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라 부활 프로젝트 1탄
‘휠라’를 돌아보며
요즘 패션 시장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휠라’를 꼽을 수 있다. 코트디럭스에서 레이, 디스럽터까지 신발 부문에서 연달아 히트 상품을 내놓으며 유명세를 탔고 고샤르브친스키를 비롯해 메로나, 펩시, 추파춥스, 배틀그라운드, 최근의 우왁굳까지 다양한 콜래보레이션을 발표하며 10대들의 워너비 브랜드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우왁굳의 경우 출시 하루 전부터 소비자들이 길게 줄을 서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휠라’는 몇 년 전까지 속된 말로 ‘아저씨 추리닝’ 브랜드로 취급받았다. 이 보다 몇 년 전에는 조폭 바지, 혹은 양아치 바지 등으로도 유명했다. 이런 브랜드가 10대들의 워너비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사실 몇 년 전 ‘휠라’가 리뉴얼을 위해 삼성의 인맥과 정구호 디렉터를 데려왔을 때에도 리뉴얼의 성공을 믿지 못했다. 사람 몇 명을 교체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봤기 때문이다. 그 동안 쌓여온, 요즘말로 적폐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요즘 ‘휠라’가 부활에 성공하자 여러 사람들이 그 이유를 분석하고 있지만 일부는 맞고 일부는 터무니없는 내용이 포함됐다. 그래서 20여년 동안 가까운 거리에서 ‘휠라’과 휠라맨들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부활의 성공 포인트를 짚어본다. 글의 내용은 성공의 희열을 시작으로 아픔을 뚫고 글로벌 브랜드를 인수한 휠라와 승자의 저주로 불안한 휠라를 정리한다. 어쩌면 부활의 핵심인 읍참마속과 청출어람이라는 사자성어를 사용할 수도 있을 듯하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휠라의 과거를 돌아보자. 우선 ‘휠라’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의 비엘라에서 니트와 언더웨어를 만들던 fila 삼형제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태양과 포도주, 그리고 예술을 독특한 컬러 감각(이것이 휠라를 상징하는 컬러가 됐다)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태리의 지역 브랜드였던 ‘휠라’는 1972년 자동차 기업은 피아트로 인수되며 스포츠 브랜드로 발돋움한다. 특히 1970년대 중반 테니스 스타 비와론 보그에 의해 테니스를 기반으로 한 유러피안 스포츠 브랜드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된다. 이후 1980년대 화승에서 신발 수출 임원으로 근무했던 윤윤수 회장이 ‘휠라’에 스포츠 슈즈를 제안하며 패션 스포츠 브랜드에서 정통 스포츠 브랜드로 도약한다.
이런 휠라와 윤윤수 회장의 인연 때문에 1991년 한국에 진출하고 이듬해 국내 영업을 시작한다. ‘휠라’는 런칭 첫 해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는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90년대 초반 이른바 패션 스포츠로 분류되는 ‘휠라’, ‘엘레쎄’가 대학생들의 워너비 아이템이었다. 기존 스포츠 브랜드와 달리 고급스러운 이미지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쨌든 ‘휠라’는 90년대 초중반 스포츠 시장은 물론 패션업계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며 스포티즘 열풍을 일으켰다. ‘나이키’, ‘아디다스’, ‘프로스펙스’, ‘르까프’ 등이 장악했던 스포츠 시장에 패션 스포츠라는 새로운 컨셉을 제안했던 것. 이 트렌드는 9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고 이후 스포츠 라이프스타일, 차브, 트렉슈트, 스트리트 등 이름을 달리하며 패션시장을 호령한다.
참고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조금 설명하면 1980년대 초반 교복 자율화로 스포츠와 캐주얼 시장이 크게 성장했는데 중고등학생들의 교복과 가방을 이들 브랜드가 대체했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국제상사(현 LS네트웍스)와 화승이 신발 수출을 바탕을 스포츠 브랜드를 런칭하거나 해외 브랜드를 도입했다. 이 두 회사는 50년대 고무신 생산을 시작으로 신발 수출, 스포츠 브랜드까지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이밖에 몇 개의 고무신 생산과 신발 수출 업체들이 있었지만 도태됐다) 국제상사는 그때까지의 수출 노하우를 바탕으로 ‘프로스펙스’를 런칭했고, 화승은 수출로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해외 브랜드를 국내 소개했다. ‘나이키’, ‘아디다스’, ‘리복’ 등 상당수의 스포츠 브랜드는 화승을 통해 국내 들어왔다.
이런 뒷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는 ‘휠라’의 성공 요인 중 초기 멤버들의 활약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초기 휠라코리아 멤버는 화승 출신들이 많았다. 특히 화승에서 다른 업체(삼라스포츠로 기억됨)로 넘어간 ‘나이키’ 출신이 많았다. 이들은 수출 담당에서 내수 담당으로 스포츠 슈즈에서 의류까지 스포츠 시장의 경험을 두루 갖췄다. 휠라 사장으로 은퇴한 이기호와 영업 담당 송이훈, 나중에 ‘이엑스알’을 런칭한 민복기 등이 나이키 출신인 것으로 알고 있다.
다시 돌아가 ‘휠라’는 런칭 초반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런칭 첫 해 30여개의 매장을 열었고 거의 매년 증자를 할 정도로 사세를 확장했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5년 동안 ‘휠라클래식’와 ‘휠라스포트’, ‘휠라인티모’, ‘휠라코스메틱’ 등으로 확장하며 스포츠 시장에서는 단숨에 선두권에 올랐고 패션 시장에서는 리딩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이런 성공 때문에 윤윤수 회장은 국내 CEO 중 연봉킹에 오르기도 했다. 당시 ‘휠라’ 매장을 여는 게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려웠는데 업계에서는 이를 빗대 매장 개설 비용을 가방에 현금을 싸들고 가도 매장을 내기 어렵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국가 부도 사태의 비상상항에서 ‘휠라’도 빗겨갈 수는 없었다. IMF 전까지 승승장구하던 ‘휠라’는 IMF와 함께 성장을 잠시 멈췄다. 특히 금 모으기와 아이들 저금통까지 털어서 국가 부도 사태를 막으려는 애국심이 ‘휠라’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한 업체가 외화가 없어 위기 상황을 맞은 상황에서 외국 기업과 브랜드를 구매하는 건 매국이라는 뉘앙스의 신문 광고를 내며 애국심 마케팅을 펼쳤는데, 그 대상이 ‘휠라’로 지목되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IMF로 인한 극심한 내수 침체와 함께 애국심 논쟁까지 겹쳐지자 휠라는 특단의 조치를 내놓는다. ‘휠라’, ‘휠라 클래식’, ‘휠라 스포트’ 3개 브랜드를 통합한 것. 이 때 100개 안팎의 대리점들이 문을 닫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IMF에서 빠른 시간 내에 벗어날 수 있는 특성을 가졌던 것처럼 휠라도 위기에서 금세 탈출했다. 사옥을 현재 위치로 옮기고(예전에 사용하던 삼영빌딩은 현재 ‘카파’ 민복기 대표가 사용하고 있다) 2000년 ‘휠라키즈’, 2001년 ‘휠라골프’를 런칭하며 재성장의 시동을 걸었다.
이렇게 차근차근 성장을 거듭하며 옛 명성을 넘어서는 순간 국내는 물론 해외 스포츠 시장을 깜짝 놀라게 할 엄청난 뉴스가 터진다. 바로 윤윤수 회장의 휠라코리아가 ‘휠라’의 한국 사업권을 인수하고 글로벌 사업권까지 확보하게 된 것이다. 2005년 한국의 영업권을 인수하고 2007년 휠라 글로벌 사업권까지 인수하며 명실상부 글로벌 기업으로 떠오른다.
하지만 명이 있으면 암이 있듯이 승승장구하던 휠라가 2010년을 전후해 흔들린다.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승자의 저주라고 이야기했다. 무리하게 글로벌 사업권을 인수하며 금융권에서 빌린 돈을 갚는데 급급해하며 미래를 준비하지 못했던 것.
to be continued
(www.fashow.co.kr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