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국화 Jan 06. 2023

우리에게 과연 희망이 있을까

기분 나쁠 자유조차 없는 사회, 기분이 나쁠 명분이 있어야만 하는 사회

어제 킬링타임으로 포털사이트 컨텐츠들을 읽던 중 어떤 글을 보았다. 묘하게 나를 깎아내리는 사람에게 대처하는 방법에 관한 글이었다. 글에서 사례로 든것은 친구사이인 육아를 하는 가정주부와 커리어우먼의 대화였다. 간난아이를 키우는 A의 집에 놀러온 커리어우먼 B. 둘은 일단 겉모습부터 차이가 컸다. A는 헝클어진 머리에 목이 늘어진 티셔츠, 편해 보이는 고무치마를 입고 화장은 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한 모습이었다. B는 정성껏 세팅한 머리에 고급 투피스에 비싼 가방을 들고, 당연히 곱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둘이 등장하는 공간인 A의 집도 A만큼이나 정돈되지 못하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아기 용품과 옷가지들. B가 얼마나 친한 친구일지는 모르겠지만 A로서는 그런 모습을 내보인다는 게 부끄럽고 민망하였을 것이다. 


A는 B에게 말한다. 

"정신없지? 애 키우느라 제대로 청소도 못했네."

그런 A에게 B는 말한다. 

"애들 있는 집이 다 이렇지 뭐. 야, 너는 그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좋겠다."


말을 글로 옮기면 말투나 각 단어의 길이, 높낮이, 함께 수반되는 말하는 이의 표정, 그날의 공기 등은 사라지고 만다. 그러니 B의 말을 글로만 옮겨서는 저 말이 A를 묘하게 깎아 내리는 말인지, A의 민망함을 덜어주려는 농담이었는지, 육아로 힘들어하는 A를 위로하는 말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니 B의 말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하지만 A의 말에 어쨌든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아, 저 말이 불편할 수도 있겠구나 그정도 이해해 주면 되는 문제 아닐까? 너는 왜 불편하니라고 다그칠 것이 아니라 말이다. 


컨텐츠를 만든 사람은 A와 같은 상황의 사람을 또 웃고 넘기지 말고 불쾌함을 적절히 표현하라는 말을 하고자 이와 같은 컨텐츠를 포스팅하였다. 그런데 거기에 달린 댓글들은 B의 말을 불편해 하는 사람에 대한 원색적 비난들로 뒤덮이다 결국 여성혐오로 이어졌다. 왜 불편하면 안되는 걸까? 어떤 말이든 나의 상황과 경험에 비추어 말하는 이의 의도와 다르게 들릴 수 있는 것이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쓰고 좋겠다는 말에 기분 나쁘면 기분 나쁜 사람이 문제있는 거 아니냐는 댓글이 많았다. 우리는 A와 B 중에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매일 선악을 가르고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풀어야 하는 시험을 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고 있다. 그럴 필요 없다. 다만 내가 싫지 않은 것이 누군가는 싫을 수도, 나는 좋아하지 않는 것을 누군가는 좋아할 수도 있네, 아 그럴수도 있네 정도이면 충분한데. 이렇게 내가 모르는 세상의 한 토막을 알아가는 게 재밌잖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노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매일 확인할 수 있고.


과연 댓글을 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결혼과 함께 잘 나가는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를 해 본 적이 있을까? 아니면 본인도 회사 그만두고 육아만 하고 있지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써써 좋겠다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은데, 그러니까 본인은 쿨하고 털털한 사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속이 꼬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 말은 맞을까? 어떤 회사를 다녔고 그 회사를 어떻게 들어갔고, 그 전에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는 사람마다 다 다른데 말이다. 


나는 사실 A의 상황이 되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A와 같은 친구들을 아주 많이 둔 B가 된 적이 많다. 솔직히 B처럼 생각할 때도 많다. 좋겠다. 돈 안 벌어도, 남편이 돈 벌어다 주고. 진짜로, 진심으로. 가끔 나도 벌어다 주는 돈이나 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아니, 일단 돈 잘 버는 남편 있어서 미련없이 퇴사라도 한 번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진심으로 부러울 때가 있지만 A와 같은 친구들에게는 나의 의도와 다르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자기 먹을 건 자기가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한데다 늘 화사하고 화려했던 커리어 우먼이었는데 어느 순간 목 늘어진 티셔츠를 입고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로 집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어떤 삶이 우월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타인의 말이 상처가 되는 것 같다. 현재 내게 없는,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결핍과 상대방이 가진 것 같은 것에 대한 동경.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우월해서가 아니라. 인간은 원래 욕심이 많으니까. 그게 인간의 본성이니까. 굳이 너의 열등감이 문제고 네가 꼬여서 문제라며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저 너는 그런 말이 싫구나, 기분이 나쁘구나, 그렇구나 하고 말면 그 뿐이다.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말을 해야 알지, 말을 안 하면 어떻게 아냐고. 그런데 말을 했더니 니가 꼬였네, 너는 무슨 열등감이냐고 말한다. 대체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 아, 기분이 나쁘구나, 그렇구나 하면 될 것을기분 나쁜 니가 잘못인지 기분 나쁘게 한 내가 잘못인지를 따지고 있는 것일까? 기분 나쁜 게 니 탓이 아니면 내 탓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아이처럼.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게 곧 나의 유죄를 선언하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 제발 서로 들어주자, 왜냐고 묻지 말고. 


p.s. 우리나라는 글자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고, 수능 언어능력은 수학보다 어렵다는데, 언어영역은 대체 뭘 공부했나 돌아보면, 글쓴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 다음 문장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것, 문맥상 그 다음에 올 내용 등등. 12년동안 사고력과 문해력을 혹독하게 교육받는데 어째서 같은 언어를 쓰는 자국민끼리도 대화가 되지 않고, 글쓴이의 의도와는 무관한 비난을 하며, 모든 것을 맞고 틀림으로 양분해야 한다는 사고에 빠져 있는 것일까. 실질적 문맹률이 75퍼센트인 나라. 그게 바로 우리나라라고 한다. 대체 왜, 왜 그러냐는 말은 여기에다 해야 하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經濟學 vs. 經營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