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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형 May 29. 2020

엄마, 왜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와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전 밥 생각이 없어서요. 먼저 먹고 와요” 아침을 두둑하게 먹어 점심을 먹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날이었다. 동료들에게 생긋 웃어보이며 식사를 거르고 노래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 문득 어른이 된 뿌듯함이 몰려왔다. 엄마와 할머니 손에 번갈아가며 자란 나는 ‘너 밥 먹이느라 내가 늙었다’는 둘의 푸념을 아직도 가끔 듣곤 한다. 미안하지만 나 역시 밥 먹는 일은 힘들었다. 아무리 씹어도 질겨지기만 하는 반찬을 입에 물고 있으면 당장 삼키라는 호령이 떨어지기도 했고, 밥을 남기면 밥상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도 많았다. 밥을 다 먹기 전에는 아이스크림이나 젤리 같은 간식은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런 내게 드디어 먹기 싫은 끼니는 얼마든지 거슬러도 되는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더 이상 종소리를 듣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책상에 앉아 책을 펴지 않아도 되었고, 정해준 옷차림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하고 싶은 일을 고민하고 회사를 골라 출근을 한다. 심지어 출근 시간까지 스스로 정할 수 있게 되었다. 어른이 된 나는 아무에게나 함부로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좋은 일이 생겼다고 아무때나 엉덩이 춤을 추지도 않고, 언짢아지면 아무데서나 울면서 드러눕지도 않는다. 나는 어느덧 잘 자라 성인이 되었구나! 어른이 된 나는 나보다 큰 사람에 의해 강제로 어떤 일을 하지 않게 되었다. 식사 시간을 제때 챙기지 않거나 늦은 밤까지 넷플릭스를 봐도 책임은 어차피 온전한 내 몫이니까.

    그래서 내 몫을 잘 하고 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머뭇거릴 것 같다. 입 안에 머문 답은 결국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나의 20대는 머뭇거리지 않고 도전하는 일에 쏟았다. 그러다 내게 가치가 있는 일을 찾게 될 거라 믿었다. 어느 날 돌아보니 되는대로 들쑤시다가 ‘어, 나랑 안 맞는 일이야’라며 내팽개친 일이 수북히 쌓였다. 성실하게 한 일이라곤 나이를 먹는 것뿐이었다. ‘나랑은 안 맞는 일’ 목록이 길어졌다.  사랑에 빠져 해벌쭉하다가 픽 뒤돌아서던 과거의 서형이는 오늘의 서형이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기쁨의 투스텝을 밟으며 새 회사에 출근하면서도 뭔가가 또 서형이의 비위를 거스르진 않을까 눈치가 보였다.  어느 날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려는 엄마에게 요즘 나의 상태를 고백했다. 부정적인 상상과 불안함에 잡아먹혀 자주 심장이 뛴다고. 깜짝 놀라 급하게 위로를 건네던 엄마가 멈칫 했다. “엄마가 너 키울 때, 너가 엄마 밥 먹고 엄마가 챙겨둔 옷 입고 학교 다닐 때, 사람들이 다 너 야무지고 똘똘하다고 했어. 애기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계속 그랬어. 네가 그렇게 불안하고 자신없어 한 건 엄마랑 떨어져 살면서 그런 것 같아. 스스로 잘 챙겨봐. "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엄마 얘기는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그 무렵 서점에 서서 한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쓴 소설로 문학동네 신인상까지  탄 작가였다. 그는 매일 밤 야식을 먹기 시작하면서 몸무게가 세 자리 수가 되었는데, 퇴근 후 헬스장을 다니고 저녁을 가볍게 먹으며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다. 

   


   자제해야지, 오늘 밤은 기필코 굶고 자야지, 마음 먹어본다. 하지만 애써 눈을 감아도 허한 느낌 때문에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 허기를 달래줄 간단한 견과류나 따뜻한 우유 혹은 삶은 달걀을 섭취하면 된다고? 나라고 안 해봤겠는가. 아몬드 열 주먹을 입안에 쑤셔 넣는다고 한들 산불처럼 번지는 이 허기를 해소할 수는 없다. 결국 나는 핸드폰을 들어 배달 앱을 켜고 만다. 오늘의 메뉴는 순살 반반 치킨.
  -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중
   근데 왜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을 빼면 괜찮을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걸까. 도대체 그 뚫린 입을 함부로 나불거릴 권한을 누가 부여해주는 걸까? 정부가? 매체가? 어쩌면 한없이 고도비만해 보이는 자들보다는 비교적 ‘정상 체중’에 가까운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기들이 가진 한 줌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중



   그런 그에게 직장 상사가 준 다이어트 티는,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위로는 상처가 됐다. 건강과 자기관리를 앞세운 애인의 잔소리 역시 마음에 씁쓸하게 남았다. 그럴수록 야식을 참는 일을 실패했을 때, 운동을 빼먹었을 때 더 크게 자책했다. 또 실패의 압박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노력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아주 사소한 일을 처리하는 것 조차 버거운 현실을 살고 있었고, 한 치 앞의 미래도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목표나 꿈은 커녕 얼른 침대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에 바빴다.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나 유튜브를 보다가 기절하듯 잠들어 다시는 깨어나고싶지 않다, 뭐 그런 생각들. 분리수거를 하거나 밀린 설거지를 하는 일, 빨래를 하는 일이 언제부터인가 너무나도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중 


 나는 이제 더 이상 거창한 꿈과 목표를, 희망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내 삶이 어떤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내가 감각하고 있는 현실의 연속이라 여기기로 했다. 현실이 현실을 살게하고, 하루가 또 하루를 버티게 만들기도 한다. 설사 오늘 밤도 굶고 자지는 못할지언정, 그런다고 나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붙이는 일은 이제 그만두려한다. 다만 내게 주어진 하루를 그저 하루만큼 온전히 살아냈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이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당신, 어떤 방식으로든 지금 이 순간을 버티고 있는 당신은 누가 뭐라해도 위대하며 박수받아 마땅한 존재다.  
-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중 


   작가는 인생의 주기에 따라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과업들을 성취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고 돌이켜본다. 발생하는 감정의 부산물과 신체적 피로를 못본 척하며, 속도와 달려온 거리가 자기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었다고 말한다.  무겁게 성실한 작가가 사실 나는 엄청 나태하다는 이야기를 고백하는 이 책은 그러니까 우리는 내일도 하루를 살아나가기 위해 자신을 돌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마무리 된다. 나도 어렵게 구한 출근길을 꼭 계속 해나가야 했기에, 엄마의 말은 더 이상 곱씹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이야기 중 하나는 그렇게 분명히 마음 속에서 사그라든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엄마를 생각할 때면 가족이란 관계가 가진 어려움을 실감하며 발을 동동 구르게 되었다.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가족을 말하는 영화다. 바짝 말라붙어 뾰족해져 있던 내게 따뜻한 가족애를 속삭이기보다 찬 물을 흠뻑 끼얹어준 영화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본론부터 내민다. 바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테드 크레이머에게 그의 아내 조애너 크레이머는 짐을 챙겨 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영화는 각자의 사연과 사정 그리고 가정 문제가 얽혀 상처를 입히고 그를 회복하며 성장하는 등장 인물을 보여준다.  육아 경험이 없는 테드에게 어린 아들 빌리는 부담이다. 아침 식사는 허둥지둥, 회사 업무는 뒤죽박죽에, 엄마를 보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을 훈육하는 모습도 엉망진창이다. 서툰 아빠는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너 몇 학년이니?" 묻기도 한다.  

서운했던 걸 한 번에 얘기하며 쏘아붙이던 날,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두 다 처음이잖아. 그러니 좀 봐 줘라." 모자란 딸은 말싸움도 싫고 잘못을 인정하기도 싫은거냐며 계속해서 시비를 걸어댔었다. 마음의 서랍 속에 담아 독을 품고 있던 엄마의 말들을 꺼냈다. 더 강력한 독이 완성되면 그 때 비장의 무기처럼 꺼내 놓을 작정이었다. 엄마가 얼마나 잘못했는지 논리적으로 구구절절 늘어놓아야지. 내가 이겨야지.   어설프던 테드는 어느덧 빌리의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고, 아침을 그럴듯하게 차려낸다. 엄마가 떠난 게 자기 탓이냐고 묻는 아이에게 '그건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아빠 탓이야. 엄마는 여전히 빌리를 사랑해.'라 답할 줄 아는 아빠가 된다.   


   "빌리, 엄마가 떠난 이유는 아주 오랫동안 아빠가 엄마를 아빠가 바라는 엄마로 강요해서야. 그런데 엄마는 그럴 수 없었어. (I think the reason why mommy left was because for a long time I kept trying to make her be a certain kind of person. A certain kind of wife that I thought she was supposed to be. And she just wasn't like that.)"
-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중
    "나는 좋은 부모가 뭔지 많이 생각해봤어요. 일관성과 참을성을 가져야 하고요.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고, 듣는 척이라도요. 아내가 말한 사랑도요. 전 사람들이 어떤 근거로 여자가 남자보다 우위에 있다는지 모르겠어요."
-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중 

   이혼을 앞두고 양육권을 다투는 과정은 치열하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이전과 달라진 두 크레이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영화의 중요한 포인트다. 자존감이 떨어져 아이에게 악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다는 조애너의 속마음을 듣던 테드는 이제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다. 빌리를 돌보며 일을 하느라 혼비백산하던 지난 날 테드의 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막장드라마 대사를 닮은 대화를 언제까지 해야하나 조바심냈다. 또 가끔은 엄마는 틀렸고 나는 맞다고 말하고 싶어하기도 했다. 찬찬히 살아내면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내게도 엄마를 이기려는 마음 대신 이해하고 눈물 지을 날이 분명 올 것이다. 







영화<크레이머대크레이머>

개봉일: 1980. 9.12 

105분

미국

감독: 로버트 벤튼

책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한겨레출판사

저자: 박상영

출판일: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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