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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Apr 04. 2024

나의 믿음을 전복시키는 생각

믿음

유튜브를 클릭하다가 평소 좋아하던 여자 연예인의 모습이 떠서 클릭했다.

덤벙거리고, 단아하며 , 순수한 연기를 했던

여배우의 낯선 모습이 동영상에서 보였다.

연기 같은 실제모습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배우의 간능집회 영상이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주여 우리가 모르는 죄까지도 모두 꺼내어 우리를 참회하게 하소서라고

외칠 때 목소리는 카리스마를 넘어 섬뜩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늘 느끼는 거지만 왜? 통성기도는 무섭게 들릴까? 그리고 모두 비슷하게 느껴질까?


같은 목사의 설교를 들어서 일까?, 신도들이 하는 대화가 비슷해서일까?

교회문화에 젖어서일까? 기도라는 것에 형식이 있는 게 아닐 텐데...

교회 다닐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기도라는 게 다 비슷비슷했다.

아무도 자기 사적인 고백을 하는 사람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느님을 찬양하고, 우리 모두의 죄를 함께 고백하는 참회기도,

통성기도는 같은 말, 방언을 크게 외치며, 마치 주문을 거는

주술사 같기도 했다. 더 크게 더 몸부림을 치고, 몰입하면

아마도 하나의 일탈이 일어나거나 정신이 혼미해지기도 할 것이다.


나는 신자가 아니어서 모른다.

교회 안에서는 개개인의 취향이나 자기다움은 교회분위기를 망친다.

나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을 마음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죽이고 순응한다.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기도에는

나를 드러내지 않는다.


골방에서 기도 할 때 그들은 어떤 기도를 할까?

나는 언제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는 기도가 궁금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는  하느님 앞에서는 내가 아닌 그저 모든 죄인을 대표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을 반성하고, 자신의 시간을 돌아봐야 하는 시간

기도 속에서 자신의 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시간.

자신의 죄를 깊이 생각하고, 성찰해야 하는 시간이 그들에게는 없어 보인다.

모두가 소리 높여서 울고, 기도할 때 무엇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죄는

자연스럽게 사함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죄가 아닌

마치 모두의 죄인 것처럼 공동의 죄로 돌린다.

죄인 공동체가 되는 순간 그들은 하나가 된다. 목사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목청을 높여 힘주어 소리친다.



주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운명공동체의 죄를

마음꺽 목청을 돋워 외치고 나면 일주일간의 죄는 사함을 받는다.

한 번의 주일예배면 충분하다.

나는 편협한 시선으로 교회를 본다.  나를 전도했던 지인들은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나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기도만 하면 모든 시름이 씻은 듯이 낫고, 심지어는 오래된 지병까지

사라졌다고 하는 기적의 은사는 신도들을 유혹하는데 최고의 전도 방법이다.

기적은 인간을 종교로 이끄는 강력한 힘이다. 이단종파들이 가장

많이 써먹는 수법 중 하나이다.  


신흥종교도 아닌데.. 어떤  모임의 총수는 매일 손으로 달크기를 키웠다 늘였다를

한다고 공공장소에서 떠들곤 한다.

인간은 자신이 그 어떤 체험을 겪고 나면 이성을 잃고 그 체험 안에서

맹목적인 믿음이 생겨 난다.


그 체험이 자신이 선택받았다고 믿는다.  또는 그들이 선택받은 인간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특별한 그 무언가가 있어야 믿음이라는 게 함께 발동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고통 속에서 헤매던 시간 절실하게

살려달라고 외쳤을 때 내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그 어떤 느낌이 들었던

순간이 있었다. 나는 그 느낌을 잡았다.



나에게 특별한 그 무언가는

바로 느낌이다.  고통을 잠재우고, 정신을 맑게 하며 평온을 부르는 바로 그

느낌. 나는 그 느낌에 집착한다.

가만히 평온하게 있는 그 순간까지도 그 느낌을 습관처럼 찾는다.

그리고 그 느낌의 순간 나는 감사의 기도를 한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강하게 믿는다.

그렇게 해서 나 혼자만의 신앙은 굳건해진다.  하나의 체험에 기대어

나는 이 체험 속 스토리텔링을 날마다 한다. 가끔은 내가


신에게 의지하는 건지 이 느낌에 의지 하는 건지 헷갈리기도 한다.

신은 이 느낌을 통해서 온다는 믿음을 굳건히 하고,

어느 날  이 느낌이 도무지  들지 않는 날은 불안해하기도 한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일이 생길 때 마음속에 누구를 의지 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사람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다.

자기 자신, 엄마, 배우자. 친구, 연인, 자식이 되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신이라고 답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종교가 없더라도 신이라는 존재는 샤머니즘의 형태로 우리 정서를 지배하기도 한다.

그리스 신화처럼, 사랑의 신, 생명의 신, 재물의 신, 이런 다양한 신들에게 우리는

자신의 안위를 지켜 달라고, 기도 한다.


신에게 우리는 원하고, 바라고, 간청하고, 정성을 다한다.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기독교는 하느님에게 하는 이런 간청기도를 중요하게 여긴다.

간절히 원하면 하느님은 반드시 들어준다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한다.

하지만 굳이 신앙이 아니더라고, 시크릿이라는 책에서 보여주듯이, 아니면 양자역학의 본질이 말해주듯,

불교에서 강조하듯

마음의 기본 원리는 일체 유심조. 자신이 믿으면 믿는 대로 행동하고, 살아가게 되고, 우주는 결국


믿음의 원리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신이 아니더라도, 우주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인간은 건강하게 살고 싶고, 평온하게 살고 싶고, 부유하게 살고 싶고,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한다.


결국 인간이 희망하는 건 언제나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간은 그 어떤 체험을 근거로 신이라는 믿음을 확신한다.



광기란 그 어떤 체험을 했을 때 그 느낌을 극대화할 때 나오는

에너지와 같다.  소리를 지르고 흥분하면서, 몰입해서 부르짖을 때

이성은 다른 형태의 느낌으로 변하고, 그 이상한 경험을

영적인 체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느낌을

우리는 하나의 은사 또는 명상 속 무아, 또는 무아지경,  이라고 한다.


체험에 기대지 않고,

이성적인 종교관을 가진 사람들은 , 자신의 신앙 안에서

성경을 읽고. 불경을 외우며 말씀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는 뜻을 생각하고,

하느님이 진정 원하는 게 무엇 일지를 생각하면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들은 체험보다는

오로지 자신의 성실하고, 순수한 삶이 하나의 체험보다 더 중요하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루하루를 꾸준하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과 신앙을 지키고 싶어 한다.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본다.

"당신이 신이라면 병원에서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빌고, 새벽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고, 불공을 드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습니까?"



신은 전지 전능하다. 신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만을 특별히 사랑하실까?

성경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신에게 모든 생명체는 특별하다. 바퀴벌레 한마리도 말이다. 바퀴벌레에게도 바퀴벌레의

영성이 존재한다. 그들안에서도 그들만의 사랑과 숭고함이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신이 창조한 창조물이기에 ....

  신은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고, 생과사에도 자유롭다.

선과 악도 필요 없다. 신이 아닌가! 선과 악이 무슨 소용인가! 신에게.....

그런 신이 인간들이 자신을 추앙해 주기를 바랄까? 자신을 믿고, 재물을 바치고, 매일매일 기도를 해주기를 바랄까?

왜 굳이 무엇이 아쉬워서....


종교를 떠나 가끔 이런 상상을 한다. 신은 생명체를 왜 만든 것일까?

무안한 삶을 사는 신에게 생명은 아름다움 그 자체일 것이다.

신에게는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과악도 없다. 왜냐하면 영원이란 이원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하나의 무한이라는 절대만이 존재한다.

유안 한 생명을 가진 생명체들이 지구라는 별 안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되풀이되고 있다.

생성과 소멸은 일종의 에너지덩어리 들이다. 지구는 이렇게 생명의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서,

태어나고, 유지되고 있는지 모른다. 죽음과 탄생, 선과 악, 추함과 아름다움, 고통과 기쁨.

이런 이원성 속에서 생명은 살아간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산다.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먹어야 하는 본능에 충실 하지만, 오래 살기 위해 영원히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는 않는다. 죽음 앞에서 당당하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완전히 다르다. 부와 권력을 가진 인간의 욕심은 영원에 집착한다.

진화와 진보를 신의 영역으로 끌어올려, 생명연장에 도전하고, 불로장생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인간에게 뇌이식이라는 의학이 성공하면, 소설처럼 부자들을 자신의 뇌를

젊은 사람의 몸을 사거나, 범죄를 저질러 이식할 것이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복제된 자신을 만들어

영원히 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신이 있다면 이런 모든 일들을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까?

지구가 멸망하다고 해도, 인공지능로봇이 인류를 지배한다고 해도, 신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가정해 보라, 신이 짠 하고 나타나서, 기적을 행하면서,

나는 신이다. 이제부터 너희들은 구해 줄 테니 나를 믿고 이제부터는 착하게 살아라.라고 할 리는 없다.

차라리 불구덩이로 만들어 인간들을 다 멸종시키는 쪽이 더 합리적인 답이다.


인간들이 말하는 기적이라는 것 자체가 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들이 그저 존재 자체만으로도 좋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도 고통도, 신에게는 아름다움일 수 있다. 신에게 고통이 아닌 것이니....

신은 원래 그렇게 세상을 만드셨다. 세상 만물을



그런데, 인간만이 이런 세상만물에 선과 악, 이해득실, 추함과 아름다움, 흑과 백을 만들었다.

원시시대가 아닌 공동체가 생겨나면서부터 이런 이성적 판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논리적 사고란 원래 이원성이 존재해야지만 가능하다.


결국 신과 인간의 견해는 완전히 다르다.

인간은 신을 우리의 견해를 기준으로 만들었다.



거기에다가 또 다른 이익집단은

이익집단의 견해를 기준으로 율법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신은 인간의 기준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신은 인간에게 어떤 형태로도 존재할 수도 있다.

영성가 들은 신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이라고도 한다.

자연이라고도 한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신은 그저 존재하는 그 자체이다.

애초부터 세상만물은 정해놓은 방식대로 흘러가는 것이 신의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저 모든 걸 신에게 맡기는 것이 정답이다.

무엇을 해 달라 무엇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운명적 사건사고들은 무조건 감사하며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선택하는 것이 정답이다.

불의한 일을 당하면 먼저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먼저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의 힘을 받아들이고, 그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결정한다. 그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

그 선택의 책임을 질 각오만 하면 된다.



신은 인간의 이러한 자유의지를

신은 우리가 창조해 놓은 창조의 근원 그 자체라면 말이다.

우리가 신을 만나기 위해 하는 모든 갖가지 방식들은

그저 하나의 코미디에 불가한다.

도대체가 무엇이 문제인가!


나의 안위만 빼면 이 세상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전쟁이 일어나

죽어나간다고 한들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자연의 이치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나의 삶, 신앙이런 모든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가끔은 사유해 보아야 한다.

지극히 사적인 나의 영역 안으로 이런

하나의 역설적인 사실을 마음 안으로 들여와

지금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가치를 한번

깨부수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나의 믿음을 전복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각자 목숨처럼 믿던 믿음이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지.그리고 변하는지 지켜보는 것.

그다음 어떤 생각의 변화가 일어나는지는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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