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일기 번외편
퇴사통보일을 9월 19일로 정했습니다.
퇴사일기 2편은 9월 19일부터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퇴사를 결심하고 가장 큰 변화는 유체이탈 업무처리가 가능해졌습니다. 사건, 사고가 터져도 크게 안타깝거나 노엽지 않고 누군가 우리팀에 결례를 해도 그러려니, 부당한 요구를 들어도 허허실실 넘어갈 수 있습니다. 참고 해준들 며칠이라고, 이제 두 달도 남지 않았으니 못 해 줄 게 없습니다. 안 되는 걸 된다고 해주거나 사장님한테 거짓말 해 달라는 것 말고는, 절차가 맞니 안 맞니, 이게 사내변호사 업무다 아니다 이런 건 따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내변호사한테 그런 걸 시켜요?" 라는,
합류하기로 한 법인 변호사님의 이 한 마디에 그 동안의 섭섭함과 외로움은 온데간데 없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 나도 공감해 줄 수 있는 동료들이 생겼다 생각하니 현직장에서의 외로움은 견딜만 해졌습니다.
내가 한 발 떨어져서 업무를 하고보니 과도하게 업무에 매몰되어 있고 지나치게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이 안타까웠습니다. 며칠 전까진 내가 그렇게 보였겠구나 하는 거울치료도 되면서 말입니다.
일단은 우리 팀원들.
팀원 A는 지금 다른 팀에서 변호사 의견서를 오해해서 잘 못된 업무를 처리하려 한다며 걱정이 태산입니다. 다른 팀은 추진하려는 업무가 현행법상 위법하지 않은지를 질의해야 하는데, 질의 자체를 조문 하나에만 한정하여 질의한 것부터 문제였고, 더큰 문제는 답변 내용에 녹아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전혀 읽어내질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충분히 설명을 해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법무팀이랑 자문변호사 핑계를 대는 것은 그것도 그 팀 사정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리고 팀원 B는 사규개정하려는 부서에서 절차를 제대로 거치고 있는지, 아니면 또 막판에 급하다고 절차 생략해 달라는 것이냐며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소관부서에 절차만 잘 설명해 줬으면 절차를 제대로 진행하고 있는지는 그 부서의 사정입니다. 막판에 절차 생략해 달라거나 협조 요청했을 때 들어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들어주되 못 들어줄 일은 원칙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들이 어쩔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걱정하는 게 안타까운데 불과 며칠 전 내 모습이라, 난 왜 저랬을까 싶습니다.
예산부서는 회사 망하게 생겼다며 머리를 싸매고 있습니다.
달달한 거 들고 가서 나눠주며 말했습니다. 절대 안 망한다고. 절대 안 망할거라 변하지도 않는 게 어떤 면에선 절망스러웠지만, 사실은 최대 장점이지요. 특히 이 그늘을 떠나 자영업의 세계로 갈 생각을 하니 이래서 공기업이 좋다는 거구나 싶습니다. 안락한 삶을 바란다면 공기업 입사는 개인으로서는 최적의 선택입니다. 안락. 이 단어의 의미를 이제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안락을 버리니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재미, 행복, 보람, 자존감, 자부심 이런 단어들을 좇느라 안락의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이제 내 몫의 안락은 제가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언제가 직원들을 둘 정도가 되면 직원의 안락까지 만들어 줄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두 번째 변화는 박사과정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현직장은 퇴사 중, 개업은 준비 중, 이번 주부터 박사과정은 시작. 학업만큼은 이 단계와 저 단계의 사이 어딘가가 아닌 확실한 시작을 하였습니다. 수업을 듣고 지도교수님을 따라 학회에 참석을 하며 관심사가 같은 분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저는 환경법을 주로 공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환경법학회와 행정법학회에 입회했습니다. 특히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이고, 평생을 추구하였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당장은 사건 가릴 처지가 아니라 들어오는 대로 뭐든 해야하지만(사실 개업초기엔 들어오는 게 있을지가 더 걱정입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개업도 안정되면 환경사건을 전문으로 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건설현장에서의 토사유입으로 바지락이 폐사해서 어민들에게 손해배상을 해준 사건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건도 환경사건의 일종입니다. 아마 해수 온도 변화로 부산 어민들도 어획량 감소, 어종 변화 등 직간접적인 손해를 많이 입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업을 하는 분들이 느끼는 위기와 손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법률적 주장으로 대신해 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당장 선례없는 일에 선뜻 손해배상을 인정하거나 예방조치를 명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선례로 가는 길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몇 배 해야 한다던 예능인 이영자의 말이 요즘은 무겁게 다가 옵니다. 회사 다닐 때는 그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의 괴리가 크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란 게 고작 퇴근 후 맥주 한 잔, 휴가로 해외여행 그 정도였으니까요. 이영자가 말했던 "하고 싶은 일" 은 어쩌면 이런 차원이 아니었을 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기 싫은 일"의 무게도 내 상상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의 난이도가 높아져 버려서 하기 싫은 일의 무게도 늘어날텐데, 그 무게가 예상이 안 되어 겁이 나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