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커일기(2021년 11월 11일 야간)

생활세계의 식어버린 오므라이스

by sposumer

11월 11일은 과자 브랜드에서 만든 ‘빼빼로의 날’이다. 눈에 보이는 편의점마다 ‘빼빼로’ 선물 세트가 가득한 날이었다. 약간 쌀쌀했지만 오후 5시 정도 저녁 배달을 시작했다. 첫 배달은 오므라이스와 김밥 두 줄이었다. 집 근처 김밥집에서 배달 음식을 픽업했고, 300m정도 떨어진 신축 빌라에 비대면으로 배달을 마쳤다. 이후에도 배달콜이 쉬지 않고 들어와서, 정신없이 배달을 하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넘었을 때쯤 전화 한 통이 왔다. 내가 요즘 제일 무서워하는 발신 번호는 1600으로 시작하는 번호이다. 배민커넥트 고객센터에서 전화가 온다는 것은 뭔가 내가 완료한 배달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고객센터와 통화를 할 때는 배달 중이라서 저녁 첫 배달 경로를 정확히 보지 못했다. 배달을 하고 배달 경로를 자세히 보니, 내 실수가 맞았다. 109동으로 가야하는 배달이 108동으로 간 것으로 GPS 상으로 확인이 된다.

내 첫 오배송이 바로 떠올랐다. 첫 오배송을 한 분식점에는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리지 못했는데, 이후에 그 분식점에서 배달 픽업을 갈때 정말 가게문 열기가 망설여졌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분식점 사장님이 수많은 배달 기사 중에 내 얼굴을 기억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나는 도둑은 아니지만 내 발이 저린 케이스였다. 실제로 그 분식점에서 다시 배달 픽업을 할 때, 분식점 사장님께서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차라리 뭐라고 한 소리를 들었으면 나았을까? 그날 내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쌀쌀해진 날씨 때문인지 배달 콜이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배달을 하면서 계속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최대한 빨리가서 사과를 하는 것으로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사실 오배송만 아니었다면 배달 300건을 달성한 저녁이라서 기분이 좋을 수도 있었는데, 이제 머리 속에는 ‘오배송’ 생각 뿐이었다. ‘신규배차’를 안받는 것으로 버튼을 누르고, 우선 108동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배달 봉지를 찾으로 가기로 했다. 하기 싫은 일이라서 정말 끝까지 여러가지 핑계가 떠올랐다. ‘108동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호출을 해야 하는데, 너무 쪽 팔리잖어’ 이런 생각까지 날 막아섰다. 하지만 분식점 오배송 때문에 불편했던 마음을 떠올리면서 108동 앞까지 갔다. 배달을 시키지도 않은 사람에게 현관문을 열어달라고 호출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뭐라고 이야기 할지도 미리 생각을 해두었다. ‘죄송합니다. 배달 기사인데 음식을 잘못 배달했습니다. 문 한 번만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쭈삣쭈삣하고 있는데, 다행이 108동 그 라인 주민이신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분이 있었다. 바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서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올라가서 보니, 배달한지 1시간 반쯤 지난 오므라이스와 김밥 두 줄이 그대로 있었다. 배달 음식 먹튀 사건도 참 많지만,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정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차가운 비닐 봉지를 배달 가방에 넣었다.

배달음식 회수는 완료! 이것도 힘들었지만 더 힘든 일이 남아있었다. 내 실수 때문에 바쁜 시간에 곤란하셨을 김밥집에 가서 사과를 드려야만 했다. 거리도 가까워서 뭐라 생각할 시간도 없이 순식간에 김밥집에 도착했다. 오후 8시, 김밥집에는 테이블이 5개 정도 있었는데 테이블 마다 손님이 앉아 있었고, 김밥집 사장님 말고도 따님으로 보이는 20대 여자분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밥집 사장님은 누가 봐도 정말 바뻐보였다. 김밥집 사장님과 눈이 마주치자 마자 ‘사장님, 죄송합니다. 아까 음식 배달을 잘못한 기사입니다.’ 사장님은 ‘어휴, 그것 때문에 바쁜데 정말…’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말끝을 흐리셨다. 죄송한 마음에 ‘제가 집이 근처인데 다음에 한 번 먹으러 오겠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따님으로 보이는 분의 눈초리가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크게 ‘죄송합니다!’를 외치고 김밥집을 나섰다. 사실 김밥집 사장님이 저 정도만 이야기 하신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예전에 배달음식 픽업을 하느라고 기다리면서, 음식점에서 오배송 관련해서 항의 전화를 받고, 배민커넥트 고객센터와 통화를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전화 통화 시간만 약 20분 정도 걸렸다. 식사 시간에 한창 바쁜데 오배송 때문에 고생을 하고 나면, 음식을 잘못 배달한 기사에게 쌍욕이 충분히 나올만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또 내가 이 쌍욕을 먹을 만한 잘못을 한 것이다.

‘배민커넥트’를 하면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인간냄새가 나는 플랫폼’이다. AI 배차 등 플랫폼에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내가 건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 이용자 입장에서 이런 점들이 개선되었으면 합니다. 건의 정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


그러나 수도관이 오염되어 있다면 아무리 수돗물이 깨끗해도 수도꼭지로 나오는 물은 더러울 수 밖에 없다. 현대사회에서는 자본축적의 논리와 정치 행정의 관료적 체계가 생활세계의 고유한 영역을 위협한다. 더구나 그런 왜곡과 갈등은 경제와 정치 분야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재생산, 사회적 통합, 사회화 등 분야에서도 광범위하게 일어난다.
<누구나 한번쯤 철학을 생각한다(남경태 지음) P 626-7중에서>


대학교 때 배운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는 이론은 대학생 때는 전혀 와닿지가 않았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사회 생활을 하면서 이 이론을 체감하면서 가끔식 생각이 날때가 있다. 나도 돈을 벌겠다는 ‘자본축적의 논리’를 따른다면 오배송이 어찌 되든 뒤처리를 하지 않고 열심히 배달만 하면 된다. 정치 행정의 관료적 체계로 볼 수 있는 배민커넥트 고객센터에서 심한 항의가 들어오면 접수된 ‘민원’처럼 해결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관료적 체계를 무척 싫어한다. ‘민원’이 접수되지 않으면 아무런 개선이 없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나는 이 플랫폼을 토대로 돈을 벌고 있지만, 원활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생활세계까지 지배하게 하고 싶지는 않다. 김밥집 사장님께는 부족하겠지만 내 진심어린 사과는 어느 정도 의사소통의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8시반쯤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오배송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전자레인지에 식어버린 오므라이스를 1분간 데워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전자레인지에 데운 오므라이스는 따뜻하고 맛이 있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내가 배달에 익숙해지면서 오배송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시그마6 수준은 아니더라도 배달 한 건을 할때 좀 더 신경을 써서, 오배송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최소한 오늘 저녁 배달에는 오배송이 없기를!

P.S. ‘배민커넥트를 하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가제로 #퍼블리 에 저자 지원을 해두었다. 대략적인 구성은 1. 배달하면서 체험하는 마이크로트렌드 2. 플랫폼 비즈니스 키워드 01: Gamification 3. 플랫폼 비즈니스 키워드 02: Humanism - 배민커넥트 vs 쿠팡이츠 이 정도로 생각해봤다. 2주안에 퍼블리에서 회신이 없으면 브런치에라도 관련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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