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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Oct 27. 2024

인공지능과 인간의 다른점

aI로봇

올해 개봉한 애니메이션 와일드로봇이라는 영화에서 ai 로봇 로즈는 말한다.



"sometimes to survive, we must become more than we were programmed to be "

" 때로는 살아남으려면, 프로그래밍된 자신을 뛰어넘어야 해"

인간을 케어하는 임무로 프로그래밍된 로봇이

기상악화로 화물기가

야생의 섬에 불시착한다.  자신을 주문한

사람은 없고  온통 야생동물만 가득한 섬.

처음 알에서 깨어나 자신을

엄마라고 여기는 거위를 키우면서

지금 프로그램된 상태로는 거위를 온전하게 키울 수 없다는 한계를 깨닫고 로즈는 프노그래밍된  임무외의   감정인 절망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다.


배송실패. 공장귀환

으로 프로그램된 로즈는

  자신을 만든 제조회사로 복귀하라는 프로그램을 거부한 채로 새끼거위를 키우기로

결심한다.


그때부터  로즈는  ai에게는 가질 수 없는

프로그램된  임무완수와는 다른

인간적 감정인 특정인에게 부여된

책임이라는 감정을 만난다.

자신에게 프로그래밍돼 있지 않은 사랑과 연민 책임 그리움이라는 감정도  생겨난다.

로봇이라는 완전한 한계로 프로그래밍된 자신과 작은 날개라는 선천적 한계를 가진

거위브라이트빌

이 둘은 자신이 가진 자신을 뛰어넘어 다른 누군가가 된다.

온전히 자신이면서 전혀 다른 자신의 다른 누군가가 된다.


AI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중에는 AI스스로가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 그런 주제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주제들은 AI에게 휴머니즘을 느끼게도 하지만 무서운 위험성을 느끼게도 한다.


인공지능을 갖춘  드론이 군사용 무기분야에 활용되기 시작하면서

종종 오작동을 일으켜 인간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한다.  AI는 패턴을 찾아서 그 무수한 패턴대로 실행하고,

행동하는 프로그래밍이다.  AI에게 주어진 임무 중 자신의 임무에 인간이 방해된다면

AI는 인간을 보호의 대상이 아닌 제거의 대상으로 바꿀 것이다.


자본가들이 꿈꾸는 AI의 청사진은 아마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는 군사용 AI의 개발이다.

국가나 군대는 전쟁비용을 줄이고, 인명피해를 없앤다는 명목으로 AI군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국의 인명피해가 아닌 적국의 생명을 파리목숨처럼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고, 효율성을 따진다면 언젠가는 AI이 강국이 세계의 패권을 쥐고, 인류를 지배할 것이다.

그렇게 과열된 AI군사증강은 인류종말을 예고한다.  어쩌면 인간이 서로를 죽여서 인류가 멸종하는 것보다

차라리 AI에게 지배당해서 인류가 멸종하는 것이 더  희망적인 시나리오가 될 수도 있다.


AI가 자의식이라는 걸 가지게 된다면,  그 자의식에는 도덕과 윤리라는 의식도 가지게 될 것이고,

인간이  AI에게  기대어볼 만한   조금의 자비라는 게 생길지도 모른다.


인간을 노동에서 해방시켜서 조금은 편리하게 살게 해 주려고 AI인공지능은 진화하고 있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점점 떨어지고, 빈부격차는 더 심화되고, AI발전으로 민주주의는 붕괴하고,

인류는  계급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그런 사회가 오면  AI의 정체성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그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던 낭만주의 시대는 가고,

인간개개인의 가치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그런 암울한 시대가 올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부러워하던 AI의 스토리는  인간의 가치가 살아있을 때의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문학이 살아있고, 예술이 살아있던 그런 시절의 이야기를 그리워할 수 있다.


인간이 AI와 다른 점은 불완전성과 예측불가의 생명 때문이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의 무아에서

시작된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은 자유의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

인간도 AI처럼 프로그래밍화 되어 살아가기도 한다. 권력과 물질 앞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패턴대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지구의 반이 될 수도 있다.  국가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는 건

정해진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노예 같은 삶을 선택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그런 기계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어서일 것이다. 꿀벌의 사회와 개미의 사회에서 일개미와 일벌이 그랬던 것처럼...

균형과 조화는 언제나 이런 시스템으로 공존하고, 진화해 왔다.


 인간은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들이다. 인간의 정체성은 언제나 변하고, 진화한다.

그 변화와 진화의 중심에는 인간의 감정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불안한 감정은 어쩌면 과거의 기억들 때문일 수도 있다. 과거의 좋지 않은 기억이 지금 현재를

지배하고 있을 때 마음은 불안을 증폭시키고, 끊임없이 불안을 키워 신체증상을 일으킨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잘 다루는 사람 중에는 이런 장점을 활용해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을

강화시켜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정치, 문화, 경제, 예술, 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성공을 거머쥐는 토대가 된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에 잡아먹혀서, 그 감정에 지배당하면 마음의 병을 얻는다.


사람들은 마음의  병을 얻으면  과거의 행복했던 자신의 모습에 집착하게 된다.

지금의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과거의 자기 정체성을 동일시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들을  되돌아보고 지금 병을 얻은 이유가 무엇인지 원인을 찾아보게 된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공부하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의 길을 잘못 들어서면 아무리 힘든 여정을 겪더라도

도착지는 여전히 자신이 처음 시작했던 바로 그 시작점으로 돌아와 다시 시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힘들게 약도 먹고 치유하면서 달라졌다고 여겼는데

다시 원점이 되어 여전히 힘든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

절망이라는 늪에 빠지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언제나 경험한다.

우리는 치유라는 출발점에서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난다.


아니면 행복의 선택이라는 출발점에서도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난다.

행복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그런 길을

선택한다면, 그 길은 또 다른 불행의 늪을 예고한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 인생의 갈림길에서 선택하는

두 갈래의 길이 나온다.

숲 속의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사람들이 적게 간길은 험난한 여정을 예고하지만

처음 한번 길을 내기가 힘들지 그다음은 길은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이 적게 간길을 선택하면 아마도 그 길은

수십 개의 소로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길은 자신이 만든 변화된

자아들이 스스로 만든 아기자기한 길이다.

자신이 원래 걸어온 길이 자신이 선택한 그런 길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의 병을 얻은 것일 수 있다.

그런 과거의 길을 고집한다면 길을 잃는 건 당연하다.


마음의 병은 어쩌면 스스로 길을 만들기 회를 부여하는 하나의 지침서일 수 있다.

지금 네가 선택한 길은 너의 길이 아니야

이제는 네가 선택한 다른 길을 가야 돼

어항 속의 물고기로 살기보다는 넓은 바다의 물고기로 살아가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에 안주해서 그 누군가가 살아온 편안한 삶을 살기보다는

나 다운 삶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과 감정 사고방식에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생각들이 정말

맞는가! 감정들에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지금 느끼는 감정이 진짜인가.

슬픔도 분노도 화도, 즐거움도 지금 느끼는 감정이 맞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지금 웃고 있지만 사실은 슬픈 건지 모르고

지금 울고 있지만 사실은 행복한 건지 모른고

지금 불안하지만 사실은 평온한 건지 모른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지 모두 의심해 보아야 한다.

지금 나를 괴롭히고 있는 이 불안하고 두려운 감정은

사실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내 온몸을 각성시키는

사랑의 감정일 수 있고,

미치도록 즐겁고 행복한 이 감정이 사실을 나를 망치고 있는

하나의 미혹된 중독된 그런 감정일 수 있고,

지금 평온하고, 평안한 이 감정이 강박으로 덕지덕지 붙여서 잡고

있는 집착일 수도 있다.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던진 말이 있다.


"언제나 물어야 해~

언제나 의심해야 해~"

평생을 프로그래밍화 된 나의 감정의 습관적 패턴을 AI처럼 완벽하게 읽어내서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하나의 체계화된 감정의형태로 유지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AI는 절대로 인간을 하나의 패턴 속에서 정의 내릴 수가 없다.

나 스스로도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그런 현재를 살고 있다.

하지만 하나의 패턴은 반드시 있다.

마음을 내려놓고 보면 보인다.


마음의 평온을 보장하는 하나의 패턴.

끊임없이 학습하고, 배우고, 반복해야 하는 인공지능과 같은 운명의 길을 가지만

처음부터  쓰임새라는 게 없이  스스로  실존하는 인간은

막다른 길에 다다랐을 때  버려야 한다.


내려놓아야 한다.  공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 진화는 텅 빈 공간을 더 늘여야지만 채울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길은 질문하고, 받아들이고, 내려놓고, 비워야 한다.

언제나 변화하고, 또  처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인간은   소멸할 때까지 이런 시간을 되풀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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