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해체와 복원
<거미의 눈>(1998, 구로사와 기요시)
<거미의 눈>이 만들어지던 1998년은 일본의 거품경제 이후 장기 침체기인 잃어버린 10년(1991~2001)의 끝자락이다. 공적 트라우마를 남기는 사건들의 후유증은 사건 발발 후 꽤 시간이 지나서야 영화로 다뤄지기 마련이다. 공포장르는 영화라는 메커니즘이 주는 대중과의 상처 공유라는 안전장치와 공포심의 폭발로 에너지를 승화시키는 꿈의 메커니즘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트라우마 치유기 기도 하다. 1990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여러 J-호러 감독들은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 가족의 해체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링>, <검은 물 밑에서>, <하나코>, <주온>, <노리코의 식탁>등. 공포와 조폭(야쿠자) 장르를 혼합한 <거미의 눈>은 잃어버린 10년의 후유증을 극복하려는 작품들의 선두 그룹에 위치해 있다 해도 무방할 듯싶다. (스포 주의)
영화가 시작되면 주인공 니이지마는 자신보다 왜소해 보이는 한 남자를 다짜고짜 패기 시작한다. 니이지마는 그를 6년 전(잃어버린 10년의 초기) 자신의 딸을 납치한 유괴범으로 단정 짓고 살해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가 진범인지는 밝혀지지 않으며, 그의 살해도 실패로 돌아간다. 그 사이 그도 그의 아내도 황폐해지며 가족은 완전히 분열된다. 이제 지나간 것은 잊어야 한다며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딸의 방을 치우겠다던 아내는 딸의 환영에 시달리고 자신의 적성과 맞지 않는 일을 해가며 끝내 도살장에 끌려가는 표정으로 막노동을 선택하는 니이지마. 아내는 구토를 하는데 그는 태연히 함박스테이크를 먹는다.
어째서 이들은, 일본의 한 가정은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었나.
영화는 기어이 잃어버린 10년에서 거품경제를 거슬러 올라 일본의 경제, 국가, 정치적 이념이라는 사회 시스템을 상부조직원이 니이지마를 심문하는 신으로 환기시킨다. 누구의 잘못인지 어디서부터 어그러진 것인지 원인을 찾으려 해도 알 수가 없고 알려할수록 혼란은 가중된다(플래시 백/플래시 포워드, 롱테이크/잦은 숏 분할, 익스트림 롱샷/클로즈업의 교차 대비는 서사적 혼란에 입체적 효과를 불어넣는다).
니이지마는 고등학교 때 친구 이와마츠로부터 살인청부업을 제안받는데, 이는 그가 납치범을 죽일 때 사용한 총구입으로 촉발된 것이다. 내재된 혹은 이제 발발해버린 폭력성으로 이후 그는 상부의 지시, 또 그 위의 상부로부터의 터무니없는 지시들을 이행하면서 이와마츠처럼 인간성을 상실해간다. 총과 인간성, 물질과 정신, 자본주의와 공동체의 신뢰가 등가 교환되는 현실.
“내가 왜 해야 하지?”라는 실존주의적 물음은 책상 위 스탠드 불빛처럼 소멸되고 암전을 지나 이내 자연채광이 식탁을 비출 때, 니이지마의 환상은 진실을 드러낸다. 이념과 목적을 알 수 없는, 아니 거미의 눈처럼 너무나 많은 다양한 목적의 사회 시스템은 최소 단위의 공동체인 가정을 붕괴시켰고 개인의 정체성을 앗아갔다. 상실감은 정화로 승화되지 못한 채 분노가 되어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 복수와 비윤리적 폭력으로 변태 된다. 하지만 물리적 실체가 없는 시스템이 이를 허락할리는 만무하다. 다시 원점. 흰 천에 둘러싸인 것은 딸도, 유괴범도 민족주의나 우파도, 아닌 나무토막이었다. 니이지마는 그리고 관객은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며, 어떤 욕망을 투사시켜 영화를 보았던가.
허울뿐이지만 가족이라는 외피는 남고 목숨을 부지하는 니이지마의 생은 이어진다. 그러니 허망함을 딛고 다시 삶을, 가정을 복원할 것인지는 이제 영화를 관람한 관객의 몫일 터다.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추천작: 실체가 없는 시스템이라는 악과 맞서 싸운다는 관점에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
*2019.09.21 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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