이명이 없어진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보면 불면증이 찾아오면 뼈가 부러진 후에 다시 붙는 시간처럼

길게는 몇 달 짧게는 몇 주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없어졌다.

8년간 똑같은 패턴으로 되풀이되는 일들인데도, 불면증 하면 먼저 우울이라는 단어가 잠식하고

두려움과 불안감으로 일상이 채워졌다. 마음공부의 가장 큰 핵심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훈련이다.


하지만 무의식이라는 무서운 내면은 이성이 꼿꼿하게 지키고 서 있어도, 먼저 몸으로 반응을 해버린다.

몸이 반응을 하면 마음은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넘어져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전쟁에 참전하는 군인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을 살려 전략과 전술을 짰다.

잠과의 싸움에서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불면증과 공존하는 법을 찾는 게 목표였다.

일단은 시간을 넉넉하게 잡는다. 이번에는 대략 길면 3개월 짧으면 한 달 정도로 끝이 날 수 있다.

마음을 침착하게 먹고,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마음공부와, 예수님, 부처님까지, 총동원해서

견딜 수 있는 플랜을 짜 힘든 시간을 견디기로 마음먹는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실수는 처음 접하는 육체적 신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내 몸은 마음과 달라서

먼저 벌벌 떨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 그다음 사태라도 잘 수습해야지...

약을 먹어서 잠깐 시간을 벌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명!

나이가 들어감에 따른 노화현상의 일부였다.

생활소음이 있는 낮시간은 이명의 존재를 의식 못하지만 문제는

혼자 있게 되는 조용한 시간이 문제였다.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감았다. 소리가 지배하는 세상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명 안에서 살 수 있는 방법도 있을 거야! 소리를 따라가 볼까? 피리 부는 사람을 따라가듯이...

삐~~~하는 소리 안에 나의 카렌시아 같은 장소가 있을까?"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었다.

1월 말쯤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두통이 하루 종일 뒷머리를 10분 간격으로 전기충격이 오듯 아팠다.

이명도 힘들어 죽겠는데. 두통이 왠말인가!

자야 하는데 두통과 함께 또 날밤을 새는 건 아닌지 약을 삼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오랜만에 벌떡 일어나서 명상을 했다. 기도만 했지 명상을 안한지가 꽤 되었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감각과 모든 소리와 모든 느낌 속에 머물러 지금을 느낀다.

지금 나의 감각을 자극하고 불편하고 힘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금 나의 온세계를 자극하는 건 나의 잡생각도 나의 감각도 아니고

오직 이명으로 삑 하는 소리와 지끈거리는 두통뿐이었다.

두통의 강도가 살짝 줄어들면 이명의 소리가 커지고,

두통이 강해지면 이명의 소리는 저너머로 모기소리만큼 들렸다.

두통과 이명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뜀박질을 했다.

이명은 그대로인데 두통의 강도에 따라 느껴지는 소리가 달랐다.


이명이 더 크게 들리면 삑 하는 소리가 느껴지는 뇌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소리와 함께

깊은 파동의 세계 속에서 매초 매 순간을 함께 하면서 지금 이 순간 속에 느꼈다.

그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느끼는 모든 시간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머물 뿐이다.

그러기에 지금 이 순간은 아무런 분별도 없고 그저 존재할 뿐이고, 그저 머물 뿐이다.

그렇게 영원이라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그저 지금일 뿐이다.

삐~~~~~하는 소리에 지금 이 순간이라는 절대적인 시간이 존재했다.


그렇게 잠을 잊고서 긴 시간 이명 속에서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희미하게 두통이

살짝 머릿속을 아주 흔적만 남기며 지나쳐 가는 걸 느꼈다.

두통의 강도가 서서히 줄어 들었다.

이명을 붙들고 한 명상을 끝내고 다시 잠자리에 누웠는데.. 또다시 두통이 시작됐다.

혹시나 싶어 다시 지금 이 순간 명상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두통이 멈추었다.

이명이 있으니 지금 이 순간 명상에 너무나 쉽게 몰입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명이라는 소리 속으로 들어가서 그 순간을 붙잡으면 몇 초 만에 몰 입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역시나 두통은 느낄 수 없었다. 그때 강한 자신감이 번개 치듯 머릿속을 때렸다.

역시나 일체유심조가 맞아떨어지는구나!

그날 이명을 붙잡고 했던 지금 이 순간 명상은 지금까지 맞본 평온과 차원이 다른 평온함이었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모든 감정중에서도 그날의 경험은 가장 강열한 깨달음이었다.

그날 밤 두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됐지만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이제 마음은 두통과 이명에서 자유로움을 찾고 공존하는 법을 알았다.


아침에 눈 떴을 때 알았다.

이명이 이제 내 일상의 한 부분이 돼었다는 걸....

혼자 있는 고요한 시간 이명과 함께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은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소리는 나를 안정시키고 이완시키고, 안심시킨다.

받아들임 속에서 뇌는 스스로 상황을 재구성한다.

이명 속 지금 이 순간은 나를 잠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 모든 것은 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바뀌어진 현상이다.

이명을 이용한 받아들임의 의미는 단지 이명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닥쳐 온 불행이나 고통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법에 대한 절대적 진리와도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껴주는 주체는 나이기도 하면서 또 다른 자아 들일 수도 있다.

나라는 자아는 하나이면서 또 분열된 많은 자아가 있다.

자아 분리는 언제나 필요하다. 늘 언제나 변하지 않는 초자아가 존재한다.

이 초자아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아들을 통제하고 느낄 수가 있다.

지난 시간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 힘들었던 것은 분열된 자아들의 힘이 너무 커서 초자아를 압도해버린 까닭이다.


초자아는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안다.

초자아는 바로 내가 나인체로 있게 해주는 주체이다. 나다운 삶을 살아가게 해주는 주인공이다.

무수한 자아들이 타인들의 감정에 휘둘려서 휘청거리더라도 초자아가 깨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든 자아들과 조화롭게 살아간다.

불면증은 잠을 자야 한다는 강박에서 출발한다. 그 강박마저도 받아들이고, 그 감정 안에서 집중해 본 적이 있는가!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잠에 대해 저항했던 수많은 날들의 기억들이 온전 히 다 들어있다.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서, 조명이 너무 밝아서, 잠자리가 포근하지 못해서, 너무 긴장돼서, 스트레스 때문에,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잠들 수없다고 무의식이 아우성친다.

이런 모든 감정들을 우리는 외면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모든 감정들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잠들지 못하는 모든 불편한 감정들을 받아들이고, 그 불편한 감정 안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해야지만

내 무의식 속의 자아가 미치도록 힘들다고 외치고 있는 상황과 감정들을

내가 온전히 느껴주길 원한다. 내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자아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한 자아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초자아인 내가 깨어있는 상태로 온전하게 느껴준다는 것은

무의식 속 자아들을 자기 자리로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내가 나라는 깨어있는 의식으로 불안정하고, 힘든 감정을 속으로 들어가 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무의식 속 자아들이 불안정하게 느꼈던 감정들을 순화시킬 수가 있다.

봄이 찾아왔다.


이명은 아직도 여전하다. 하지만 이명이 있다는 건 의식할 때뿐이다.

이명 때문에 시작된 불면증은 고맙게도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안겨 주었다.

이제 나에게 고요한 세상은 없다. 삐~~~하는 소리가 점령해버린 세상이 돼 버렸다.

하지만 이제 이명이 없는 세상은 좀 허전할 것 같다.

그사이 나와 이명은 이제 뗄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이명은 새로운 명상의 성지인 카렌시아(안식처)가 되었다.

지지난주 코로나 증상으로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통 안에 머물면서 마음이 저항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나의 초자아는 이제 깨어 있어, 느낄 줄을 안다. 있는 그대로를 이론이 아닌

평온한 순간만이 아닌 위기의 순간에도

실제로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두려운가?

죽음

질병의 통증

불면증

고통

허무

상실감

그 어떤것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수는 없다.

살아 있다는건

내가 나로써 깨어있어 이 모든걸

느낀다는 것이다.


마음의 지옥은 이 모든감정들을 부정하고

저항했을때 찾아온다.



매거진의 이전글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