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커일기(2021년 11월 29일)

왜 치킨은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by sposumer


화물적재 시 엘리베이터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강재를 붙인 아늑한 화물 엘리베이터 내부

나의 배민커넥트 자전거 배달 완료건수는 이제 398건이다. 어제 저녁은 400건 달성을 기대하면서 신나게 잠실에서 자전거 배달을 하고 있었다. 저녁에 치킨 배달은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다만 잠실에 위치한 L 아파트는 내가 처음 가본 곳이었다. 돌, 성, 권위...한글로 번역해보면 멋대가리 없는 영어 단어를 조합한 비싼 브랜드 아파트들에 배달을 위해서 들어갈 때는 일반 아파트들과 비교했을 때 출입절차가 조금 다르다. 문 앞까지 배달음식을 전달하는 내 임무 완수를 위해서 필요한 절차이기 때문에 이제까지 이 프로토콜에 충실하게 따르며 임무를 완수해왔다. 보통 출입절차는 두 가지 정도인데, 보안요원에게 몇 층에 배달을 왔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보안요원에게 신분증이나 신용카드와 같은 내 물품 하나를 담보로 제공한 뒤에 현관 출입 및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하는 마그네틱 카드를 하나 받는 것이다. 하지만 어제 L 아파트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출입절차가 필요했다.

나는 공동 현관을 지키고 있던 정장 차림의 보안요원에게 "안녕하세요? 30층 치킨배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50대에 점잖아 보이는 보안요원은 말없이 본인의 카드를 태그해서 공동현관을 열어주셨다. '음, 여기는 마그네틱 카드없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수가 있나? 아니면 엘리베이터 버튼까지 눌러주시는 건가?'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안요원이 "사장님, 거기가 아니고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말씀하셨다. '이쪽? 어디를 말씀하시는 거지'라고 생각하며 보안요원을 따라 갔다. 이쪽은 승객용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보안요원은 화물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카드를 태그해서 친절하게 30층을 눌러주셨다. 내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화물용 엘리베이터 문이 바로 닫혔다.


서울의 초대형 고급 단지의 경우 아파트 입구부터 배송지인 현관까지 거리가 1km나 되기도 한다. 심지어 고급 아파트 중에는 음식 냄새가 난다는 이유로 라이더들은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 입주민이 주문하고 배달을 '요청'한 음식인데도 말이다. 마치 짐짝처럼 대우받는 라이더 입장에서는 야속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별 다섯 개 부탁드려요 (유경현, 유수진 저) P 112 중에서>

문이 닫힌 화물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치킨 배달원은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라는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생각을 해보면 택배 배달하는 분들이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뉴스에서도 여러 번 봤다. 하지만 뉴스로 접하는 것과 내가 실제로 그 입장이 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30층을 향해 올라가는 화물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느꼈다. 품격있는 L 아파트 거주자 혹은 방문객과 배달음식 배달하는 사람은 같은 승객용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는 것일까? 이 규칙은 L 아파트 거주자 모임에서 만든 것이다. 규칙에 따라서 나를 안내해주시고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열어서 버튼을 눌러주신 보안요원께는 감사드란다. 하지만 품격있는 L 아파트 거주자들에게는 이 규칙이 합리적인 것인지 물어보고 싶었다. 내가 L 아파트 거주자 전체를 불러내서 만날 수는 없는 일이고, 기회가 되면 L 아파트 거주자 대표를 만나서는 한 번 물어보고 싶다. '화물'의 정의를 확인해보고 싶다. 부피 혹은 체적으로 고려하면 항공기 기내 휴대용 트렁크 보다도 작은 치킨 상자를 '화물'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지. 치킨에 딸려온 1리터짜리 콜라가 기내 반입용량을 초과하는 액체이기 때문에 '화물'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한 번 물어보고 싶다.

30층에 내려서 초인종을 누르고 치킨을 전달하는 것은 10초면 충분했다. 신축이고 평수가 큰 아파트일 수록 해당 라인에 가구수는 좌, 우측에 각각 하나 두 가구이거나 한 가구이니까.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고객님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치킨을 받아갔고, 나는 기계적으로 "수고하세요!"라고 했다. 이 기계적인 멘트가 참 웃겼다. 치킨을 먹는 일도 뼈도 발라내고 해야 하니까 수고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치킨집부터 자전거를 타고 와서 30층까지 치킨을 배달한 내가 더 수고한 것 같은데, 참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답할 적당한 말이 없어 이 멘트는 반복되는 것 같다.

‘왜 치킨은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라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누군가에게라도 합리적인 답을 듣고 싶다. 혹시 그 이유, 아세요? 아시면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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