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두기의 사랑
1965년 제미니 4호 우주선은 타이탄 로켓과 [1]랑데부(rendezvous)에 실패했다. 로켓과 만나기 위해 연료를 후방으로 분사하자, 우주선의 궤도가 바깥쪽으로 돌아 타이탄 로켓과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가까워지려 할수록 멀어지는 우주의 궤도는, 전쟁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신짜오 신짜오]의 방식과 닮아있다.
[신짜오, 신짜오]는 독일에서 시작한다. 독일에 사는 한국과 베트남 가족. 분단과 전쟁이 떠오르는 공간과 사람들 속에서 최은영은 고통과 상처를 말한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언어로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언어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 규격화되어야 하지만, 상처는 규격화되지 않는 감각질(qualia)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언어로 담기기 위해 잘려나가는 덩어리의 고통들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는 고통의 문학에서 최은영은 무엇을 말하고자 할까? 타인의 고통에 가까워지려 할수록, 고통에서 멀어지는 랑데부적 문학의 한계는 무한적일까? 문학으로는 타인의 고통에 닿을 수 없는 것일까?
30년의 시차 사이에서 서로 다른 고통의 감각은 '나'와 '투이'의 가족들을 "안전하게" 갈라놓는다. "우리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다는 '나'의 발화는 응웬 아줌마를 '구역질나는 학살'의 공간이자, "상상할 수 없는" 공간으로 내몬다. 여기서 '나'의 얼굴은 2차 세계대전을 배우던 교실의 교사와 반장의 순진무구한 얼굴과 다르지 않다. '나'와 '투이', 그리고 선생님과 반장이 있는 교실에서 전쟁은 누군가의 삶을 통과하는 실체적 사건이 아닌, 죽은 미군과 베트남인의 숫자를 통해 "미국 입장에서는 아무런 득도 보지 못한 전쟁" 이라는 결론이 가능한 이론적 지식이다. 그러나 투이가 받아들이는 전쟁은, 교실에서 말해지는 전쟁과 다르다. 투이는 전쟁을 통해 가족과 마을을 잃었던 사람의 가족이다. 투이에게 전쟁이란 '200만 명의 죽음'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투이와 그의 가족들에게 전쟁은 죽음에 가까워지는 삶을 피부로 통각하는 실체적 사건이다. 투이에게 전쟁 속에서 [2] 사는 일은 거대한 장례식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투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있을까? 적어도 교실에서의 '나'는 투이의 고통에 닿은 듯 보인다. '나'는 "투이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런 게 아니었" 다고 말하며, 투이의 마음을 짐작해 "독일 애들에게 희미한 분노" 마저 느낀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나'의 가족들은 투이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자명하고 간단한 진실이 새어나올 때, '나'와 투이의 가족들은 갈라진다. '나'의 삼촌은 베트남 전쟁에서 참전한 용병이다. '나'의 삼촌은 전쟁의 피해자이면서, 아이와 노인을 학살한 한국군이기도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교차적인 공간 위에서 삼촌의 동생인 아버지는 외면하기를 택하며, "이미 끝난 일"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베트남 전쟁은 가족을 잃은 슬픈 사건임과 동시에, 끝난 일이다. 그러나 응웬 아줌마에게 전쟁은 '상상할 수 없는 공간과 시간' 속으로 회귀하게 하는 현재적 사건이다. 30년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와 응웬의 전쟁에 대한 낙차는 깊어진 것이다. 물론 아버지와 '나'의 입장은 동등하지 않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 기에, 알고 있으면서 외면하는 아버지와 다르다. 그러나 '나'의 무지가 투이의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나'는 응웬 집의 서재에 들어가지만, 그들의 사진을 외면한다. 재가 든 향로와, 흑백사진이 무엇인지 묻고 싶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묻지 못한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표현된 '나'의 무지는, 보다 적극적인 종류인 것이다 '나'의 무지는 투이의 고통보다 아버지의 외면에 더 가까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처음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문학은 고통을 위로할 수 없다고 결론내려야 할까?
[3]아우슈비츠 이후의 서정시는 야만이라는 아도르노의 말처럼, 전쟁 이후의 삶의 고통을 문학으로 위로하는 일은 기만인 것일까? '나'는 결코 투이를 이해할 수 없을 까?
[신짜오, 신짜오]는 전쟁에서 비롯한 역사적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거시적 관계 아래에 놓여진 미시적 관계를 뛰어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우울하고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으로 이해됐으며, 그것은 사회에서 "영리하지 못"한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응웬 아줌마는 엄마의 예민한 기질을 "섬세함과 특별한 정서적 능력"으로 받아들인다. 엄마와 응웬 아줌마의 우정은 불가역적인전쟁의 상처로 인해 무너졌지만, 엄마와 '나'는 관계를 복원하고자 한다. "손이 빨개질 때까지 뜨개질"을 하는 엄마의 속죄는 '나'가 투이에게 서투르게 건넨 사과와 다르지 않다. '나'와 '엄마'는 결코 투이의 가족들이 겪은 전쟁의 상처를 알 수 없다. 투이의 가족들이 겪은 전쟁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통각을 동반한뚜렷한 감각이다. '나'의 사과는 아버지의 외면임과 동시에, 어머니의 속죄이다. 응웬 아줌마의 생각처럼 "어차피 이해하지 못할" 것에 대한 사과. '나'의 사과는 몰이해에 대한 자기반성이다.
그러나 '나'가 투이를 위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투이의 고통에 대한 전지적인 이해가 아니다. 타인을 전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의 사랑이지, 인간의 사랑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은 자신이 타인의 고통을 전적으로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타인의 고통에 조금씩 연루되는 것이다. 타인과 일체되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에서 벗어나, 타인과의 거리를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 [4] 우리는 같지 않기에 사랑할 수 있다. 인간의 사랑이 [5]고통스러운것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서 온다.
고통을 말할수록 고통에서 멀어지는 문학의 운명은, 사랑하는 대상과 일체되고자 하지만, 일체될 수 없는 사랑의 역설과 다름 아니다. 최은영은 사랑과 문학의 모순과 실패를, 위로와 연대를 위한 토대로 내세운다. 문학의 운명이 실패일지라도, 최은영은 시시포스적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는 실패로 쌓인토대 위에서 최은영은 닿을 수 없지만 가까워지는 인간을 바라 본다.
[1]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이 공간에서 만나는 것. 출처 : 지식백과
[2] 한강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中 '회상'
[3] 테오드로 W. 아도르노, 홍승용 역, 문학동네 - [프리즘 - 문화 비평과 사회]
[4]"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일 수 있는거지? 그 착각이 지금의 우리를 이렇게 형편없는 사람들로 만들었는
지 몰라요" - 2017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中 최은영 - [그 여름] 235p 문학동네
[5]
"사랑하는 것은 아프다. 그것은 당신의 피부가 벗겨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든 당신의 피부를 가지고 떠날 수 있음을 아는 것이다."
"It hurts to love. It's like giving yourself to be flayed and knowing that at any moment the other person may just walk off with your skin."
- Sosan Sontag, Reborn : Journals and Notebooks, 1947-19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