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면서
퇴직연금 계좌를 열었다.
DC로 전환하고 나서 계좌에 금액이 한 번에 들어왔다.
숫자가 찍히는 순간 손이 잠깐 멈췄다.
그전까지는 그 돈을 따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내가 건드릴 수 있는 돈이 됐다.
금액은 같았지만 성격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누가 책임지는지 조용히 바뀌어 있었다.
결정을 하고 나서도 마음은 가볍지 않았다.
손을 떼면 아쉬울 것 같고, 잡으면 잘못 잡을 것 같았다.
판단은 끝났는데 불안은 남았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책임이었다.
DB는 회사가 책임지고, DC는 내가 책임진다.
결과가 나빠도 설명할 대상이 바뀐다.
회사 대신 내가 된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같은 시기에 다른 장면이 하나 더 겹쳤다.
회의 자리에서 말할 타이밍이 한 번 지나갔다.
예전 같으면 내가 정리했을 흐름이었다.
팀원이 먼저 말을 꺼냈고, 나는 그대로 두었다.
상무가 그쪽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대답도 그가 했다.
나는 그걸 듣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도 그 장면이 남았다.
내가 하지 않아도 흐름은 이어졌다.
자리가 비워진 게 아니라 옮겨진 느낌이었다.
팀장은 숫자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회의에서 먼저 말하는 사람, 결정을 정리하는 사람,
문제가 생기면 이름이 먼저 올라가는 자리다.
그 자리를 오래 맡고 있으면 사람은 그 위치에 익숙해진다.
익숙함은 생각보다 단단하다.
그래서 내려오는 상상을 하면 돈보다 다른 것이 먼저 움직인다.
말을 줄이는 타이밍을 고르고, 판단을 한 번 더 미룬다.
앞에 서지 않는 쪽을 택하는 순간이 늘어난다.
익숙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이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투자 방식도 비슷하게 바뀌었다.
예전에는 하나에 모아서 넣었고, 맞다고 생각하면 비중을 더 키웠다.
지금은 여러 쪽에 나눠서 담는다.
미국과 한국, 주식과 채권, 금.
수익이 나뉘는 대신 손실도 나뉜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장면을 몇 번 더 봤다.
예전에는 먼저 말하던 사람이 뒤에서 듣고 있는 경우,
결정보다 검토를 먼저 꺼내는 경우.
속도가 줄어든 것 같지만 완전히 멈춘 건 아니었다.
방향만 조금 바뀐 느낌이었다.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선택의 기준이 달라진다.
돈만이 아니라 시간과 자리, 관계와 평판.
잃었을 때의 비용이 앞에 먼저 놓인다.
그래서 선택은 조금씩 느려진다.
같은 판단인데 기준이 다르게 붙는다.
퇴직연금 계좌를 다시 본다.
숫자는 여전히 비슷하게 움직인다.
수익률을 더 높일 수도 있을 것 같고, 지금 정도면 괜찮은 것 같기도 하다.
결정을 바꿀 이유는 없는데 마음은 완전히 따라오지 않는다.
손이 한 번 더 멈춘다.
결정을 했다. 숫자도 맞다.
그런데도 손이 한 번 더 멈춘다.
이 멈춤은 단순한 망설임일까.
아니면 다른 기준이 생긴 것일까.
지금의 이 속도가 늦어진 것인지, 바뀐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