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수용소와 직장인의 책상
빅터 프랭클을 읽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정신과 의사였던 그는 나치 수용소의 가장 낮은 곳을 지나왔다.
책은 건조하다. 차갑다.
감정을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는 일,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끝까지 무엇을 붙드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 기록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나는 오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보게 된다.
수용소와 직장은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럼에도 사람이 무너지는 방식과 다시 버티는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수용소에도 기쁨은 있었다고 한다.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사탕 한 알. 묽은 수프 속 감자 한 조각. 멀리 타오르던 저녁 하늘.
그 사소함 앞에서 사람들은 울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프랭클은 고통을 가스에 비유한다.
공간이 얼마나 넓든, 가스는 끝내 그 안을 가득 채운다.
고통도 그렇다. 죽음의 공포든, 하루의 사소한 갈등이든 의식 전체를 점령해 버린다.
직장인의 하루도 다르지 않다.
끝나지 않는 일, 닳아가는 관계, 출근길의 무게와 퇴근길의 공허.
그런데도 어느 순간
커피 한 모금에 마음이 풀리고,
쓸데없는 농담에 웃음이 새어 나온다.
별것 아닌 장면인데, 그게 숨구멍이 된다.
고통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그때 스친다.
무엇이 나를 채우는지.
어쩌면 그 문제일지도 모른다.
작은 기쁨을 알아보지 못하면 사람은 생각보다 빨리 무너진다.
그래서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버티기 위한 기술에 가깝다.
우리는 자꾸 다음을 기다린다.
이 일만 끝나면, 이번만 넘기면,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지금은 잠깐 맡겨 둔 시간처럼 흘려보낸다.
하지만 수용소의 문이 열렸을 때,
사람들을 맞이한 건 환희가 아니었다고 한다.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
너무 오래 버틴 감정은 기쁨을 느끼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한다.
자유가 왔는데도 아무 감각이 없다.
세상이 유리 너머처럼 멀다.
아름다워야 할 것이 아름답지 않다.
환경이 바뀐다고 내 안까지 함께 바뀌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된다.
승진도, 퇴사도 생각했던 종류의 구원은 아니다.
그저 또 다른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중요한 건
벗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머무는 시간 속에서 무엇을 붙잡느냐인지도 모른다.
질문이 조금 달라진다.
내가 삶에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지금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우리는 거대한 흐름 안에서 산다.
대부분의 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조직의 방향, 예고 없이 흔들리는 시장까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그래도 끝까지 남는 것이 하나 있다.
그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는 나 자신의 태도.
그건 그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물론 누가 가져다 안겨줄 수도 없다.
직장에서 우리는 자주 소모된다.
몸은 지치고,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스스로 납득한 의미가 하나라도 있으면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는다.
휘어질 뿐이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
더 나은 곳으로 간 사람이 사라지고,
뒤에 남은 사람이 살아남기도 한다.
그 우연을 붙잡고 흔들리다 보면 영혼이 먼저 닳는다.
그래서 존엄이라는 말을 떠올린다.
삶의 주도권이 직함이나 숫자에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
결국 선택의 문제라는 것.
타인의 인정은 오래 남지 않는다.
언제든 방향을 바꾼다.
남는 건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뿐이다.
조직이라는 껍질을 하나씩 벗기고 나면 끝에 무엇이 남을까.
그 질문 앞에 오래 머문다.
회사가 아니라,
고통을 대하는 나의 방식이 나를 설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삶은 계속 묻는다.
준비되지 않은 질문을, 멈추지 않고 던진다.
나는 완벽한 답을 모른다.
다만 그 질문 앞에 서 있는 태도만은 내 몫이라는 걸 안다.
초라한 하루 속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는 것.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에서 아주 작은 의미를 길어 올리는 것.
어쩌면 그게
이 버티기 어려운 세계에서
나를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나는 오늘도 내 자리에 앉아 있다.
아직은, 내 안까지 무너지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