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팀23] 별것 아닌 일이 사람을 지치게 한다

나는 오늘도 상사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by 봄날의 초원

대부분의 일은 그냥 넘긴다.

웬만한 지시도, 웬만한 업무도

크게 마음에 남지 않는다.

의미가 조금 부족해 보여도

해야 할 일이라면 처리한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별것 아닌 일이었는데

묘하게 마음이 걸렸다.

일 자체는 작았다.

하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


회사 전체 기준으로 보면

중요하다고 보기 어려운 영역이었다.

팀이 만들어내는 매출과 비교해도

거의 보이지 않는 수준이었다.

앞으로 크게 커질 가능성도 낮고

지금 굳이 다뤄야 할 이유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유관부서와 논의하고

가능성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일의 크기와 요구되는 행동 사이에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있었다.


사실 이 일은 어렵지 않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다.

메일 한 통이면 정리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힘이 빠졌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어려워서도 아니다.

시간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은

유독 사람을 지치게 할까.


생각해 보니 이유는 단순했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지금 왜 해야 하는지,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는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다.


사람은 일의 크기에 반응하지 않는다.

일의 의미에 반응한다.

의미가 분명한 일은

조금 힘들어도 받아들일 수 있다.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가 보이지 않는 일은 다르다.

아무리 작아도

그 작음이 오히려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

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 하나는 작다.

조직 전체로 보면 더더욱 작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쌓이면

조직은 조금씩 느려진다.

집중해야 할 일은 밀리고

에너지는 분산된다.


나는 지금

누군가의 지시를 받으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위치에 있다.

위와 아래 사이에

항상 끼어 있는 자리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상사의 지시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는다.

맥락 없이 내려온 말은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

한 번 더 정리하고

필요한 부분만 남긴다.


사실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지금 꼭 필요한 일인지,

우선순위는 어디에 있는지

여러 번 질문해 봤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팀장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유관부서에서도 같은 문제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의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게 됐다.

위에서 바꾸기보다는

내 아래를 지키는 쪽으로.


팀원이 불필요하게 지치지 않도록,

의미 없는 일에 에너지를 쓰지 않도록

내 선에서 한 번 더 걸러낸다.

맥락을 붙이고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


그리고 그 결과만

다시 위로 올려 보낸다.

이 과정이 효율적인지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대로 전달하면

팀원은 더 빨리 지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중간에서 한 번 더 일을 바꾼다.


일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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