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동초

단발머리 여자아이

by 시골남자

구름한점 없는 파란 하늘 위로 종소리가 메아리 치듯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운동장 위로 보이는 돌맹이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바닥을 툭툭 차며 걸었다. 흙먼지가 일어나 내 신발과 바지 무릎 밑단까지 덮었고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무심결에 침을 뱉었는데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에 침이 내 웃옷 위에 안착했다.

병신.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에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고학년이다.

뭘 봐?

무서웠다. 고개를 돌려 나는 수돗가로 향했다.

내가 뱉은 침은 어찌나 질긴지, 가래가 섞여있는 건지 몰라도 잘 닦이질 않았다.

씨...

야! 초각! 초각아!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니 동네 태권도장에 다니는 2년 선배 혁승이 형이다.

네?

너 오늘 겨루기 나랑 하자, 5시까지 도장으로 와!

...

싫어?

...싫어요

나도 싫어. 5시까지 와, 사범님한테 그렇게 말해놓을 거야!

자기보다 맨날 약한 사람 하고 대련이나 하려고 하고, 나빴어

간다, 초각아! 이따 보자

혁승이 형은 항상 나를 겨루기 상대로 삼았다. 체구가 작은 아이들만 골라서 겨루기를 하려고 하다보니 저학년 친구들은 그 형을 무서워했다. 다른 아이들이 요령껏 핑계를 대는 바람에 항상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사람은 나였다.

침을 닦아내느라 물기에 젖은 옷을 양손으로 쥐고 쭉 짜냈다. 물 몇 방울이 톡, 톡 떨어졌다. 옷을 바르게 펴보지만 구김이 잘 가시지 않는다.


둥글고 길게 생긴 타원형의 돌로 둘러싼 화단 안에 인동초가 만개했다. 그 주변에는 꿀벌과 꽃등애가 날아다녔다. 따뜻한 공기를 느끼면서 걷고 있는데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인동초를 하나씩 따서 쪽쪽 빨아먹고 있었다. 입을 계속 오물거리며 눈을 감았다 가늘게 떴다 하고 있는 한 여자아이. 인동초 꽃잎 안에는 벌이 좋아하는 달달한 꿀이 들어있어 쉬는 시간이면 아이들은 꽃등애를 잡거나 그 꿀을 빨아먹고 교실로 다시 들어가곤 했다. 선생님은 그런 광경을 보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다. 아이들은 등교할 때도 꿀을 빨아 먹었다. 초각은 쉬는 시간이 끝나지 않는데도 들어가지 않는 단발머리 여자아이를 보며 말을 걸었다.

야.

....

야, 수업 시작해 이제.

말을 걸어도 계속 입맛을 다시며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는 여자아이.

야 곧 수업시작한다니까.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제야 입을 오물거리면서 화단에서 나오는 여자 아이. 그리고는 양손을 툭툭치며 손에 묻어있는 꽃가루를 털어냈다.

근데 너는 왜 안들어가?

어... 어? 나도 들어갈 거야.

그래, 안녕.

무슨 이런 애가 다 있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옆에 사람이 불러도 대답도 없는 특이한 아이였다.

꿀이 그렇게 맛있나?


나는 서둘러 복도 1층으로 뛰어갔다. 하얀색 실내화 주머니에 흙먼지가 묻은 운동화를 넣고 하얀색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나는 실내화 가방을 꼭 쥐고 복도를 따라 미끄러지듯 교실로 향했다. 교실에 도착하자 얇은 돋보기 안경을 쓴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초각이 빨리빨리 다녀야지요. 앞으로 나오세요.

선생님은 나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먹을 천천히 말기 시작했다.

내가... 선물을 줘야겠어요.

...아, 아. 죄송해요 선생.. 읏!

결혼 반지였을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손에 반지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더ㅗ로 큰 금반지를 중지에 항상 끼고 계셨는데, 사각형 모양의 작은 보석이 달린 반지였다. 선물을 꿀밤 삼타였다. 둔탁한 소리가 투툭- 빡, 들리고 나면 오만상을 찌푸린 채 머리를 손으로 수차례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전체 차렷. 선생님께 경례.

안녕하세요~


우리학교는 각 반이 38명 정도, 총 4반이었다.

그리고 일반 학습 3반을 제외한 남은 한 학급은 특수반으로 20명 내외다.

공부를 못하는 친구들이 가는 반이었나.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나머지 공부를 하기 위한 반이었나. 평범한 아이들과 수업진도를 같이 나아갈 수 없는 부진한 친구들이 몇 명씩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단지 그 이유로 친구들에게 소외당하거나 무시당하곤 했다. 특수반 아이들은 문제가 있어서 그 반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수업 진도 때문이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렇게 못돼먹지 않았다. 소수의 아이들만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다. 학급반장들이 착해서 그런가 학생들 대부분이 착했다.

난 3-1반 35번, 초각이다. 내 자리는 창가 쪽 빛이 잘 드는 자리였는데 햇살이 따뜻해서 잠이 잘 오는 자리다. 수업 시간에 공부에 집중을 못할 때면 창문 밖을 바라보곤 했다.

오늘은 핵가족에 대해서 배울 거예요.

원래 오늘은 시청각 자료를 활용해서 비디오를 보기로 한 날이었는데 수업을 하겠다고 하니 아이들이 웅성거렸다. 화단 앞에서 내 엉덩이를 걷어차며 오늘 겨루기를 하자고 했던 5학년 혁승이 형이 생각나 인상을 살짝 찡그리며 교과서를 넘겼다. 그 순간 갑자기 화단 안에 있던 꽃이 생각났다.


인동초, 단발머리 여자아이.

그 때부터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기 시작했고 핵가족에 대해 말씀하시는 선생님 목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창문 밖 너머 화단에 피어있는 붉은 인동초에 눈이 갔다.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께 혼날까 교실로 빨리 들어가는데,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으며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꿀을 빨아먹고 들어가던 여자아이. 뭔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난 선생님이 시키는대로 항상 하곤 했는데, 그 아이는 그냥 말을 원래부터 안 듣는 건지 뭔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건지 궁금했다.

그 여자아이 이름은 뭘까? 다음 쉬는 시간에도 다시 나와서 꿀을 빨아 먹을까?

나는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아까 인동초가 피어있던 화단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아이들 여럿이 모여 인동초를 빨아먹고 있었지만 그 아이와 비슷하게 생긴 여자아이들만 있었을 뿐, 아까 그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없었다. 이마에 가로로 찧인 흉터가 털털해 보이는 여자아이.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한 번쯤은 마주치지 않을까 하면서 발길을 돌리는데,

야!

그 아이 목소리다.

어...어? 어!

넌 여기 왜 또 왔어?

아니, 나.. 나도 꿀 먹으러 왔는데.

여기 꿀은 이제 거의 다 먹어서 없어. 이제 저 옆에 화단으로 가야 해

...저기

응?

너 이름이 뭐야?

이름은 왜?

궁금하니까 그렇지

너 이름은 뭔데?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너 이름 얘기해 주면 그 때 얘기해 줄게

나는 초각, 초각이야

푸하하하하

왜 웃는 거야?

이름이 웃기네, 초각이 뭐야 초각이

...넌 이름이 뭔데?

난 예주

푸하하하하!

나는 일부러 더 크게 웃었다. 내 이름을 듣고 비웃다니.

어쭈, 웃어? 내 이름이 웃겨?

웃기잖아 무슨 예수도 아니고 매주도 아니고, 푸하하하

엉덩이 걷어 차여 볼래?

아니, 아니야. 그런데 너 몇 반이야?

3학년 3반이야. 넌?

그 때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아까 맞은 꿀밤이 생각났다.

난 3학년 1반이야. 나 먼저 갈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 먼발치서 다시 뒤를 돌아봤지만 그 아이는 이미 들어가고 없었다.


예주... 예주, 예주.

단발머리 여자아이의 이름은 예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