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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Apr 05. 2020

미래라면 토씨 하나 알 수 없어

책<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와 드라마<로맨스는 별책부록>

그런 때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이름을 써서 박스에 넣었는데, 사회자가 내 이름을 끄집어내고, 사회자가 어떤 번호를 큰 소리로 외치면 내 손에서 그 번호가 나오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던 때. 그다지 원하지 않던 경품이었지만 아무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은 좋았다. 

누군가는 “운 좋은 사람이 따로 있어. 내가 넌 계속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했었던 거 알지? 역시!”라며 흥분된 얼굴로 설명했고 또 누군가는 “이런 사사로운 데다 운을 다 써버려서 네가 정작 중요할 때 쓸 운이 없나봐.”라고 했다. 내게 일어난 일과 들은 이야기를 내려놓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 답이 나오길 기대하며 곱씹었다. 그리고 뜻밖에 내가 운이 있거나 없는 게 아니라 애초에 운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전부터 내내 “제가 인복이 있어서”, “내가 운 좋게”처럼 ‘운’을 앞세운 문장에 흥미가 없었던 건 사실이다. 


백수가 되어 집에서 동생이 만들어 준 달고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던 날


생각해 볼 문제는 또 있었다. 그 무렵 내가 ‘또’ 회사를 박차고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패기 넘치게 쓴 문장과는 다르게 나는 머쓱하게 퇴사 의지를 전하고, 주섬주섬 짐을 싸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해야 했다. 다시 백수가 된 것이다. 서른 살 즈음이 되면 살아온 데이터를 바탕으로 사람을 보는 눈이나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어느 정도 생기게 될 줄만 알았다. 그동안 삶의 오류를 바탕으로 어떤 법칙같은 게 생길 때가 되지 않았던가? 대체 난 어떻게 살았길래 ‘감’도 ‘센스’도 전혀 생기지 않은걸까?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한 잡지 인터뷰에서 ‘요즘엔 일보다는 삶, 전체보다는 나, 남는 사람보단 떠나는 사람이 쿨하다고 여겨지는 시대다. 그럴수록 묵묵히 자리 자리를 지키며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진짜 멋지고 핫하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보고 박수를 쳤던 나다. 나는 이 일을 좋아하니까, 잡지를 만드는 시간이 소중하니까 어떤 말도 안되는 일이 있더라도 함부로 박차고 나가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애석하게도 고민의 날은 빨리도 왔다. 

퇴사를 결정한 다음 같이 일하던 사람들은 말했다. 잘 될 거라고. 내가 마음없이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이 업계 몇 년차인데 일하는 거 딱 보면 그 사람을 알 수가 있다고. 또는 내가 좀 특별하게 촉이 좋다고. 정말 위안이 되고 고마운 말들이었지만, 코로나 사태까지 더해져 결국 나는 세 달을 놀았다. 막판엔 면접까지 죄다 미뤄졌다. 아니 어쩌면 잘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구직 활동에 패배했다는 생각이 드는 날엔 혼자서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책 만드는 일을 떠올리며 기운을 북돋을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패션 잡지, 만화 잡지 등 잡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과한 설정에 눈을 흘기면서도 꾸역꾸역 봤고 분명 효과는 있었다. 더 이상 볼 수 있는 잡지 배경 드라마가 없게 되자 출판사 이야기가 나오는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을 정주행했다. 


“지치지 말자 강단이. 손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웃지 않으면 다가올 어둠이 두려워서. 있는 힘껏 햇살을 끌어 모았다.”

- 드라마 <별책부록> 중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강단이에게. 너와 함께한 지 벌써 37년이나 흘렀어. 그런데 나는 아직 너를 몰라. 그래서 너를 지금부터 알아가보려고 해. 그동안 많이 애썼어, 단이야. 업신여겨서 미안하고 함부로 취급해서 미안해. 그리고 주눅들게 해서 미안해. 너무 부려 먹어서 정말 미안해. 힘들었을거야. 울고 싶었을 거고 그래도 웃으면서 잘 견뎠어. 정말 고생했어 단이야. 그러니까 이제부터 행복하게 살아봐. 어제는 이제 잊어버리고 오늘을 살아. 날마다 앞만 보고 살아. 네가 하고 싶은 게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다시 찾아봐. 꼭 그렇게 해 강단이. 다시 한 번 파이팅! 지치지말고 파이팅! 끝까지 파이팅!”

- 드라마 <별책부록> 중




주인공 강단이는 고스펙의 소유자지만 결혼과 육아를 거치는 동안 경력이 단절되었다. 알아서 문을 박차고 나오던 나와는 다른 이유를 가진 그녀지만 나는 잘도 공감했다. 백 번의 면접을 거치고도 강단이에게는 일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나 역시 오래, 열심히, 즐겁게 일 할 수 있을만한 회사를 미리 맞춰보려 나름의 촉을 세웠다. 나는 그동안 어림잡아 50번의 면접을 보았다. (12살에 교환학생 면접을 시작으로 시도때도 없이 문이란 문은 두들겨대느라 그랬다.) 면접관과의 대화가 잘 통했음에도 업무는 지독했을 때도 있었고, 톡 쏘는 말투로 내내 공격적이었다거나 연봉을 얘기를 절대 하려 하지 않는 등 이상한 면접을 보고 들어간 회사에서는 꽤나 재미있기도 했다. 뭔들 미리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웠고, 내가 앞으로도 미래를 전혀 알 수 없을 거란 사실이 무서웠으며, 그동안 어렴풋하게라도 인생을 예측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우스웠다. 그 와중에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대학교 졸업부터 회사에 다녔던 일까지 모두 이력에서 지우고 고졸채용에 합격한다. 이력을 속이는 일이지만 그녀의 마음은 정말 그 간의 스펙을 모두 잊고 새로 해 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자신의 특별한 점을 한 가지 말해보세요.”

“전 특별하진 않습니다. 저 혼자 모든 걸 할 수 없다는 거, 그리고 제가 부족하다는 거 아는 나이입니다. 그렇기에 어떤 일이 주어져도 감사히,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드라마 <별책부록> 중


“인정하기로 했다. 세상은 바뀌었고 나만 멈춰 있었다. 

힘들다고 생각하며 살림하고, 애를 키우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한테 주어진 몫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었다.” - 드라마 <별책부록> 중


“시키는 일만 하면 제가 이 회사에서 성장할 수 없잖아요. 저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에는 도전해보고 싶어요.”- 드라마 <별책부록> 중


“다시 시작한다. 빛이 나지 않더라도 나한테 주어진 일부터. 다시 일을 배운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일부터.” - 드라마 <별책부록> 중


촘촘히 살아왔는데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듬성듬성 살면서도 잘만 앞서나가는 듯한 친구를 보며 조바심 내기도 했을 것이다. 운이 따라주지 않는 걸 변명 삼았을지도 모른다. 드라마에서 귀여운 로맨스보다도 으리으리한 사무실보다도 눈여겨 보고 애써 마음에 챙겨 담은 것은 주인공 강단이의 단단한 겸손함이었다. 그녀는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자신의 노력만 애틋하게 여기지 않았다. 억울하다며 실패를 붙들고 늘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무조건 잘 될 거라며 알 수 없는 긍정의 힘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그동안 내가 본 운 좋은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그들에겐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실패라 볼 수 있었을 무수한 일을 담담히 계속 밟고 건너왔던 것이다. 


성공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앞날은 알 수 없는 것이란 불확실성과 불안을 안고도 계속 걸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난 믿을 수 없을 땐 지체 않고 뱉어버렸던 게 사실이다. 큰 위험을 피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성과로 남을 수 있었을 일도 함께 내팽개쳐졌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수려한 글빨(?)까지 갖춘 김영민 교수님의 글은 추석에 친구의 추천을 받은 이후로 틈틈히 챙겨 읽고 있었다. (그의 글 중 가장 인기있는 칼럼으로 추석을 배경으로 한 것이 있다.) 얼마든지 뻔뻔하게 단언을 해도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에 고개를 주억거릴 것 같은데 대신 그는 한 발 뒤로 물러선다. 그렇게 생각할 뿐 너도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건 아니라는 식이다. 



만만하지 않은 상대를 애써 예측하고 통제하려다 보면 과도하게 진이 빠지기 십상입니다. 진이 빠지면 다른 일에 집중력이 떨어져서 정작 더 중요한 일(이를테면 ‘미래’가 아닌 ‘현재’)에 소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생에는 굴곡이 많아서 자신이 장차 지도자가 될지 안될지 우리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중략) 그리고 지도자라는 자리가 꼭 좋은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책임이 따릅니다. 책임은 대개 무겁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고 있다 보면 힘이 듭니다. 오랫동안 힘든 상태가 지속되면 우울해집니다. 우울한 나머지 책임을 다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뿐 아니라 일을 너무 잘해도 사람들이 시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소위 지도자의 영광에는 이렇게 힘든 면이 함께 합니다. 그렇다면 아시아미래지도자포럼이란, 미래에 꼭 지도자가 되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가진 이들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어쩌다보니 미래에 지도자가 되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크게 당황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모임을 뜻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해 꼭 동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P.85


인간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보다 큰 어떤 것이 아닐까. 그 큰 어떤 것을 끝내 온전히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 알 수 없는 운명이 궁금하여 점을 치고 신의 가호를 얻기 위해 기도한다. P.166


저는 차라리 불확실성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그나마 큰 고통없이 살아가기를 원해요. P.340


책을 출판하면 독자들이 너무 그럴싸한 메시지를 책에서 읽어낼까 두렵습니다. 전 인생의 확고한 의미에 대해서 설파하는 책이나 한국을 부흥시킬 분명한 청사진을 제시하는 책이나 인류문명 방향에 대해 확실한 예측을 하는 책 따위는 읽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않아요. 저는 많은 것들에 확신이 없지만, 특히 그런 책들의 주장에는 확신이 없거든요. (작가의 말)

- 책<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중


봄이 오면 으레 가족들의 사주를 보곤 하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그러니까 이걸 조심하라더라. 이렇게 하면 잘 풀린다더라는 이야기 뒤에 “엄마가 육십년을 살아보니 세상이 좀 보이더라. 그러니 더 오래 산 엄마 말 들어”라 덧붙였다. 미래가 보이는데 돈을 내고 사주를 보시냐며 킥킥대다 문득 청개구리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엥? 사람들이 하는 말 그렇게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없네.’ 이렇게 된 거 아무 얘기에도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해골물이라도 내가 꿀떡꿀떡 시원하게 들이키면 꿀맛인 것이었다. 


당장 보이지 않는 결과물에 안달할 필요는 없다. 내가 어떤 운을 가지고 있는지 내 결말을 미리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걸 참 길을 돌아돌아 이제서야 깨우친 건가 싶지만 이제서야 묵묵히 내 운을 도와줄 준비가 된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또 한바탕 나와 남에게 눈을 흘겨가며 백수 생활을 지냈으니 다음 번 직장에선 진득한 면모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확언은 할 수 없지만.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

16부작

편성: tvN

연출: 이정효

극본: 정현정














책<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어크로스 출판사 

저자: 김영민

출판일: 2018.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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