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ie #4 - 가죽 디자이너, 남승민
현실감 떨어지는 짙은 파란 빛과 하염없이 선한 초록빛이 어우러진 연화도. 짙은 초록의 파타고니아 바람막이와 새로 구매한 남색 배낭을 맨, 숏비니가 보기 좋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났다. 평화로운 봄 날씨의 정석과도 같았던 이 날은 인터뷰이인 '빛 좋은 개살구'와 완벽한 컬레버래이션을 이루었다. 심한 비유인 것 같아 미안하니까 변명을 하자면 풍성하게 기른 수염은 왠지 그가 믿음직스러운 사람일거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때로, 종종, 자주 가벼움을 뽐낸다. 개털이다. 그럴 때마저도 투명하게 속이 비치는 그의 회색 눈동자는 신비롭고 믿음직스럽다. 가죽 공부를 하겠다고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의 외모는 이미 가죽 장인의 것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단순하다. 가죽을 생각하겠다고 다짐한 이후 힘겨워했지만 결코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결정했으니까 하는 거다. 낮에는 회사를 다니고 밤에는 가죽을 오리고 꿰매고 한다. 그와 친구가 되면 그는 끝까지 당신을 믿어줄 것이다. 서운하면 속으로 욕은 할지라도 그는 친구라 생각하는 사람 옆에 서 있을 사람이다. 친구니까. 어쩌다보니 투잡인 시리즈 두 번째를 맞이하게 되었다. 도쿄(외곽)에서 온 디자인 엔지니어이자 가죽 디자이너인 남승민을 만나보았다.
자신을 여덟 단어로 소개한다면?
A. 발악하는 인간실격
그건 여덟 글자 잖아
A. 그냥 해. 여덟 글자로.
이유는?
A. 조서형이 선물한 책 <인간 실격>을 읽으며 공감한 점이 많았다.
이 세상에 누구 하나 꾸며지지 않은 사람이 없고 나도 결국은 꾸며진 거짓의 사람이지만, 그러나 늘 진실되고자 노력은 해 본다. 진짜이고 싶어 발악하는 인간실격이다 나는.
Q. 요새 가장 큰 관심사는?
A. 다음 작업할 것에 대해 생각한다. 물건을 볼 때, 만든 사람이 어떻게 생각했고, 어떤 의도로 디자인 했고,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한다. 내 가장 큰 관심사라 할 수 있다. 또한 동유모 사이트에서 입시 미술을 수업을 하는 곳을 알게 되었는데, 드로잉 기본부터 배워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디자인 엔지니어로써 공부하고 일해 온 나는 2D든 3D든 컴퓨터를 이용해 만드는 건 문제가 없는데, 왠지 성에 안 찬다. 손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Q. 일주일 일과가 궁금하다. 현재 두 가지의 일을 하고 있는데, 간단히 소개한다면?
A. 일주일 일과라 해봤자 거의 반복적이다.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한다. 씻고 준비하고 40분에는 나와야 여덟시 반 까지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 굴려 도착한다. 나는 도쿄 근처의 이바라키라는 곳에 위치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 평화로운 도시다. 나는 자동차 안전벨트 부품 및 기타 안전 장치에 관한 일을 하고 있다. '디자인 엔지니어'라는 직업이다. 야근이 많다. 거의 매일 8시 - 9시가 되어야 퇴근을 한다. 10시가 넘어서 겨우 나오는 날도 많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에 온다. 너무 허기진 날에는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같은 걸 사 먹는다. 집에 돌아오면 그림 도안을 그리거나, 디자인 관련 영상을 보거나, 바느질 등을 하며 평일을 보낸다. 토요일 아침엔 도쿄의 코엔지라는 동네의 공방에 간다. 늦게까지 가죽 수업을 듣는다. 일요일에는 주로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다음 작업을 생각한다.
Q. 투 잡이 힘들지는 않은지?
A. 하나는 돈이 안되는 일인데, 투잡이라 칭해줘서 고맙다. 힘들기보다 즐거운 마음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았기에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죽 재료비를 위한 돈을 벌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있다. 회사 생활이 힘들긴 하지만 다니며 느끼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생각의 전환도 되고 두 가지 일을 하는 게 실제로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Q. 퇴근하고 혼자 마시는 술 맛은 어떤가?
A. 원래 술을 좋아했다. 근데 집에서 혼자 소주 먹기에는 좀 궁상맞더라. 그래서 요즘은 보드카를 즐겨 마신다. 매일은 아니지만 머리가 복잡하거나 갈피가 잡히지 않을 때, 음악을 틀어놓고 술을 마신다. 솔직히 술 맛은 그저 그렇다. 그냥 습관인 거 같다.
Q. 일본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해 달라. 일본이란 본인에게 어떤 나라인가?
A. 역사적인 관점에 있어서 가깝게 느낄 수 없었던 건 사실이다. 여전히 같은 생각이다. 해외 생활이 처음이라 막연한 것도 있었고, 적응하는 과정에서도 힘들었다. 차별도 당하고, 말을 못 알아들어서 혼나고, 또 차별 당하고, 회사에서 잘리기도 했다. 오래 사귄 여자친구랑 헤어지기도 하고. 한국에서 지냈으면 못 느껴보았을 것들을 차근차근 느낄 수 있었다. 일본 생활을 통해 많이 성숙해졌다고 느낀다. 정든 친구들을 떠났지만 새로운 땅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Q. 왠지 모르게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 같은게 느껴지는데, 본인이 생각하는 ‘멋’이란 어떤 것인가?
A.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자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일을 하는 것, 그게 가장 멋있다. 그게 진짜 멋이라고 생각한다. 수염이든 옷이든 (그는 벙거지 모자에 심플한 옷차림을 즐겨한다.)
Q. ‘허세’란?
A. 그냥 남이 하니까 따라하는 것.
Q. 가죽 냄새가 좋아서 가죽을 하게 된 걸로 아는데, 좋아하는 가죽 냄새에 대해 설명을 해 준다면?
A. 특별한 이유는 없다. 자연의 냄새를 다 좋아한다. 보는 것, 듣는 것, 맡는 것 과 같은 감각들이 인간에게 주어진 좋은 선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감각들에서 파생되는 좋은 아이디어들이 참 많다. 음악을 들으면 떠오르는 책, 책을 읽다보면 잘 어울릴 것 같은 장소 같은 걸 금방 연상해낸다. 나는 조금 예민한 사람이라 더 많은 게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항상 더 만지고 더 듣고 더 맡으며 살려고 한다. 변태는 아니다.
Q. 어떤 가죽 제품이 만들고 싶은가? 다음 작품에 대한 계획도 좋고 궁극적인 계획에 대한 이야기도 좋다.
A. 사실 특별히 가죽으로만 제품을 만들 생각은 없다. 나무, 캔버스, 울 등 여러 소재를 다루어 보고싶다. 화려하지 않아도 항상 제자리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수행하는 물건들이 있지 않은가. 늘 제자리의 책상, 의자 또는 매일 들고 다니는 가방, 지갑 같은 것 들 말이다. 나는 그런 일상 제품을 실용성 있게 디자인하고 만들고자 한다. 시간이 지나도 항상 그 자리에 있어주는 그런 것들을 말이다.
Q. 요새 개인적으로 진행중인 혹은 계획중인 꿍꿍이가 있는가?
A. 무엇을 더 열심히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항상 한다. 계획 중인 꿍꿍이라면 핸드 스케치, 즉 드로잉을 배우려하고 있고,포트폴리오 제작 중이며 여름을 앞두고 다이어트를 좀 할 생각이다.
Q. 어떤 가죽쟁이가 되고 싶은가?
A. 디자인적인 전체적인 틀을 알고 더 공부하는 사람이고 싶다. 가죽쟁이라기 보다 디자이너가 더 맞는 단어 선택일 듯 하다. 처음 가죽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는 누군가를 가르치면서, 또는 공방을 운영하면서 밥벌이를 하게 되지는 않을 거란 걸 알았다. 그보다 내가 원하는 뚜렷한 목표가 있기에, 그것에 초점을 맞추자 생각했다. 물론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는 가죽쟁이는 아니다. 나는 목표 없는 디자이너다. 그렇게 살고 싶다.
Q. 남승민의 세계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나?
A. 낭만이 있었다. 텐트와 친구 그리고 맛있는 음식과 술이 있었으면 좋겠다.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좋았던 기억을 사진에 담고, 그 사진 속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담겼으면 좋겠다. 아. 갑자기 생각난 건데,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다. 예순 살까지 매 달 한 통의 필름을 사용하여 사진을 찍는 거다. 그 중에서 한 달에 한 장씩만 골라서 일 년에 열 두 장, 육십 살 까지 몇 장이냐. 아무튼 그렇다. 질문이 뭐였냐.
Q. 인생 전체에 대해 어떤 모략을 가지고 있는가?
A. 사실 난 그런거 잘모른다. 그냥 주어진 시간에 열심히 고민하고, 작업하고 결과물이 나왔을 때 실컷 감상하고 만족한다. 죽을 때 까지 좋은 친구가 몇명 있었으면 좋을 거 같긴 하다. 계획이 없고 별로 세우고 싶지도 않다. 내겐 현재 하는 일이 우선이다. 그것에 충실하고 싶다. 모략이건 책략이건 그런 건 어려운 일을 덜 겪고 조금이라도 쉬운 길을 찾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 걷다보면 언젠가 도달할 거라 생각해서 별로 계획이고 모략이고 없는 편이다.
Q. 남승민이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A. 밖에서는 항상 밝고 긍정적인 사람이다. 혼자 있을 때는 자주 가라 앉는다. 왜 그렇게 밖에 하지 못했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갇힌다.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많이 하는 편이다. 중학교 때까지 농구 선수로 코트를 뛰었다. 시합이 끝나면 '왜 잘하지 못했을까, 왜 거기서 그렇게 했을까' 한참을 곱씹었다. 하지만 그렇게 더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책이 길었던 날엔 다음 날 아침 일찍 나와 운동을 했고 내 스트레스는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줬다.
Q. 남승민이 사랑하는 ‘아날로그’는?
A. 아날로그라는 말에 의미는 잘 모르겠다. 손 때 묻은, 오래된, 불편한 옛 것을 좋아하는 것은 맞다. 필름을 좋아하는 이유도 같다. 디지털은 시간이 흐르면 손이 잘 가지 않게 되고, 컴퓨터가 고장 나면 사진은 없어져 버린다. 인화한 사진은 없어지지 않는다. 사람에게 추억이란 정말 좋은 친구지 않은가.
인화한 사진이 없어지면 똑같은 거 아닌가?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A. 큼...!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을 쓰다 보면 이걸 쓰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때 묻은 이야기를 상상하고 냄새를 맡게 된다. 난 어른들께 매우 깍듯하고 예의 바르다. 나보다 앞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배우고 닮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Q. 커피도 드립으로 내려 먹는 걸로 안다. 드립 커피 얘기를 한다면?
A. 커피를 좋아한다. 자동차가 가솔린이 필요하고, 가끔 불스원샷을 줘야한다면, 나는 밥을 먹고 커피를 마셔줘야 한다.
Q. 추천해주는 노래가 거의 매번 데미안 라이스다. 그의 노래를 듣는 사람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도 있는 듯 하다. 그의 음악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A. 내가 처음 데미안 라이스 노래를 들은 것은 중2병을 앓던 중학교 2학년 때 였다. 가족이 경제적으로 좀 기울었을 때라 누나랑 어머니랑 셋이 원룸에 살았었다. 어머니는 자주 라디오를 틀어 두신 채 집안일을 하셨는데,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즐겨 들으셨다. 어느 날 Demian Rice - The Blower's daughter 라는 노래가 흘러나오는데, 순간 마음이 징-하고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잔잔해지면서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데미안 라이스 음악을 들어야한다. 우울하지만 정말 좋은 음악적 영감을 준다.
Q. 데미안 라이스라는 가수의 음악이 생소할 사람들에게 몇 곡 추천한다면?
A. 나는 깡촌에 있는 대안학교를 다녔다. 논을 넘어 다니며 음악을 자주 들었는데, 당시 나의 236MB 용량의 소니 mp3 속에는 딱 100곡이 들어갔다. 그 중의 1/5인 20곡이 데미안 라이스의 곡이었다. 당시에는 영어를 더 못했는데 하도 들어서 가사를 다 외워버렸다. The Blower's daughter, Elephant, 9 Crimes, Delicate 이 곡들을 꼭 들어보길 추천한다.
'노력','열심히','최선'같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초등학생 때 일기나 반성문에 하도 적어대서 시들시들해진 그런 단어들이었다. 놀랍게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 단어들은 반짝반짝거리며 특별한 힘을 발휘했다. 그의 노력은 부담스럽고 억지스럽지 않아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었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도쿄의 시부야에서였다. 그 날 우리는 지난 24년을 다 쏟아낼 듯 아침부터 밤까지 장소를 옮겨다니며 수다를 떨었다. 그러고도 평일엔 가끔 도쿄역에서, 여느 토요일엔 코엔지에서 만났다. 시덥잖은 얘기부터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큰 개념의 것들까지 이야기를 했다. 분명 늘 이야기를 했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런 그의 진짜 이야기는 알지 못하던 것이었다. 혜민 스님의 문구를 습관처럼 인용한다. 촐싹대는 사투리로 다 잘 될 거고 때가 있다는 둥 무게 실리지 않은 위로를 내민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생겼다고 기뻐했으나 결코 서두르거나 조바심내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지만, 묘하게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한 이 친구가 흔쾌히 나누어준 이야기를 나는 오래 곱씹었다. 이 인터뷰를 쓰기 까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담백한 그의 인생을 꼼꼼히 씹다 보니 씁쓸한 단맛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한 달간 자주 인터뷰에 추가했으면 하는 사진과 내용을 보내주었지만 나는 연화도에서 나눈 이야기만을 담기로 했다. 남승민 인터뷰 2부를 위한 큰 그림이랄까.
어쨌든 그는 앞으로도 묵묵히 걸을 것이다. 새로운 아침이 풍기는 날씨가, 새로운 장소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새로 알게 된 여자가 그를 수시로 흔들겠지만, 그럴 때 마저 그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닥을 차고 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