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매일 방사선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나는 출근해야 했고, 그를 혼자 남겨 둘 수 없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루의 시작을 함께했다. 아침이면 그와 함께 집을 나섰다. 출근길에 그를 시댁에 내려주면, 그는 조용히 차에서 내렸다. 나는 백미러로 그가 아파트 현관문으로 들 어서는 모습을 확인한 뒤 다시 회사를 향해 운전대를 돌렸다. 퇴근 후 다시 시댁으로 가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늘도 병원에 잘 다녀왔는지,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같았다.
그렇게 반복되는 하루들 속에서, 그날도 나는 퇴근 후 시댁으로 향했다. 주방에서 저녁 준비를 도우려던 찰나, 시어머니가 조용히 주방 문을 닫으며 내게 다가오셨다.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어딘가 불안한 기색으로 말을 꺼냈다.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은호 아픈 게 결혼을 잘못해 서 그런 거라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친정엄마랑 굿 한 번 하러 다녀오면 어떨까 싶다.”
나는 순간 멈칫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해 야 할지 몰라 당황한 채로 물었다.
“네? 어디서 그런 말씀을 들으셨어요?”
시어머니는 내 눈을 피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주위에서 다들 그러더라.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아픈 게 결혼 잘못한 탓이라고. 조상 중에 누가 샘을 내서 그런 거라고.”
“…”
“절대 은호한테 말하지 마라. 난리 난다.”
시어머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가 띵해졌다. 그 순간에는 이해해 보려고 했다. ‘아들이 큰 병에 걸렸으니, 엄마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스스로 타이르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감정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때 은호가 주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시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급히 가스 불을 켜며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의 그가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마시고 있었다.
모든 엄마에게 자식은 소중하지만, 내 시어머니에게 남편은 특별히 더 소중한 자식임이 분명했다.
어디 내놔 도 부족함 없는 아들. 번듯한 직장, 큰 키, 잘생긴 외모와 다정한 성격까지. 자랑거리를 넘어선 그녀의 빛나는 자부심이었다. 그런 아들이 불치병이라니, 원망의 화살이 나를 향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주말 아침, 나는 남편을 혼자 두고 친정엄마와 함께 점 집을 찾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창밖 풍경이 빠르게 지나갈 때 내 머릿속은 더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진짜일까 봐 무서웠다. 정말 내 탓일까 봐, 우리가 애초에 만나지 말아야 했던 운명이었을까 봐. 점쟁이가 뭘 말할지 두려운 게 아니라, 정말로 누군가가 이 모든 고통에 ‘이유’를 붙여 버릴까 봐 겁이 났다. 이유가 생기면 더 이상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30분쯤, 아무 말없이 앞만 바라보며 생각했다. ‘차라리 내가 사라져 버리면, 이 모든 게 다 끝나는 거 아닌가?’ 감당할 수 없는 미래 앞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비겁한 바람이 자꾸만 들이닥쳤다. 점집에 도착해서 떨리는 마음으로 우리의 생년월일을 알려준 뒤 손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기다렸다. 긴 침묵 끝에 점쟁이는 여러 풀이를 늘어놓았고 남 편의 병에 대해선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둘이 이혼수 없이 잘만 살 텐데, 뭐가 걱정이야? 뭐, 말년에 몸조심해야 할 것 말곤 특별한 거 없어.”
점쟁이는 무심히 말했다. 나는 속으로 ‘나이 들면 다 몸조심해야지’ 하고는 허탈 한 웃음이 나왔다. 정말 허탈했다. 그날 나는 남편과 내 건강 부적 두 장을 사서 나왔다. 점쟁이가 하나는 남편의 베개 안에, 하나는 내 차에 넣고 다니라고 했다. 이후에도 몇 군데를 더 찾아갔지만 결국 듣는 말은 비슷했다. 그 말들에 이상하게도 ‘내 탓이 아니 다’라는 안도감과 ‘정말 용한 집이 맞긴 한가?’라는 의구 심이 반복되었다.
며칠 후,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치길 기다린 듯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시어머니가 물었다.
“굿하고 왔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그냥 하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확인하실 줄은 몰랐다. “아니요. 아픈 거 맞추는 데가 한 곳도 없던데요.”
말끝이 다소 거칠었다. 나도 알았다.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던 걸. 시어머니는 조용히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도 했어야지!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목소리를 낮춰서 대꾸했다.
“그러면 어머님이 하시면 되잖아요.”
“난 종교가 있어서 그런 거 하면 안 돼. 그러니 너한테 부탁했지.”
그 말에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시어머니가 모태 신앙인 것도,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직접 굿을 하거나 점집에 가는 게 분명 넘을 수 없는 선이라는 것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 건 내가 대신 그 역할을 떠안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더구나 정말로 ‘굿’이라는 걸 한다면 그건 곧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이 내 탓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대화는 거기서 끝이 났다.
말과 함께 마음도 멈추었다. 그 후로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저 평범한 고부 사이었는 데 이제는 서로에게 상처의 이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 없었다. 말을 꺼내려할 때마다, 그 순간의 공기가 목 끝까지 가득 차올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건 어 쩌면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상처였다. 하지만 남편이 하늘로 떠난 뒤에는 자꾸만 그날의 기 억이 떠올랐다.
‘정말, 내가 그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내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프지 않았을까.’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더 오래 살 수 있었을까.’
끝없이 되묻게 되는 질문들. 시간이 흐를수록 잊히기는커녕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아무도 내 탓이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내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모든 것이 나를 향하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네 탓이야.’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은 그 문장이 오랜 침묵 끝에 조용히 나를 향해 선고되는 것 같았다.
남편은 결혼한 지 5개월 만에 암 진단을 받았다.
두 번 의 수술, 두 번의 항암치료. 버티고 또 버텼지만, 진단을 받고 나서 4년째 되던 봄에 세 살 아이와 서른셋의 나를 남겨 두고 서른일곱의 그는 하늘로 떠나버렸다. 나는 자꾸만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하늘도 땅도 없는 진공처럼 고요하고 어두운 자리. 그 안에서 나는 그저 서 있었다. 모두가 울었지만, 나는 울 수도 없었다.
내 삶은 분명히 멈춰버렸지만, 시간은 잔인하게도 멈추지 않았다. 아이는 자랐고 봄은 다시 왔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너의 삶을 살아야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하지만 정작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은 다른 것이었다.
“너 때문이 아니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네가 그를 사랑했듯, 그는 끝까지 너를 사랑했어.”
그런 말이 듣고 싶었다.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설득해야 했다. 매일 밤 자책과 슬픔으로 무너지는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사랑했던 사람을 잃고도 살아가야만 하는 삶에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 매일 마음을 다잡았다.
오랫동안 나 자신에게서 책임을 물어왔다. 이제는 조금씩 그 손을 놓아보려 한다.
슬픔의 이름으로 나를 묶고 있던 그 죄책감의 실타래를 하나씩 조심스럽게 풀어보려 한다.
누구에게나 불쑥 찾아올 수 있는 비극이 어느 날 나에게도 일어났을 뿐이다.
나는 이제 그 이야기를 꺼내려한다.
더는 죄책감이 아니라, 기억의 온기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