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장 선배와 저녁약속이 있어서 오랜만에 전직장 근처를 찾았다. 선배 성격상 주변 맛집을 열심히 검색해서 찾아다니는 성격은 아니라서 나와 먹을 때 어디 한번 이동네 맛집 음식 드셔보시라는 생각에 대기가 필수인 맛집을 약속장소로 잡았다. 선배에게는 마치는 대로 음식점 앞으로 오라고 하고 퇴근이 빠른 내가 먼저 도착해서 줄을 서 있었다.
20분 정도 기다렸더니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나오고 내 앞 대기손님들이 들어가더니 내 자리까지 났다. 하지만 선배가 도착 전이라 뒤에 서계신 손님에게 일행을 기다리는 중이니 먼저 식사하시라고 양보를 했다. 그랬더니 내 뒤의 손님뿐만 아니라 그 뒤의 손님까지 내 앞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음식점은 테이블 5-6개 정도로 규모가 작은 편이고 내 자리 딱 한 자리가 났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내 바로 뒤 그 손님에게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었고, 아마 선배도 5-10분 내로는 도착할 예정이라 솔직히 양보하지 않고 자리에서 기다렸어도 그리 눈치보일 상황은 아니었는데 두 팀에게나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황당했다. 은근슬쩍 내 앞으로 자리를 옮기는 그 아주머니의 태도에.
평소 내 성격이면 아무말도 못하고 억지로 자리를 양보하고는 선배가 오면 하소연이나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 싫었다. 나에겐 '여성 연장자'의 '에고이즘'에 트라우마가 있고, 이 것은 나의 역린이었다.
최대한 밝고 명랑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여사님, 저는 바로 저 분까지만 양보할 수 있다고 말씀드린 거였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말씀하시길,
"알아요. 내가 아가씨 뒤라는 거 나도 알고 있어요. "
그런데 알고 있으시다는 그 분은 계속 내 앞 자리에 서 계신다. 부끄러워서 도망가고 싶지만 한 번더 참고 말씀드렸다.
"여사님, 대기 손님분들이 점점 많아지시는데, 대기줄을 정비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까부터 손님들이 어디가 줄인지 몰라서 저렇게 계시는 것 같아요. "
"아가씨, 내가 아가씨 뒤라는 거 안다니까. "
우와, 내가 진짜, 알면서 왜 계속 거기 서계시냐, 알면 뒤로 가시라, 지금 아줌마 한 명 때문에 줄이 엉켜서 눈빛 흔들리는 저 손님들 안보이냐고 할 말은 많았지만 그 말을 하고 있을 내가 부끄러워서 한 마디도 못했다. 어차피 말 해도 아주머니는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 모를테고, 부끄러움은 온전히 나의 몫일테고, 이 전쟁의 끝은 나의 패배일 것인다. 아주머니에게는 마법의 한 마디가 있다. 젊은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그 한 마디면 아주머니의 승리다.
저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나는 아주 오랜 옛날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때에 내가 살던 지역에 ㅎ사, ㅇ사와 같은 대형마트라는 게 처음 생겼었다. 지금이야 대형마트가 한 동네에도 몇 개씩 종류별로 있고 인터넷 쇼핑이 활성화되어 있었지만 그 당시에 대형마트가 오픈한다는 것은 거의 지역축제와 같았다. 거기다 대대적인 오픈행사까지 한다니 오픈 첫주 주말에 그 지역 주부들은 거의다 마트로 달려갔다. 지금의 MZ 세대들은 믿을 수 없겠지만 그 때는 그랬었다.
아무튼 처음보는 대형마트는 학교 운동장보다 넓은데다 지하부터 지상까지 물건으로 가득차 있었고 물건만큼이나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 계산대 줄이 아래층까지 이어져서는 마트의 4방벽은 전부 대기줄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족도 구매한 상품을 계산하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나도 힘들었지만 더 어렸던 동생은 한계상황에 다다랐다. 급기야 화장실이 급하다고 난리가 났다. 엄마는 어디 다른데 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를 하며 나에게 줄을 맡기고 동생을 화장실로 데려갔다(아빠는 주차장에 주차공간이 없어서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대기중이셨다).
엄마가 자리를 비우자 내 뒤에 서 계시던 아주머니가 은근슬쩍 내 앞으로 쇼핑카트를 들이 밀었다. 늘어선 줄에서 혼자 삐져나온 채로 있더니 앞에 공간이 생기자 자기 자리인양 카트를 쑥 밀고 내 앞에 섰다. 나는 뒤에서 저 아줌마는 왜 저러는거지라고 생각하는 게 다였다. 엄마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곧 다른 아줌마도 내 앞으로 카트를 들이 밀었다. 그리고 아까 그 아줌마처럼 앞에 공간이 생기자마자 카트를 쑥 밀고 내 앞에 서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어어 하고 말 뿐이었다.
그 상태로 어쨌든 아주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그래도 여전히 계산대는 보이지도 않는다. 엄마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라에 바로 뒤에 서 있던 아줌마가 나한테 말을 건다.
"학생, 내가 좀 급해서 그러는데 내가 학생 앞에 서면 안될까?"
급하시다 하시니 그러시라 했다. 그런데 급하시다 하시면서 나한테만 양보를 구하신다. 그 앞에 아줌마, 또 그 앞에 아줌마한테는 아무 말씀도 못하시고, 급하시다면서 나 하나 제쳤을 뿐이다. 나 하나 제치시고 얼마나 시간단축이 되셨을까?
그 날 마트를 나와서 아빠차에 타고서야 엄마와 아빠에게 아줌마들 나쁘다며 쫑알쫑알 다 일렀다. 엄마는 마트에서 울어버리지 그랬냐며, 엄마가 혼자둬서 미안하다 달래셨다.
음식점에 뒤늦게 도착한 선배에게 선배를 기다리며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다 일렀더니, 아줌마들 참 세다면서 선배가 늦은 탓이란다.
언젠가 나이로 밀리지 않는 때가 오겠지. 그런데 그때가 기다려지는게 아니라 그때가 겁이나기 시작했다.
나도 언젠가는 나이를 권력이라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몇 년 전 뉴욕에서 귀국편 항공기를 이용하며, 나는 내 자리에서휴대폰을 충전하고 있는 나보다 어린 남자 승객의 행동을 지적했다. 본인 자리에는 USB 충전단자 밖에 없고 내 자리에는 콘센트가 있길래 내 자리에 충전기를 연결했다고 한다. 남에 자리에서 충전하면서까지 그걸 꼭 콘센트로만 충전해야 되는거냐고 물었더니 불만 섞인 목소리로 안 할게요라며 툴툴거렸다. 그 이야기를 귀국 후 친구에게 했더니, 친구가 말했다.
"어디 어른이 말하는데 어린 놈이 버릇없이."
친구의 말에 놀라면서 슬펐다. 나는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나는 오히려 너도 나와 동등한 성인이니 나한테 폐끼치는 거 봐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는데, 그 때 그 어린 남자 승객에게는 '여성 연장자'의 '가르침'으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생각하니 의기소침해진다.
문득 나이가 들면 피부가 쳐지고 기미가 늘어가고 나이살이 찌게 될 것이라는 것은 슬퍼할 만한 꺼리도 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으로 나이 먹고 싶다. 뭐 하나 조금이라도 이익보려고 아득바득하지 않는, 좀 모자라는 할머니로 늙어가고 싶은게 내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