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ch Surfing_
# Prologue
하노이에는 곧 지글거리는 여름이 돌아올 예정이었고, 내 수중에는 오토바이를 중고로 판 돈과, 방을 빼고 받은 보증금까지 약 190만원이 있었다.
유럽여행을 다녀온 주변사람들에게서 그동안 나는 마드리드의 태양빛이 얼마나 따사롭고 로마의 에스프레소 향이 얼마나 깊은지 이야기를 들어 왔다. 아시아에서 놀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내게 유럽 여행은 먼 얘기처럼만 느껴졌었다.
핀란드 정부에서 블로거 및 기자를 초청하는 프로그램을 발견했던 것이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나는 ‘그냥 한 번 해 보는’ 마음가짐으로 자기소개 글을 썼고 그 과정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 합격 메일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동안 하노이는 시도때도 없이 비가 내렸고 오토바이는 말썽을 부렸으며 에어컨 없이 살 수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다음 기회에'로 시작되는 메일을 읽게 될 때쯤, 핀란드의 친구가 북유럽 여행하기에 6월은 더할나위 없다고 했을 때 나는 이미 비행기 표를 뒤지고 있었다.
방콕과 러시아를 경유하여 저렴한 비행기 표를 구한다고 해도 남는 120만원은 여행하기에 조금 빠듯한 돈이었다. 콜라 한 캔에 8000원에 달하는 악명 높은 북유럽을 여행하는 일정이라더 예산이 잡히지 않았다. 주어진 한 달이라는 기간 안에서 선물이나 사치품 구매를 제외하고 당장 급하게먹고 자는 일만 해결하면 배와 버스 등을 이용하여 맞추어 볼 수 있을 듯 했다. 내가 선택한 것은 “하룻 밤, 남는 소파에서 재워주세요”였다.
나의 한 달 간 카우치서핑 북유럽 여행은 헬싱키 공항에서 시작되었다. 같이가고 싶어하던 동생이 챙겨준 원숭이 인형과 이틀 간 공항과 비행을 반복하며 오랫만의 청량한 설렘이 시작되었다.
# 문제의 시작, 헬싱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인구는 대한민국의 1/10에 불과하다. 하드코어 배낭여행자이기에 광활한 대자연과 요즘 유행하는 스칸디나비아식 디자인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느낄 수 있을거란 기대에 부풀었다.
밤 아홉시였으나 백야 현상으로 대낮보다 더 밝았다. 차갑고 산뜻한 공기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첫 날의 카우치서핑 호스트는 패턴디자이너인 마리아였다.
구글맵으로미리 검색해 둔 경로를 따라 약 세 시간을 헤맨 끝에 그녀의 아기자기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을 잃는 것은 매번 당해도 적응이 되지 않는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장소가 북유럽이라면 그 공포는 배가 된다.
갑작스럽게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길가에 사람들이 뜸해지자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호스트가 자야 할 시간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택시를 잡았다. 문을 열었을 때 기본 요금이 이미 12유로(한 화 약 1만 5천원) 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내가 살던 곳들과는 다른 땅에 와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80cm가 넘는 큰 키에 짧은 숏커트가 잘 어울리는 그녀는 잠시 고향에 내려간 룸메이트의 침대를 카우치서퍼들에게 빌려주고 있었다. 패터니스트답게 집안은 오밀조밀 인테리어 잡지처럼 잘 꾸며져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마리아는 미술관의 새로운 시즌 작품 준비 중이었다.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며 지난 작업들을 보여주는 그녀의 눈은 별이 박힌듯 초롱초롱했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남았어.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텐데 짐을 풀고 먼저 자도 좋아” 라며 책상 앞에 꼿꼿하게 앉은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붉게 변한 헬싱키의 하늘을 보며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때 마리아는 이미 출근을 한 뒤였고 나는 그녀가 남긴 쪽지에 따라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쳤다. 다시 헬싱키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일하는 미술관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나는 다음 일정에 따랐다.
핀란드의 두번째로 큰 도시, 탐페레로 가기 전, 먹을거리를 사러 터미널 내부의 마트에 들렀다. 예산이 매우 빠듯했기에 하루 식비는 10유로이내로 다소 팍팍하게 책정되었다. 1유로를 내고 딱딱한 빵 두 덩이를 샀다. 커피를 못 마시는게 못내 아쉬웠지만 알뜰하게 여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한 편으로는 뿌듯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5분 전,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공중 화장실을 찾았다.
점심식사의 두 배에 해당하는 2유로를 내고 이용하는 화장실이었다. 급하게 돈 봉투를 꺼내 화장실을 이용한 뒤 부랴부랴 버스에 탑승했다.
탐페레로 가는 길은 대자연 그 자체였고 널찍한 들판이 한없이 이어져내 마음도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하룻동안 본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는 자연 속에 있는 도시이자 도시속에 있는 자연이었다. 조금만 걷다 보면 바다가 나오고 건물을 돌면 울창한 숲길과 호수가 보인다.
자작나무 숲과 파란 하늘, 조각 구름, 반짝이는 호수를 지나 탐페레 역에 내려 마중나온 언니를 만났다. 버스 이용권부터 끊으려는데, 아차. 환전해서 봉투에 넣어 둔 전부는 헬싱키 버스터미널 변기 위에 그대로.
#2. 반토막
총 120만원의 예산에서 분실한 돈은 500유로(한화 60만원)이었다. 가진 돈의 딱 반이 사라진 뒤였다. 아찔하고 막막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일단 남은 돈을 몽땅 환전했다. 가지고있던 파운드화와 달러화가 유로로 돌아왔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행이란 근본적으로 피곤한 것이며 쌓여가는 피로감과 늘어가는 분실물로 비참함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라 하였다.
핀란드 태생으로 피겨스케이팅 청소년 국가대표였던 Henna 언니는 부상으로 관광학이라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고 한국으로 교환학생을 왔었다. 전국대회에 함께 출전하게 된 우리는 전략상 체급 조절이라는 벽에 부딪혀있었다. 언니는 급하게 5kg를 찌워야했고 나는 6kg를 감량해야했다. 고통받는 서로를 부러워하는 묘한 사이로 우리는 친해졌다.
지난 이야기들을 나누며 언니 집을 구경하는 동안 신선한 채소가 올라간 핀란드식 샌드위치를 준비되었다. 내가 여행을 온다고 했을 때부터 온갖 자료와 코스를 나보다 더 신나서 준비해 주던 언니는 내가 먹기를 마치자마자 저녁의 스케줄을 읊기 시작했다.
언니가 좋아하는 펍에서 코미디 쇼를 보며 핀란드 맥주 Lonkero를 맛 보았다. 달콤하고 세지 않아서 홀짝홀짝 마시기 좋았는데 막상 다른 나라에서 찾으려니 쉽게 볼 수 없는 술이었다. 핀란드에 간다면 꼭 마트나 펍에서 롱진이라고도 불리우는 Lonkero를 도전해보길 추천한다. 해가 지지 않아 자정임에도 낮술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여름에는 73일간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51일간 해가 뜨지 않는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 소파에 누워서야 피곤이 사르르 몰려오며 혹시나 누군가 내 봉투를 주워서 보관하고 있진 않을까 기대하며 잠에 들었다.
#3
하루를 핀란드에서보내면서 신기했던 것들.
- 모든 집과 건물 앞에 발을 털고 들어갈 수 있는 솔이 설치되어 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용도도 짐작 못했는데 핀란드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한다.
- 인건비가 비싼 핀란드에서는 마트의 과일, 채소 코너나 정육 코너에서도 모두 셀프 서비스다. 신선고에서 직접 고르고 무게를 재고 포장하여 계산 스티커를 붙인다. 마지막에 계산을 할 때도 바코드를 기계에 찍고 카드를 긁어 스스로 계산하고 담아간다.
- 추운 나라여서 뜨거운 음식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찬 음식을 많이 먹는다. 생야채와 생 햄을올린 샌드위치나 구운 야채를 차가운 면에 얹어 먹는 스파게티나 아침 식사로 먹는 오트밀 죽인 puuro에시원한 과일잼을 얹어 먹는 등.
#4 사우나와 베이킹
빵 속에 밥을 채워 만든 까르얄란삐야까로 아침을 먹고 호밀로 만들어 진흙같은 생김새를 가진 디저트인 맘미(mammi)를 맛보았다. 전통 음식들을 모두 먹이겠다는 언니의 굳은 의지로 화려하진 않지만 소박하고 건강한 핀란드의맛에 점점 매료되고 있었다.
무민 박물관에 들렀다가 시내 구경을 한 뒤 버스를 타고 언니가 예전에 공부하던 대학교에 내렸다. 기숙사 바로 옆, 파란 하늘과 잔잔한 호수 사이에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통나무로 만들어진 사우나가 있었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 사우나는 핀란드어 중에서 국제어로 쓰이는 말이다. 달궈진 돌에 물을 끼얹어 생기는 수증기를 이용한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호수에 몸을 식혔다가 100도까지 올라가는 실내 사우나에서 몸을 덥힌다. 속옷만 입고 남녀노소 용감하게 호수에 몸을 담그고 사우나에서 땀을 흘리기를 반복한다.
튼튼해 진다는 말에 나도 이를 꽉 물고 물에 들어갔다가 진이 빠지도록 사우나에서 수다를 떨었다.
집에 돌아와 샌드위치와 핫초코를 마셨다.
“해가 지지 않는 밤에는 시나몬 롤을 구워요~”라는 노랫말과 함께 언니는 직접 작성한 레시피 집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위생모자와 앞치마를 두르고 우리는 밤새 시나몬롤, 초코칩 쿠키, 망고 크림 케이크를 구워냈다.
버터와 설탕을 듬뿍 얹어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고 부드러움에 녹아내릴 정도로 크리미해야 한다고 언니는 거듭 강조했다. 깔깔 웃고 반죽하고 굽고 장식하는 동안 밖에는어두운 밤이 오는 대신 빨간 하늘이 잠시 지나갔다가 이내 다시 달콤한 향기와 함께 아침 해가 떴다.
# 탐페레 여름의 플리마켓
탐페레 주말 플리마켓을 구경하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내겐 여전히 쌀쌀한 날씨였지만, 핀란드의 여름을 즐기기 위해 탐페레 사람들은 옷장 속의 민소매를 꺼내 입고 쫀득한 아이스크림을 줄 서서 사먹었다.
나도 따라서 살미아끼(Salmiakki) 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마치 타이어처럼 검은 빛을 띈 아이스크림이 입에 넣기 전까지 못내 불안했는데 한 입 맛 보는 순간 진한 신발향과 함께 떫은 맛이 오글오글 퍼져나왔다. 감초로 만든 핀란드식 엿으로 ‘소금’이라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이어서 또 다른 진한 검정색 음식이 다가왔다. 그을린 순대같은 외모를 가진 이 음식은 탐페레식 소시지인 무스타마까라(Mustamakkra)로 북유럽에서만 나는 링곤베리 잼을 곁들여 먹는다. 까만소세지와 빨간 잼의 조화가 역시나 엽기적이었으나 의외로 맛은 좋았다. 소시지에 달콤한 잼을 찍어 먹는 발상이 신선했다.
직접 구운 베이커리와 수집품이나 헌 책을 파는 좌판과 이동식 카페의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잃어버린 봉투를 잠깐 눈 감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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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를 지나 탐페레의 명물인 퓌니키타워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기를 기다렸다가 온 보람이 느껴지는 화창한 주말 오후였다.
타워의 꼭대기에서 암벽타기와 다이빙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탐페레에는 사회로 나가기 전, 졸업식 때 이 곳에서 용기를 인증하는 전통이 있다. 언니는 전공을 바꾸느라 대학 졸업 때 이 곳에서 두 번이나 뛰어내려야했다고 한다.세상 무서울 게 없을 듯한, 태권도 종주국에서 대회 은메달을 목에 걸었던 언니가 줄을 메달고 서 있었을 생각을 하며 우리는 깔깔댔다. 좁은 계단을이용하여 꼭대기에 오르니 호수와 숲에 둘러싸인 탐페레의 경관이 한 눈에 보였다.
기념사진을 찍고 서둘러내려온 것은 우리의 목적이 애초에 뭉키(Munkki)에 있었기 때문이다. 뭉키는 핀란드식 도너츠로 바삭하게 튀겨 설탕을 묻힌 것이 우리네 옛날식 도너츠를 연상시킨다. 우유와 달걀을 넣지 않아 채식주의자나 아이들도 즐길 수 있으며 인기가 많아 그 때 그 때 갓 구워 향긋한 계피가루를 입힌 빵을 먹을 수 있다. 커피와 도넛 세트는3.8유로. 성벽 의 아늑함을 느낄 수 있는 실내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대부분이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둘러보는 동안 바로 옆 모래사장에서는 비치발리볼을, 공원에서는 반려견과 산책을 하거나 바닥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유난히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핀란드 사람들에게 6월은 너무나 소중한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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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는 분주하게 홈파티 준비를 했다. 얼마 전 결혼한 언니 집에서 여름을 맞이하여 저녁식사를 한다며 어제 만들어 둔 케이크와 과일을 포장했다. 핀란드에서만 나는 클라우드베리로 만든 잼과 구워 먹으면 요란한 소리를내는 레스빠유스또 치즈도 사 갔다. 한적한 시골길에 위치한 신혼집에 들어서자마자 각종 고기를 굽느라 분주한 부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미 테라스에는 샐러드와 접시들이 예쁘고 가지런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나도 그들을 도왔다. 양송이 버섯을 씻고 순록 고기를 넣은 버터를 버섯 안에 담은 뒤 베이컨으로 두른 뒤 호일로 감싼 뒤 고기가 구워지고 있는 오븐에 같이 넣는다. 청어조림과샐러드와 각종 닭, 소, 돼지 고기를 비롯한 고열량 버섯 그리고 샐러드를 담요를 두르고 핀란드의 여름 밤을 즐기며 맘껏 먹었다.
디저트와 함께 티타임을 즐기기전, 미리 데워둔 사우나를 이용했다. 핀란드에서는 왠만한 집에 가정용 사우나가 있다고 한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북유럽 사람들의 건축과 인테리어의 발전은 생각하는것 이상으로 깊고 넓었다.
살짝 몸을 녹인 뒤, 밤이 늦은지도 모르고 쿠키와 차를 마시며 쌍둥이 자매의 온갖 에피소드들을 깔깔대며 들었다. 내일 출근을 위하여 모두가 잠들고 나는 사각대며 일기를 썼다. 기차표를 확인한 뒤 일주일간의 탐페레를 떠날 준비를 했다. 핀란드에서 두 번째로 오래 된 도시인 투르쿠를 거쳐 다시 헬싱키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자연과 함께 그 속에서 느긋하게 생각하고 천천히 걷고 건강하게 먹고 큰 소리로 웃는 핀란드의 여름이 시작되는 6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