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독서 노트는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시작되었다. 소리 없는 우아함과의 만남이었고, 인생의 진정한 감독이라 불리는 우연과의 만남이었다.
무언가 뜨거운 강이 내 마음에 흐르던 그날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마지막 책장을 넘긴 날이자,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보았던 그 밤. 찰방찰방 밤을 건너고 마음을 강의 건너 독서 노트에 다다랐다.
2022년 3월. 6학년이 16명뿐인 작은 시골 학교의 아이들과 만났다. 아이들이 유난히 좋아하는 네모 세상과 아이들이 유난히 싫어하는 네모 세상이 있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네모 세상에서는 어디든 껑충껑충 뛰어다닐 수 있었다. 링크로 연결된 정보 사이를 뜀틀 넘듯 가뿐하게 넘나들며, 짧은 시간 안에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쏙쏙 얻을 수 있는 세상이었다. 싫어하는 네모 세상은 걸음걸음을 꾹-꾹- 앞꿈치부터 뒤꿈치까지 내딛으며 걸어야 하는 느린 세상이었다. 마음을 쉽게 내주고, 쉽게 얻을 수 없는 세상. 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세상이었다.
휴대전화 삼매경에 빠진 아이들에게 책은 아주 느리고, 서로를 알아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나는 내가 읽던 책들을 무심히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심히'. 툭-대충 던져놓고, 대충 쌓아놓는 것이다. 처음에는 별 관심이 없던 아이들도 "선생님, 이건 무슨 책이에요?" "선생님, 저도 한번 봐도 돼요?" 라며 4월의 문턱에서 호기심을 갖게 시작했다.
바로 이때다. 짜잔! 하고 선생님의 독서 노트를 공개해야 할 순간. 사랑하는 이의 앞에서 붉게 물든 뺨처럼, 수줍게 붉은빛을 뽐내는 장미들로 뒤덮인 노트 한 권을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는 것이다.
선생님은 독서 노트를 펼치고, 첫 문장을 읽어준다.
소리 없는 우아함. 익숙한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 격렬한 내적 동요를 동반하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드라마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류다.
-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중에서 -
우리는 지금부터 운명적인 만남을 향해 걸어가기로 했다. 매주 금요일, 마음이 맑아지는 '맑금'. 우리는 책 속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소리 없는 우아한 만남'을 기다리며 책 속의 한 문장을 수집한다. 마르 그리트 뒤라스는 사람을 일컬어 '한밤중에 펼쳐진 책'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책 속의 문장들을 모으며 '나'를 멋지게 가꾸어 나가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내 마음을 온전히 빼앗아 갈 운명적인 만남과 아주 멋진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꿈꾸었다.
첫날, 아이들이 책 속에서 수집한 첫날의 문장들은 이러했다.
"너희가 아이와 같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p.96 <눈의 여왕,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엄마 손을 놓고 씩씩하게 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누구보다 큰 소리로 애국가를 불렀다.
p.22 <나는 여덟 살, 학교에 갑니다, 김해선 지음>
그 아이의 아픔을 나는 그날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뉴스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아파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그 아이 얼굴을 떠올립니다. "오늘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아이들이 따뜻한 사랑 속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길 간절하게 바랍니다.
<수상한 친구 집, 박현숙 지음>
"내 목이 마르다고 하여 짐승들을 마구 잡아서야 되겠느냐? 과인의 병이 다 나으려면 아까운 짐승이 얼마나 더 죽어 나가겠느냐? 이제부터 수라상에 백성들이 먹는 음식으로만 올리도록 하라." 세종은 이렇듯 언제나 백성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세종대왕, 저자 김영자>
오늘의 헛수고.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을 닮으려고 너무 노력했다. 오늘도 나는 다른 사람 마음에 들려고 너무 노력했다. 오늘 나는 나의 그림자로 살았다.
p.61 <아무튼 메모, 정혜윤 지음>
아이들은 책보다도 작은, 휴대전화도 더 작은, 네모 세상을 만났다. 원고지 속의 작은 네모들. 그 작은 네모에 한 자, 한 자 두근거리고, 묵직하고, 구름처럼 가뿐하고, 오래도록 생각날 마음들을 담았다. 그때 당시, 나는 정혜윤의 <아무튼, 메모>를 읽고 있어서 책상 위에 올려두었었는데, 이를 기억하고 선생님과 똑같은 책을 읽겠다며 <아무튼, 메모>를 집어 들며 웃던 녀석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이들이 모은 문장은 칠판에 붙여두고, 금요일 오전 내내 같이 나누었다. 책은 '함께' 읽는 것.
어린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교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론 두렵게 느껴진다. 선생님보다 더 훌륭한 책이라는 인생 선배, 친구를 만나 사랑과 우정을 꽃피우길 바랐다.
열세 살, 아무튼 한 문장. 우리는 그렇게 4월의 어느 날, 책 속으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2022.04.08. 학급 홈페이지에 남겼던 그날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