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고,
레디 플레이 어 원 (Ready Player One, 2018)
결국은 찾아온 덕후의 세상
마이너리티 리포트, ET 두 작품만 슬쩍 보아도 SF라는 장르를 제 손에서 주무르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게임 속이 곧 현실이 된 디스토피아 판타지를 감독한다.
게임 속이 현실이 된 디스토피아, 스티븐 스필버그
이 두 가지 전제만 보더라도 이미 원작인 책을 읽지 않았어도, 80년대의 게임에 대한 추억이 깊지 않았어도 충분히 극장에서 영화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먼저 한 가지 고백을 하자면 나는 영화와 책, 게임들을 일상의 윤활유 정도로 생각하는 가벼운 문화인.
일상이 곧 영화이자 게임이자 독서가 되는 깊이감 있는 전문성을 가진 덕후가 아니다.
그렇기에 영화의 간단한 후기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이스트에그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공감의 범위가 곧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조건의 척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저 가벼운 문화인에 지나지 않는 나에게도 레디플레이어원은 충분히 즐길 것이었다.
2045년, '오아시스'라는 게임 속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캐릭터로서의 삶에 더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빈민촌의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디스토피아
게임을 창시한 할리데이는 유언으로 게임 속 이스트에그 3가지를 남기고 이를 찾아낸 유저에게 '오아시스'를 넘겨주겠다는 게임 속의 또 다른 게임을 제안한다.
주인공인 소년 웨이드 와츠는 창시자 할리데이를 선망해온 할리데이 덕후(?)
그의 일대기 속에서 첫 번째 수수께끼의 단서를 찾게 되고 성공하게 되면서 오아시스의 주인에 가까워진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오아시스 다음가는 거대 기업이자 공격적 기업인 'IOI'가 플레이어들을 고용하여 질보단 양으로 자본을 쏟아부으며 게임에 참가한다.
자발적으로 시간과 돈을 오아시스에 바치며 가상현실에 사는 현대의 노예들과
현실에서 잃은 돈 때문에 몸으로 가상현실에서 때우는, 혹은 현실의 돈을 벌기 위해 가상현실에 고용된 IOI의 노예들
두 가지의 차이점이라면 자신이 노예라는 것, 피고용자라는 것을 모른다는 점뿐이랄까?
그만큼 숨 쉬고 싶지 않은 현실을 피해 도망친 말 그대로의 '오아시스'는 사실상 영화에서 매우 악덕 대기업처럼 그리는 IOI의 행태와 그 근본을 달리 하지는 않는다.
마침내 이스트에그를 모두 깼을 때는 이미 영화가 뿜어내는 추억의 향수에 젖어 그야말로 가상현실, 영화 속에 푹 빠져있다.
게임, 단어 그대로 오락에 빠져 그 즐거움을 만끽한다.
게임 속 세상을 구한다는 명목이라지만 그래 봐야 가상현실.
가상현실을 구한 웨이드 와츠는 동업자가 된 팀 플레이어들과 게임의 접속을 제한하는 요일을 만들고 세상과 접촉하고 소통하자고 한다.
사실 게임 밖에서 소통하지 못한 것은 창시자 할리데이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모든 것을 이룬 할리데이 조차 마지막에 후회하는 것은 용기 내지 못한 사랑, 틀어진 우정, 세상과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 인간에게 존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
그 방법이 게임이던, 영화건, 음악이건, 대화이건!
결말 부분에서 조금 아쉬웠던 것은 할리데이의 원인은 그의 주저함과 용기 내지 못한 순간들이었다지만, 오아시스에 절어 지내던 컨테이너 빈민촌의 사람들의 원인은 현실 속 빈곤과 불만족 아니었나?
그 빈곤과 불만족이 충족된 본인, 웨이드 와츠는 게임 덕에 사랑도 찾고 현실의 행복을 찾는 것에 집중해볼 테지만 다른 유저들은 어떤 해결책 없이 일상의 도피처이자 행복을 빼앗긴 것은 아닐까 하는 너무나 클래식한 결말에 대한 오지랖을 부려본다.
그렇지만 이 모든 교훈과 메시지를 제쳐두고 그저 '오아시스'라는 게임처럼 '레디 플레이어 원' 이란 영화를 그저 영화란 매체의 오락으로 보자면, 즐거움 그 자체이다.
게임과 80년대 문화의 덕후라면 그야말로 종합 선물세트이겠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와 게임 음악들이 쏟아지는 오락물만이 응집된 세계를 살짝 훔쳐다 본 경험이었다.
언젠가 꿈꿔본 적이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로만 가득 찬 섬을 하나 가지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섬을 하나 사서 그곳에 가득 채워 넣고 살고 싶다.
막연하게 꿈꿔온 이 바람은 '오아시스'와 일맥상통한다.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찬 세상. 그것이 현실이던 가상이던
그 환상적인 세상이 우리에게 찾아올 수 없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꿈꾼 것을 이미지로 모아 하나의 세상을 구축한 것.
그리고 그곳에 우리를 초대하여 두 시간 남짓 그 세상을 훔쳐보도록 경험토록 해주는 것.
그 안에 수많은 캐릭터를 찾아내는 이스트에그를 또 우리에게 제안한 것.
영화 속 게임을 바라보며 게임 속에 들어가는 우리들.
영화와 게임 현실 그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유쾌한 경험으로 덕후의 세상이 왔음을 찬양하는 스티븐 스필버그이자 할리데이에게 겜알못으로서도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