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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춘곤증 Apr 03. 2018

내 취향을 버리고 취하는 남들의 취향

영화 <소공녀>를 보고,


구직 중인 백수

남부러운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의 타이틀이 되니 무얼 해도 맘이 무겁다.

이력서를 여기저기 넣어보고 면접도 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뭘 해야 할지 멍한 와중에 본가에 잠시 내려가기로 했다. 취직한 뒤 새 명함을 들고 내려가고 싶었는데 그러다간 엄마 아빠 얼굴을 잊겠지 싶어 괜히 노트북을 챙겨 기차에 올랐다.

자취하는 백수가 그렇듯 아점 시간대에 눈을 떴기 때문에 빈 속으로 오후 기차표를 샀다.

기차에서 먹을 커피와 빵을 좀 사서 자리에 앉았는데 옆자리 여자의 전화 소리가 거슬린다.

빵을 먹으며 의도치 않게 듣다 보니 퇴사 후 집에 내려가는 중이라고 했다.

전 직장에 대한 하소연과 함께 다음 직장에 대한 바람은 커졌고 이력서를 넣으려 봤으나 마땅한 곳이 별로 없고 면접도 한 두 군데 봤으나 좋은 곳인지 모르겠어서 내려가 쉬면서 머리도 식히겠다고 한다.

슬쩍 곁눈으로 보니 나와 나잇대도 비슷해 보였다.

통화를 마치고 창 밖만 멍하니 보는 모습에 나의 모습이 비치는 듯했다.


서울에서 내려가는 길.

각자의 종착지는 다르지만 서울에서 벗어나는 방향은 같다.

기차는 한 방향으로 내리 돌진하면서 고민 따위는 없는 속도다.

우리 이십 대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기차 안의 승객처럼 모두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갈 수 없다.

정해진 인원만이 기차에 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속도의 탈것을 타거나 다른 방향으로 가거나 그 자리에 머물러도 된다.


쉽지 않다.

좁고 느린 버스를 타고 가며 빠른 ktx를 탄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내 속도에만 집중하고 목적지에 확신하는 것은

혹은 그 자리에 머무르며 어디론가 사방으로 달리는 사람들에, 불안해하지 않는 것은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그렇지 않은 듯 보인다.


처음 그녀의 소신과 취향에 응원을 보냈다 그러다가 '너는 염치가 없는 거야'라는 대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황이 어려우면 취향은 포기해야지.

그 돈을 모아서 저축해야지 역세권에 전세를 얻어야지, 차도 사야지, 올해 유행 컬러 셔츠도 사야지, 아이폰 새로 나왔다던데 써봐야지, 겨울에는 인스타 에 업로드할 동남아 여행도 가야지.



내 취향을 버리고 취하는 남들의 취향.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버는 것은 삶의 필수조건들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더 많은 돈을 좇는 것은 더 풍족한 삶을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 풍족한 삶은 타인과 사회와 완벽히 분리된 나의 취향으로 완성된 풍족함일까?

수많은 선택지가 놓이는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 또한 사회가 제공한 소비의 일종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고심 끝에 선택한 무엇이, 나를 위해 소비한 무엇이, 실은 사회가 선택하고 소비하도록 종용한 선택이라는 사실.


그 속에 온전히 나의 취향이라는 것이 존재키는 할까?

영화 속 미소의 위스키와 담배라는 취향도 그녀가 어릴 적 어디선가 본듯한 행복한 모습의 잔재일 수 있다.

나는 사실 영화의 마지막 무렵까지도 하나의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미소가 부르짖는 포기할 수 없는 위스키와 담배를 즐기는 행복의 순간에도 현실의 걱정, 당장의 안위에 대한 우려가 틉입해 오지 않을 수 있나 하는 것이다.

일요일 저녁이면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백수에게도 월요일은 마냥 즐겁지 않다.

그토록 그려오던 한가로운 평일 낮의 찰나의 순간에,  불안한 통장 잔고와 경력 단절 등의 걱정이 비집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영화를 영화로만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의 나에게 대입해 미소의 행복의 농도에 대해 의심해보는 것은 영화가 정말 현실과 너무 닮아 있기 때문이다.

포기해야 할 것이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자꾸만 적어지는 현실.

그 안에서 취향을 고집하고 행복을 유지하는 것.

그 조차 온전히 내 것이 맞는지 의심하는 하는 간사한 행복이란 단어.

위 두 문장에 대해 확신을 내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누군가 내놓은 확신에 대한 의심도 나는 그칠 수가 없다. 행복이란 그만큼 가볍지 않을까. 무언가 끌어다 행복이라 앉혀놓으면 나름의 행복이 되지 않을까.

달콤하게 자기 위안 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차피 나의 선택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면 거기서 오는 불행도 행복도 내 것만이 아니다.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무시하고 지나치거나, 주저앉아 멍하니 바라보거나 그 태도만큼은 내 것일 것이다.

미소가 세상을 불안하게 여행하면서도 위스키와 담배를 끝내 포기 않고 즐기면서 그 순간을 담담히 바라보는 것처럼.

우린 그저 각자의 위스키와 담배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는 태도를 선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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