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커일기(2022년 2월 25일)

배달 완료 사진, 현장에 충분히 다가가면 안 된다!

by sposumer

'문 앞에 두고 벨 눌러주세요' 목차를 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앞으로 한 달간, 더 열심히 배커일기를 써보려고 한다. '독창적인 관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고, 마케터 관점의 글인지 에세이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의견도 많았다. 마케터 관점의 글보다 에세이를 택하게 된다면 더 글솜씨가 있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어려운 길을 택해서 가보려고 한다. 꼬박꼬박 배달을 나가는 일도, 배달 중에 장갑을 낀 손으로 글감을 스마트폰 메모에 적는 것도, 배달을 다녀와서 배달 기록을 엑셀 시트에 기록하는 것도, 글감을 보면서 기억을 되살려 글을 쓰는 것도, 쉬운 것이 하나도 없지만 딱 한 달만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처음 목표로 한 1,000건 배달 완료를 3월까지 달성하기 위해서도 다른 방법이 없다.


이 결심의 첫날로 점심과 저녁 모두 자전거 배달에 열중했다. 오후 7시가 넘은 저녁 배달로 실내등이 없는 빌라를 찾아갔다. 빌라 입구의 이름과 번지수도 잘 보이지 않았다. 늘 배달 전에 꼼꼼히 준비물을 점검하지만 오늘 깜박한 것은 자전거 전조등이었다. 원래 이런 경우에는 자전거 전조등을 쓱 빼서 번지수를 확인하면 되는데, 전조등이 없으니 대용품은 스마트폰뿐이다. 실내등도 어두운 빌라 4층까지 계단을 걸어서 올라갔다. 이런 곳은 계단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힘이 빠져서 올라갈 때 더 조심해야 한다. 한 층에 4개 가구가 있는 빌라, 3층에서 배달 가방을 내려놓았다. 밑변이 없는 사각형이 있다. 왼쪽 변이 1, 윗변에 2와 3, 오른 변이 4호이다. 4층에 올라서 배달 음식을 내려놓고 배달의 증거로 촬영해야 하는 사진에 호수가 나오지 않는다. 계단을 올라가면 바로 문이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진 1. ‘호수도 안보이고, 이게 최선입니까?’ 최선입니다. 각이 안나오는 걸요>
당신의 사진이 별로라면 그것은 당신이 현장에 충분히 다가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로버트 카파 -


이런 경우에는 현장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로버트 카파(Robert Capa)'의 카파이즘(Capaism)을 증거 사진에 적용하면 절대로 안된다. 현장에서 좀 떨어져야만 한다. 피사체(?)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은 내가 3층 중간 계단쯤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방법뿐이다. 이제 이런 피사체와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촬영에도 익숙하다. 빌라 공동현관을 들어가서 계단을 올라가면서 어떻게 배달 완료 사진을 찍을지 결정한다. 배달 완료 사진을 찍기가 곤란한 곳은 빌라만이 아니다. 복도식 아파트도 배달 완료 사진을 정면으로 찍을 수가 없다. 배달 음식은 문 아래에 아파트 호수는 문 위쪽에 있으니 사진 한 장에 모두 담기 위해서는 비스듬히 측면으로 사진을 촬영하는 수밖에 없다. 배달이 완료된 증거로 찍는 사진이라서 명확하게 잘 보이게 찍는 것이 좋다. 그래서 정면에서 배달 완료 사진을 찍게 되면 뭔가 든든하다.


배달 완료 사진을 찍고 나서 주의할 점은 넘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직 다행히 넘어진 적은 없으나 이상하게 배달 완료 사진을 찍고 나서 빌라나 아파트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디고 넘어질 뻔한 적이 많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배달 완료의 묘한 성취감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 일까? 카파의 스페인 병사 사진은 유명하지만 배달하다 계단에서 넘어진 아저씨는 사진 한 장 남지 않을 테니 배달을 마치고도 조심할 수밖에 없다.


코로나로 비대면 배달이 늘어나고, 나는 오늘도 어두컴컴하고 좁은 복도 아니 계단에서 배달 완료 사진을 찍는다.


P.S. 가끔 배달 완료 사진을 찍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경우가 있다. 사진을 먼저 찍어야 한다고 양해를 구하고 꿋꿋이 사진을 찍는다. 배고픈 고객에게는 좀 죄송합니다만 이것도 일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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