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서핑(2)

Couch Surfing

by 조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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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여정지는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이자 200년 전 수도였던 투르쿠(Turku)다. 주말 오후에는 그 어떤 가게도 열지 않는다며 언니가 잔뜩 챙겨준 간식을 우물거리며 기차를 탔다. 강 건너로 보이는 투르쿠 대성당을 따라 미리 연락해 두었던 카우치서핑 호스트 집을 찾아갔다. 해가 지지 않는 저녁시간의 고즈넉함과 오래된 건물들이 잘 어울리는 도시였다.사진을 찍는 일을 하고 가끔 드럼도 치는 오늘의 집주인은 Jaakonmaki.

어깨까지 기른 곱슬곱슬한 머리가 그를 더욱 예술적으로 보이게 했다. 핀란드의 첫인상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서로 찍은 사진을 스크린으로 구경하며 피자를 먹었다. 이야깃거리가 떨어져 어색해질 때 쯤 그는 남은 피자를 박스 째로 맥주와 가져와 영화를 보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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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찍은 사진이 곳곳에 걸려있고 카메라 렌즈와 드럼스틱이 여기저기 널부러진 공간에서 빵빵한 음향을 즐기며 낯선 친구와 보는 영화는 생각보다 편안했다. 오래된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치우지 않은 저녁거리와 함께 자는 것도 역시나 포근했고 여독을 풀기엔 충분했다. 아침 일찍, 그에게 줄 사진 엽서를 남기고 짐을 챙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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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한 가운데 핀란드의 대표 패스트푸드점 Hersburger , 헤르스부르거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치즈와 매운 소스가 들어간 메뉴와 함께 커피를 한 잔 주문했다. 누가봐도 여행객임을 알 수 있는 몸집 만한 가방에 햄버거 사진을 연신 찍어대는 나를 보더니 집시들이 몰려왔다. 유럽 여행 이야기에 빠지지 않던 그녀들이기에 “음식을 사 먹게 돈을 줘. 넌 돈이 많아서 관광을 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돈을 나눠줘.” 라며 다가오는데도 마냥 호기심에 눈을 반짝였다.

말도 안되는 논리와 화려한 언변과 손짓에 더불어 두꺼운 옷에서 풍기던 찌든 냄새에 조금 어지러워질 때 쯤, 내 지갑에 슥 손을 올리는 어린 소녀 집시가 포착되었다. 벌떡 일어나 당장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순간 뒷주머니의 돈 봉투를 슥 하고 도둑맞았다. 헬싱키 버스터미널에 두고 온 반 재산 이후 남은 돈의 전부이기에나는 필사적이었다. 그리 멀리까지 가지 못한 집시를 잡고 봉투를 돌려받았다. “내가 배고프다고 이미 얘기했는데 네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잖아”라고 말하는 뻔뻔스러운 그녀의 변명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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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시내에는 선데이마켓을 위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꽃과 식료품을 판매하고 있었고 그릇과 그림 또는 인형을 파는 트럭도 있었다. 야외의 간이 테이블에서 조간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주변으로 아이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나와 같이 배낭을 앞 뒤로 맨 배낭여행족도 씩씩하게 종종걸음으로 걸어다녔고 나는 짐을 다시 한 번 꽁꽁 챙겨보는 것으로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흐린 날씨에 비까지 내리자 몸이 으슬으슬 추워져서 나는 어제 봐 뒀던 투르쿠 도서관으로 일단 피신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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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유리로 되어 빛이 그대로 들어오는 구조의 도서관은 내부로 들어가니 생각보다 더 규모가 있었다. 뽀송뽀송한 쿠션을 가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영어로 쓰여진 만화책을 한 권 집어 읽었다. 자전거를 타고 유럽 일주를 한 부부 이야기가 귀엽게 그려져 있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이 생각났다. 나의 첫 유럽여행은 잘생긴 남자와의 썸도 없고,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밥 한 끼 먹을 돈도 없었다. 하노이에서 출발한 탓에 변변한 겨울 옷도 없이 추우면 추운대로 오들오들 떨었고, 숙소도 없어 매일 다른 호스트를 찾아다녀야했다. 그러나 또 멀리서 바라보자면 일 년 중 손 꼽히는좋은 날씨에 아름다운 북유럽 풍경을 구경하고 있었고, 매일 밤 새로운 친구들에게 메세지를 보내면서 매순간 그들의 친절에 감동 받을 수 있었다. 쌀국수와 반미로 축적해 온 두툼한 몸 덕에 약간의 쌀쌀함도 청량한 날씨 정도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딱딱한 책걸상이 아닌 책을 읽는 사람들에 따라 다른 도서관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노트북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와 스탠드가 있는 넓은 책상이 있는가하면, 커피콩 볶아지는 냄새가 가득한 카페에는 생화가 꽂힌 화분이 놓여져 있었다. 허리를 있는 힘껏 재껴서 늘어지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소파도 있었고, 나 혼자만의 세계를 즐길 수 있도록 유리공 모양의 공중 의자도 있었다. 그림 전시회와 아이들 놀이방도 있었고 우산과 휠체어 등을 대여해주는 곳도 있었다. 다양한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책 읽기가 자연스러워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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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조금 개는 듯 하여 밖으로 나왔다. 핀란드의 가장 큰 세 도시인 헬싱키, 탐페레, 투르쿠를 둘러 보는 동안 느낀 것은 대자연과 어우러진 도시 속에서 모두가 소박하게 먹고 천천히 걸으며 살고있다는 것이었다. 조금만 걷다 보면 바다가 나오고 건물을 끼고 돌면 울창한 숲과 호수가 보인다. 핀란드 전역에는 울창한 자작나무 숲과 무려 18만개가 넘는 호수가 있다. 자전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자유로워 보였다. 한참 그들을 따라 투르쿠를 걸어서 구경하는데 다시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해,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라떼를 주문하자 갓 내린 에스프레소를 담은 컵에 스팀을 친 우유피처를 픽업대까지 가지고 나와 즉석에서 라떼아트를 해 주었다. 소중하게 커피를 안아 들고 자리에 앉자 각자 오후 시간을즐기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몰래 그들을 구경하고 고소한 라떼를 홀짝대며 카우치서핑 사이트를 켰다. 지난 밤, 진심을 담아 보낸 메세지에 대한 답장들이 와 있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가끔은 한국에 관심이 많은 사람까지, 당장은 여건이 안되어 잠자리를 제공할 수 없지만 하루쯤 만나 저녁식사를 하자고 친절한 답장이 와 있었다. 사실 대부분의 메세지에는이미 카우치서퍼가 구해졌다거나, 다른 곳에 와 있다거나 또는 아예 답장이 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따뜻한 몇 개의 글에도 하노이에서 온 가난한 여행자는 큰 감사함과 힘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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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고 돌아온 헬싱키는 밝았지만 시간은 이미 밤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의 호스트는 알토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있는 두 여학생이었다. 디자이너 알바 알토는 유로화를 쓰기 전, 핀란드 지폐에 등장했을 정도로 존경 받는 건축가이다. 왕이나 대통령을 지폐에 쓰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면 핀란드 사람들이집과 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실용적이며 아름답다고 평가되는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 전 세계에서 사랑받는 이유도 더불어 떠올리게 되었다. 긴 겨울을 지내야 하는 기후의 특성과 산과 호수 사이에 고립된 지리적 위치를 극복하기 위하여 빛의 투과가 많은 유리 소재 제품과 우울해 질 수 있는 환경 속에서 활력소를 찾기 위해 화려하고 밝은 색감의 바닥용 카페트와 가구를 들여 놓는다. 실내 건축을 공부하는 동생이 그토록 유학하고 싶어하던 대학교 학생들을 만날 수 있어 설렜다.

메세지로 열 줄이 넘게 설명해 준 탓에 비교적 힘을 덜 들이고 그들이 사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기쁘게 나를 맞이해 주었고 두껍게 썬 까망베르 치즈와 뜨겁게 구워낸 바게트를 내 주었다. 네덜란드 산 딸기를 씻어서 테이블에 올리면서 그래도 베리 종류 과일은 핀란드 산이 맛있다며 이내 자연스럽게 수다가 이어진다. 카우치 서핑 사이트의 Riesu는 그들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의 이름이었고,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말썽꾸러기 요정 피브스의 핀란드식 이름이었다. 어렸을 때 활동적이던 모습에 붙였으나, 어느 덧 10년 간 호스트와 함께하며 요조숙녀가 다 된 예쁜 강아지였다. 여행만큼이나 카우치서핑을 좋아한다는 그녀들은 그동안 호스트들이 두고 간 이야기들을 나와 기꺼이 나누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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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방으로 들어온 비둘기가 이틀동안 지내다 간 이야기, 늦가을이 되면 익어서 숙성되기 시작한 열매를 따먹고 새들이 비틀비틀 날아다니는 이야기, 과하게 즐거운 캐나다 남자가 프로 설거지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일주일씩 여러번 묵고 갔던 이야기, 지난 주에 자고 간 호스트의 초대로 내일 스톡홀름으로 떠나는 데 어떤 전통음식을 요리해 줘야 하는 지에 대한 소소한 고민까지 그 날 밤은 풍성했다.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교를 수료한 뒤 이력서를 서른 곳 넘게 냈는데 겨우 두 군데에서 면접 연락이 왔고 결국은 다 떨어져 버린 뒤, 지금은 공사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한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도 취업난이 심각하다고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 순간 내 대답을 막은 것은 보람찬 일을 구하게 되어 기쁘고 매일 새벽 네 시반에 출근하는 것이 재밌다는 그녀의 씩씩한 이야기였다. 이어 화장실을 찾는 내게 “Door with the Barbie(바비가 있는 문)”에서 씻고“Door with the Gandalf(간달프가 그려진 문)”에서자면 된다고 싱글거리며 대답을 해 주었다. 그제서야 둘러보니 모든 문과 벽에 잡지에서 오려낸 유쾌한 만화나 사진이 붙어있는 주인을 꼭 닮은 귀여운 집이었다. 아침에 냉장고를 여니 꼭 먹고 나가라고 사둔 요거트 옆에는 미니언 피규어가 깜찍하게 세워져 있었다. 물과 요거트 그리고 케찹이 전부인 텅 빈 냉장고였지만, 카우치서퍼에게 아침을 챙겨주는 마음이 한없이 고마웠다.한국에서나, 베트남에서나 심지어 먼 헬싱키 땅에서도 동갑내기들의 청춘은 그래도 응원해주고 싶은 정겨움이 있었다. 돈을 잃어버리고 카우치서핑을 하게 된 것이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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