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러간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을 보며

by 시골남자

저 멀리 혼주 측 접수대로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10년 전에 봤던 동생인가..?' 눈이 마주치자 나를 알아보는 듯 꾸벅 인사한다. "오셨어요" 나는 그를 마치 어제 본 것 같다. 예식장에 1시간 일찍 도착한 내게, "형만 오셨네요. 아직 아무도 안 왔어요" "오랜만이네, 응, 아무도 안 왔나?" "네" "아, 그래요" 방명록을 작성하던 중, "식권은요? 몇 분이세요?" "혼자 왔어요, 한 명" 선후배 관계였어도 오랜 세월 연락을 않고 지내다 우연히 마주치는 지인들은 어색한 존대를 하며 대화를 하곤 한다. 그 존대가 세월의 간극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기에 반말을 하다가도 좀 아닌가 싶어 다시 존대를 번복하곤 했다.

도착 후 30분 정도 지났을까, 축가를 부르기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거의 다 왔으니 가서 보자 내게 말한다. 연이어 고등학교 동창들이 하나 둘 오기 시작했다. "어이!" "오, 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한 두 마디 건네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친구들의 모습은 그때와 크게 변한 것이 없다. 다른 것은 단지 그들 옆에 나란히 서있는 집사람과 아이들 뿐. 오랜 시간 몸을 담고 있던 회사 사람들을 우연히 마주치기라도 하면 "변한 게 없네, 어떻게 하나도 변한 게 없냐. 똑같네"라고 말하는 것이 일상적인 대화였는데, 나는 그 소리를 예식장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보며 똑같이 하고 있다. 친구 중 제일 먼저 결혼한 녀석은 딸이 둘 있고 이미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라고 했다. 친구는 변한 것이 없었지만 그 친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변했다. 친구를 에워싸고 있는 또 다른 존재들이 그의 시간이 흘러왔음을, 지금도 흘러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간간이 연락하고 지낸 친구는 별 말이 없어도, 5년, 6년, 길게는 10년 이상 연락이 안 된 친구들은 "넌 결혼했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린다. 보통 그 한 마디가 대화의 시작이었다. "응, 아직 안 했어" "아, 정말?" "응, 근데 결혼할 거야. 결혼할 생각 있어" 요즘은 그래도 사회적 인식이 바뀌어 그런지 내 나이에 결혼을 안 하고 있는 것이 무슨 하자라도 있는 듯한 표정을 짓진 않는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럼 만나 사람은 있어?"라고 물었을 때,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이곤 했는데. "그래, 뭐 천천히 가도 괜찮지 요즘은"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다 결혼하기 힘들어 질지 모른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이번 결혼식에서는 "만나는 사람이 있고, 결혼할 예정이다"라고 물어볼 때마다 대답했다. 그러면 눈이 동그랗게 변하면서 "아,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질문하지 않는다. 가끔씩 드는 생각이지만 사람들은 좋은 건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좋지 않거나 흥미가 생기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싶어 하는 것만 같았다. 남 잘되는 건 배 아파서 더 알고 싶어 하지 않지만, 남이 안되고 평범하지 않은 인생의 행로를 걷는 건 흥미로운 듯이.

"애기 너무 귀엽게 컸다, 너 이제 완전 아버지 다 됐네. 듬직해 보여" ".... 애 키우는 거 힘들어" 친구 중 한 명이 옅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육아에 조금 지쳐 보이는 친구, 이미 아이들이 훌쩍 커버려 "사춘기가 왔어.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고 난리법석이야 벌써부터" 말하며 절레절레하는 이, 애 엄마가 애들 넷을 봐야 해서 혼자 왔다는 친구,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한 건지 둘이 사는 친구, 한 번 다녀온 친구, 몇 번 만난 탓에 아이들끼리 서로 친한 듯 왁자지껄 떠드는 광경.. 그런 모습들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봤다. 난 평소에 결혼하는 친구들을 보거나 누군가가 잘 되는 모습을 보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꼈고 늘 그런 모습을 영화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나도 저런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저런 고민을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나는 타인의 인생을 관람객처럼 구경했고 내 삶에 그런 순간은 언제쯤 찾아올까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25년에 들어서야 이젠 나도 관람객에서 주연 배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예식장 바닥 한 곳을 멍하니 응시했다. 결혼식 단상을 바라보며 그 위에 서 있는 나, 그리고 지금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상상을 했다.

"하객 분들, 이제 입장해 주세요" 하며 안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약속한 듯, 벽 쪽 의자에 나란히 앉아 결혼하는 친구를 바라봤다. 혼인 서약, 축가, 양가 부모님 인사를 하는 동안 내 친구와, 친구 와이프 모습에 나 자신과 지금의 내 사람이 겹쳐 보였고, 양가 부모님 자리에는 우리 부모님이 앉아 계시는 걸 상상했다.

친구 어머님 몸이 조금 불편해 보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안아주던 친구는 애써 밝은 척하며 웃음을 지었지만 끝내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가에 눈물이 고였지만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다. 부모님을 안아드리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애써 마음을 강하게 먹으며 '아니야, 난 울지 않아'라고 생각하지만 가슴이 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남 일이라 생각하던 것이 내 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롯된 감정일까. 어느 때보다 마음 한편이 뜨거웠다.

주례와 격려의 말이 생략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2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식은 끝이 났다. 과거에는 1시간 이상 진행되거나 총 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결혼식도 봐 왔지만, 요즘은 결혼식도 짧게 하는 추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하객들 입장에서는 간소한 결혼식이 좋을 터였다. 가정이 있는 친구들이 많으니 친구가 배려한 걸까.

친구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결혼은 했지만 혼자 온 친구들, 와이프와 아이들을 데려 온 친구들, 테이블을 따로 잡고.

식사를 하며 최근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 깊은 대화가 오갔고,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우리는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건넸다. 늦은 밤까지 모여 신나게 이야기하고 술도 마시며 축하하던 뒤풀이는 없었다. "다음은 누구 차례지?" 하며 말을 건넨 친구에게 "나 아니면, ○○ 아닐까?" "그렇지?" "응, 좋은 소식 전해줄게" 회답했고 우리는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문득 시간이 흘렀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몇 년 전에 샀던 옷을 입어볼 때, 예전에 좋아하던 일을 해보려 할 때, 카메라나 거울에 우연히 비친 내 모습을 바라봤을 때, 그리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바라볼 때. 자주 입던 정장이 내 몸에 맞지 않고, 과거 꽤 잘했다고 생각하던 운동을 하려는데 기본을 하는 것도 힘들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유연함은 온 데 간데없고 뻣뻣하다. 길을 걷다 우연히 본 거울 너머 흐릿한 주름과 피곤한 기색이 보일 때면 애써 외면하며, 속으로는 '아 나이가 들었나, 체력이 떨어졌나' 하는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엄습한다. 아무 음식이나 먹어도 괜찮던 속이 이젠 몸에서 잘 받지 않는지, 몸에 좋지 않은 건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속이 편한 것이 제일이라며 주변 사람에게 떠든다. 운동을 하면 유지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드라마틱한 변화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늘 변화를 꿈꾸며 이것저것 배워왔다 생각했고, 시간이 흐르면 변할 거라 생각했지만 나는 늘 그대로였다. 외적인 건 크게 변하는 것이 없고 생각만 변했던 것 같다. 생각이 변했다 느껴지더라도 아주 잠시뿐,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오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보며 변하는 건 오직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존재가 내 옆에 자리하거나, 나를 채우고 있던 물건이 사라지고 새것으로 채워지고, 쓸데없는 취미나 습관이 떨어져 나가고 바른생활양식이 생겨나는 정도. 지인들을 오랜만에 만나도 막상 대화를 나눠보면 내가 알던 사람 그대로인 경우가 많았다. 상대가 너무 변해있을까 봐 두려움 비슷한 것이 생긴 적도 많지만 막상 연락해 보면 똑같은 경우가 많아 이젠 그런 생각은 잘하지 않는다. 좋은 직업을 갖게 되면, 성공하면 사람이 변한다며 미디어에서 자극을 그렇게 줘도 내 친구들은 그런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그때의 모습을 서로 기억하며 어색하지 않도록, 그때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그런 의미라면 나도 기꺼이 그러고 싶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무언의 약속을 한 듯이. 그때의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를 기억하고 싶어서 말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건 아름다우면서도 참 슬픈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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