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동기’를 위한 변명
가끔 늦은 밤, 텅 빈 사무실에서 모니터 불빛만 깜빡이는 걸 멍하니 바라볼 때가 있다. 끝내야 할 일은 산더미인데,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 기분.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친다. 나, 지금 왜 이 일을 하고 있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 우리는 그것을 ‘동기(Motivation)’라고 부른다. 너무나 익숙한 단어지만, 정작 내 삶의 동기가 무엇이냐는 질문 앞에서는 선뜻 대답하기 어렵다. 오늘, 우리를 움직이기도 하고, 주저앉히기도 하는 이 ‘동기’라는 녀석의 정체를 한번 파헤쳐 보려 한다. 어쩌면 이 글의 끝에서, 기계처럼 일하던 내일을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움직이는 힘, 그 이름은 ‘동기’
어원에서부터 풀어보자. 동기(Motivation)라는 단어는 라틴어 ‘Movere’에서 왔다. ‘움직이게 하다(to move)’라는 뜻이다. 참 직관적이고 명쾌하다. 말 그대로 동기란, 정지해 있는 나를 일으켜 세워 행동하게 만드는 내면의 힘이다.
이 ‘힘’이라는 개념에 집중하면 재밌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심리적 동기가 물리학의 운동 법칙을 따른다면 어떨까? 복잡하게만 느껴졌던 내 마음의 작동 원리가 의외로 간단하게 설명될지도 모른다.
제1법칙: 관성의 법칙 - 시작이 반인 이유
뉴턴의 제1법칙은 ‘외부의 힘이 없는 한,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하고,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움직인다’는 관성의 법칙이다. 우리 모습과 놀랍도록 닮았다. 퇴근 후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리모컨만 만지작거리는 나(정지한 물체)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 반면, 한번 몰입해서 일이나 취미에 빠져들면(움직이는 물체) 누가 말리기 전까지는 밤을 새워서라도 계속하게 된다.
여기서 동기는 바로 이 관성을 깨는 ‘외부의 힘(Force)’이다. ‘이것만 끝내면 주말에 맘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동기)이 우리를 소파에서 일으켜 컴퓨터 앞에 앉히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면 더 멋진 걸 만들 수 있겠지?’라는 기대(동기)가 우리를 잠도 잊고 코딩에 몰두하게 만든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은, 어쩌면 이 거대한 관성을 이겨낼 최초의 동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어렵다는 뜻일 게다.
제2법칙: 가속도의 법칙 (F=ma) - 동기에도 급이 있다
제2법칙은 그 유명한 F=ma, 즉 힘(F)은 질량(m)과 가속도(a)의 곱과 같다는 공식이다. 이걸 우리 마음에 대입해 보자.
동기의 강도 (F): 목표를 이루려는 열망, 절실함의 크기.
과업의 무게 (m): 일의 난이도, 심리적 부담감, 극복해야 할 장애물.
성과 (a):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속도, 기대하는 발전의 정도.
이 공식은 왜 우리가 어떤 일은 놀라운 속도로 해치우고, 어떤 일은 질질 끌게 되는지 명쾌하게 설명한다. 예를 들어, ‘이번 프로젝트 성공시키면 역대급 보너스가 나온다!’는 강력한 동기(F)가 있다면, 밤샘 야근이라는 무거운 과업의 무게(m)를 이겨내고 엄청난 성과(a)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거 해서 뭐 하나,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는데’처럼 동기(F)가 미미하다면, 보고서 한 장 쓰는 가벼운 과업(m)조차 버겁게 느껴지고 성과(a)는 제로에 가까워진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진행 속도가 더디다면,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 일을 해낼 만큼의 ‘힘(F)’이 부족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제3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 주고받는 동기의 사이클
‘모든 작용에는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인 반작용이 따른다.’ 물리학의 제3법칙이다. 우리의 행동(작용) 역시 반드시 어떤 결과(반작용)를 낳고, 그 결과는 다음 동기에 어김없이 영향을 미친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작용)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고 하자. 그에 대한 칭찬과 보상, 그리고 ‘해냈다’는 성취감(반작용)이 돌아온다. 이 긍정적인 반작용은 ‘다음에도 열심히 해야지’라는 더 강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연료가 된다. 반대로, 야심 차게 시작한 일(작용)이 실패하거나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결과(반작용)로 이어진다면, ‘어차피 해도 안 되네’라는 생각과 함께 동기는 차갑게 식어버린다. 이처럼 동기는 일방적인 내면의 외침이 아니라, 나의 행동과 세상의 피드백이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만들어내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 고리다.
내 안의 엔진 vs 외부의 연료: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
자, 이제 동기가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이 힘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이 힘의 근원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바로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다.
내재적 동기는 말 그대로 내 안에서 솟아나는 동기다. 행동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 흥미, 성취감, 만족감이 원동력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밤새워 코딩을 하는 개발자, 돈이 되지 않아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저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게 즐거워 어려운 책을 파고드는 학생. 이들은 모두 강력한 내재적 동기에 이끌리고 있다. 이 동기는 자율적으로 무언가를 해낼 때의 만족감, 자신의 능력이 성장하고 있음을 느낄 때의 유능감, 그리고 타인과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의 관계성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 창의성, 끈기, 깊이 있는 학습을 이끄는 아주 고차원적인 에너지다.
반면, 외재적 동기는 외부로부터 오는 보상이나 처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이는 힘이다. 칭찬, 돈, 상, 승진 같은 보상을 얻거나, 비난, 해고, 벌점 같은 부정적 결과를 피하려는 목적이 행동의 이유가 된다. 용돈을 받기 위해 방을 청소하는 아이, 좋은 성적을 받아야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어 억지로 공부하는 학생, 연말 보너스를 위해 실적을 올리는 직장인. 이들의 행동은 외재적 동기에서 비롯된다. 이 동기는 단기적으로 매우 강력하고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하며, 흥미 없는 과제를 수행하게 만드는 데 아주 유용하다.
그래서, 나는 뭘 위해 일하는 거지?
여기까지 읽은 당신, 아마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기계발서나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에서는 늘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라’, ‘가슴 뛰는 일을 하라’며 내재적 동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내재적 동기는 고귀하고 이상적인 것, 외재적 동기는 어딘가 속물적이고 부차적인 것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다시 한번, 텅 빈 사무실의 나를 떠올려본다. ‘내가 이 일을 좋아하는 게 맞나? 처음에는 분명 성취감도 있고 재밌었는데… 솔직히 말해보자. 만약 이 일의 월급이 지금의 반 토막이 된다면, 그래도 나는 이 새벽에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아닐 것 같다. 그럼 나는 결국 돈 때문에 일하는 건가? 내 열정이라고 믿었던 건, 더 높은 연봉과 승진을 위한 그럴싸한 연기였을 뿐인가?’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쓸쓸한 자괴감이 밀려온다. 내 안에는 순수한 열정 같은 건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고, 오직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만 반응하는 속물이 된 기분이다. 남들은 다들 가슴 뛰는 일을 찾아 멋지게 살아가는 것 같은데, 나만 세속적인 이유에 얽매여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 같다.
당신의 동기를 위한 따뜻한 변명: 허즈버그의 2요인 이론
만약 당신이 단 한 번이라도 이런 고민을 해봤다면, 이제부터 내가 해줄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길 바란다. 당신이 속물이어서, 열정이 식어서 그런 게 아니다. 당신의 그 고민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타당하다. 그리고 심리학자 프레더릭 허즈버그(Frederick Herzberg)가 당신의 든든한 변호인이 되어줄 것이다.
허즈버그는 ‘무엇이 사람들을 일터에서 만족하게 하는가?’를 연구하다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직무 만족을 이끄는 요인과 직무 불만족을 이끄는 요인이 완전히 별개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2요인 이론(Two-Factor Theory)이다.
하나는 위생 요인(Hygiene Factors)이다. 이 요인들은 충족되지 않으면 극심한 ‘불만족’을 유발하지만, 아무리 잘 충족시켜 줘도 ‘열정’을 주지는 못한다. 회사 탕비실의 간식을 생각해 보면 쉽다. 냉장고에 마실 것과 간식이 텅 비어 있으면 ‘이 회사는 복지가 왜 이래?’라며 불만(불만족)을 터뜨린다. 하지만 냉장고가 늘 가득 차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잠시 고마워했을지라도 지속적으로 그것 때문에 회사에 대한 애정이 샘솟고 일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지는 않는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길 뿐이다. 대표적인 위생 요인으로는 급여, 근무 환경, 회사 정책, 직업 안정성,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동기 요인(Motivators)이다. 이 요인들은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만족’과 강력한 동기 부여를 이끌어내는 것들이다. 주로 내재적 동기와 관련이 깊다. 대표적인 동기 요인으로는 성취감, 인정, 일 자체의 즐거움, 책임감, 성장 등이 있다.
이제 아까의 고민으로 돌아가 보자. ‘월급이 반 토막 나면 이 일을 계속할까?’라는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급여는 가장 핵심적인 ‘위생 요인’이기 때문이다. 급여가 기대에 못 미치거나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낮아지면, 우리는 극심한 ‘불만족’ 상태에 빠진다. 이런 불만족 상태에서는 성취감이나 성장 같은 고차원적인 ‘동기 요인’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다. 위생 요인이 최소한으로 충족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내재적 동기라는 엔진을 가동할 준비를 할 수 있다.
즉, 당신이 급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신이 속물이어서가 아니라, 만족을 논하기 이전에 불만족부터 해결하려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심리다. 당신의 고민은 열정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동기 시스템이 건강하게 작동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요구하고 있다는 신호다.
내재적 동기와 외재적 동기, 균형을 향한 여정
우리는 종종 내재적 동기는 선, 외재적 동기는 악 혹은 차선책이라는 이분법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이 둘은 대립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파트너라는 것을.
집을 짓는 과정을 상상해 보자. 외재적 동기(급여, 안정성)는 집을 짓기 위한 ‘튼튼한 땅과 기초 공사’와 같다. 땅이 무르고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의 설계도를 가지고 있어도 소용없다. 집을 짓기 시작할 수도 없거니와, 억지로 짓는다 해도 늘 불안에 떨며 살아야 할 것이다.
반면에, 내재적 동기(성취, 흥미, 성장)는 그 집의 ‘멋진 설계와 인테리어, 그 안에서 누리는 삶의 즐거움’이다. 튼튼한 기초 위에 어떤 철학을 담아 집을 설계하고, 어떤 가구와 소품으로 공간을 채우고, 그 안에서 누구와 어떤 추억을 쌓으며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기초 공사만 훌륭하게 되어 있는 텅 빈 콘크리트 건물에서 행복을 느끼기 어려운 것처럼, 안정적인 급여만으로는 일의 의미와 삶의 만족을 온전히 채울 수 없다.
결국 최고의 집은 튼튼한 기초 위에 아름다운 설계가 더해질 때 완성된다. 우리의 직업적 만족과 삶의 동기 또한 마찬가지다. 외재적 동기라는 안정적인 기반이 충족될 때, 우리는 비로소 내재적 동기라는 자기실현의 욕구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나는 왜 돈 때문에 일할까’라며 자책하지 말자. 그 고민은 오히려 ‘내 열정이라는 멋진 집을 짓기 위해, 나에게는 어느 정도의 튼튼한 기반이 필요할까?’를 묻는 성숙한 질문이다. 우리는 내재적 동기만으로 살아가는 이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하게 보상받으며, 그 안정적인 기반 위에서 비로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는 존재다.
오늘 당신을 책상 앞에 앉힌 힘이 ‘월급’이라는 외재적 동기였어도 괜찮다. 그 힘 덕분에 당신은 오늘도 당신의 역할을 해냈고, 그 과정에서 아주 작은 성취감이나 새로운 배움(내재적 동기)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비난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초 공사와 실내 디자인을 모두 살피며 둘 사이의 건강한 균형점을 찾아나가는 것이다. 그 여정 자체가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집을 행복하게 지어가는 진정한 ‘동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