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 이반 트루게네프

first love, 생생한 감정의 쇼윈도

by yeonjoo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이 자기 일이 아닐 땐 평범하고 일반적인 일에 불과하지만 내가 겪으면 특별한 일이 된다. 첫사랑이 특히 그렇다. 첫사랑에 빠져있을 때 누군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책에서 같은 처지의 주인공을 만난다면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되고 빠져들게 된다.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니 말이다.

첫사랑은 대문호 이반 투르게네프도 피해 갈 수 없었다. 1860년에 발표한 <첫사랑>에서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고백한다. 투르게네프는 이 작품을 두고 "창작이 아니라 나의 과거이다. 윤색하지 않은 실제 이야기"라고 말했는데, 작품으로 꼭 남겨야 했을 만큼 대작가에게도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투르게네프가 평생 사랑한 프랑스 가수 폴린 비아르도와 관계, 투르게네프가 경외하고 존경했던 아버지와의 관계가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있다


이 작품은 첫사랑을 통해 열여섯 살 소년이 겪는 아픔과 그로 인해 정신적으로 성숙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그래서 첫사랑 하면 떠오르는 보편적인 요소를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진부하거나 뻔하지만은 않다. 주인공 블라디미르가 사랑을 겪으며 경험하는 복잡한 심리가 누구나 공감할 만큼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극적인 요소(주인공의 연적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점)도 가미되어 쉽게 읽을 수 있다. 첫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절한 공감을 이미 첫사랑을 거친 이들에게는 추억 소환이 될 <첫사랑>, 거장에게는 과연 첫사랑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러시아 소설가 이반 투르게네프(1818~1883)

첫사랑에 빠지면 뚜렷한 감정 변화를 맛보게 된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할 상반되는 여러 감정을 단시간에 경험하게 된다. '진짜' 사랑을 경험했다면, 설렘, 환희, 질투, 절망, 아픔 등 여러 감정은 사랑이 끝날 무렵이면 성숙이라는 한 점으로 수렴된다. 그 이후에 하는 사랑도 이러한 감정 변화가 수반되지만, 첫사랑은 '첫'이라는 것에 방점이 있어 이러한 감정이 더 도드라지고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이다. 첫사랑의 기억 자체도 강렬하지만, 첫사랑을 겪을 때 느끼는 감정 추이는 더욱 신비스럽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온갖 생소한 감정들을 다 만나기 때문이다. 설렘, 고통의 감정을 설명할 땐 한 문장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만, 실제로 그 감정을 느끼면 그 뉘앙스를 달리하며 시시각각 얼마나 미묘하게 변화해 가는가.

투르게네프가 평생 사랑한 프랑스 가수 폴리나 비아르도

주인공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의 대상인 '지나이다'라는 존재에 빠져든다. 하지만 영민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십 대 소년 블라디미르는 첫사랑을 통해 느껴지는 생경하고 가슴 떨리는 느낌 또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처음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지나이다의 관심을 끌어보려 애쓰지만 지나이다는 블라디미르보다 다섯 살 연상인데다 사랑하는 사람까지 있어 블라디미르를 그저 귀여운 남동생쯤으로 여긴다. 블라디미르는 이에 절망하고 연적을 죽이려고 칼까지 빼든 질투의 화신이 되기도 한다.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를 향해 느껴지는 수많은 감정을 분리하지 못하고 그 원인을 모른 채 아프고 처연하게 그러나 아름답게 '느낄' 뿐이다. 자기가 느끼는 모든 것을 뭉뚱그려 '지나이다'라고 생각한다. 또 혼란 속에 빠져있는 자신을 제삼자가 보듯 그 상황 자체를 인식하며 쓰디쓴 느낌 자체에 흠뻑 젖어들기도 한다. 이루어질 확률 제로에 가까운 첫사랑은 나를 고통 속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나의 세계에 새로운 자국이 하나 생기는 계기가 된다. 달에 착륙한 암스트롱의 발자국처럼. 아픈 감정 자체가 나를 아프게 하지만 블라디미르처럼 감정 자체에 빠져 경이로움을 느끼고 또 간직하길 원한다.


태양과 바람은 그 앙상한 나뭇가지를 조용히 움직였고 바람을 타고 날아온 돈스코이 수도원의 종소리는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고 있노라면 어떤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 속엔 기쁨, 슬픔, 미래에 대한 예감과 희망, 삶의 공포 같은 것들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그때 그런 것들을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내 맘속에 들끓고 있던 그 모든 것들 단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편이 훨씬 편했다. '지나이다'라는 바로 그 이름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연적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빠지고 지나이다를 떠난다. 대학 졸업 후 성인이 된 블라디미르는 지나이다가 출산을 하다 죽었다는 소식 듣는다. 첫사랑은 타인보다 자신과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 처음 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미성숙하기도 하고 자신의 세계에서 상대를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사랑부터는 첫 실패를 기반으로 같이하는 사랑으로 타인과의 더 연결성이 커진다. 투르게네프는 이를 지나이다의 죽음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완벽하고 '리얼'한 첫사랑의 결론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만고의 진리.

여기서 중요한 것은 블라디미르가 지나이다를 향한 사랑을 접은 후 내적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향하고 있는 지나이다의 진실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평소 경외한 아버지의 사랑이 지나이다라는 것을 알고 연적에 대한 반감과 질투보다 열여섯 살의 소년의 풋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사랑의 형태를 본다. '아름답고 준엄한 미지의 얼굴' 같은 심오한 그들의 사랑은 블라디미르에게 큰 충격을 주고 어느새 성숙해져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렇게 블라디미르는 사랑의 열병을 앓고 수많은 감정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으며 내적으로 깊이 성장하게 된다.


첫사랑이라는 하나의 경험에서 파생된 전혀 생각지 못한 수많은 감정을 만나게 되고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처음' 이기에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첫사랑의 환영을 오직 한가닥 한숨과 쓸쓸한 함정 속에 묻어두려 했던 내가, 어떻게 풍요로운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Penguin Macaron Love Edition








매거진의 이전글『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 백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