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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킬 홍은화 Nov 29. 2020

도망친 여자

- 카운터 시네마(대항 영화)의 미학.

(부제:홍상수 월드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당신은 어떤 영화를 보죠? 왜 극장을 (다시) 찾는 거죠?”


홍상수 월드에 방문하려면 관객은 먼저 관객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규정해야만 한다,고 홍상수의 24번째 장편영화는 감희(김민희)를 통해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홍상수의 영화는 “자체의 영화적 실천을 통해 기존의 영화적 약호와 관습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그것들을 전복하는 영화([영화사전] 수잔 헤이워드)”인 카운터 시네마, 즉 대항영화다. 영화사에는 할리우드의 헤게모니*와 지배 영화의 재편 체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감독들이 있었고 홍상수는 그 계보를 뚝심있게 따르며 밀고 나가는 쪽이다.

(*헤게모니:한 집단·국가·문화가 다른 집단·국가·문화를 지배하는 것을 이르는 말)


카운터 시네마는 관객으로 하여금 당신은 지금 영화를 보고 있다,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까닭은 관객으로 하여금 “실제로 무엇이 있는가를 볼 수 있게 하고, 거짓된 환영으로 이끌리기보다 그것들을 성찰할 수 있게([영화사전])” 하기 위해서다.


홍상수 월드에 방문하려면, 아니 방문해서 즐기려면 카운터 시네마에 대한 거부감을 거두는 편이 좋다. 다시 말해 관객인 “나”는 “선구씨 영화”류(장르에 충실한 영화라 가정)를 원했다면 결코 감희가 영화를 보고 “좋다”고 느끼는 감정을 느낄 수 없을 테니 말이다.

물론 분명 영화에서는 “선구씨 영화”가 어떻다고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영화는 어느새 카운터 시네마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태가 된다. 카운터 시네마가 지양하는 기존의 약호와 관습을 따르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홍상수 영화들을 홍상수 월드로 규정하는 것은 그가 추구하고자 하는 영화 철학에 위배된다. 홍상수 영화들을 특정 약호와 관습으로 옭아매려는 시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홍상수 월드나 독립된 영화 한 편에 대해 어떻다 규정하고자하는 이러한 시도들이 다양하고 산발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충분히 그의 철학과 함께하는 유희를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진: “영화 잘 봤어?”

감희: “어. 평화롭더라. 좋았어. 고마워. 좋은 영화 보여줘서.” (클로즈업)

우진: “나 사실 니가 성구씨거 보러온 줄 알았어”

감희: “그래? 아닌데.”

우진: “알아.”


카운터 시네마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만 내려놓고 영화를 음미한다면 홍상수 영화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고 감탄할 수밖에 없다. 관객의 다양한 사유를 야기 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확장하게 하는 것을 단순히 차이와 반복의 힘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주 미세하게 들여다 보아도 인물들의 사건과 대사는 관습과 약호로 포섭되지 않는다.

포섭되지 않는 영화의 기표들로 인해 관객은 때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크로스) 팩트 체크가 되지 않는, 불확실한, 매우 부족한 정보들, 또 그로인해 인물들은 신뢰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영화내 인물들의 대사는 모두 정확성을 담보로 하지 않는다).

서사가 주는 불편함 이외에도 미장센적 불편함이 있다. 홍상수 월드에는 설정숏(신이나 시퀀스 즉 사건이 시작 될 때 공간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와이드나 익스트림 롱숏)이 부재하고 인물들의 시선이 머무르거나 대사에 등장하는 공간을 온전히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다. 이는 때때로 영화의 권력을 과시하는 장치가 되고 관객은 그 권력을 불편하게 여기게 된다.

영순이 지저분하다면서 감희에게 보여주기 꺼려했던 3층 공간, 감희가 훌륭하다고 감탄한 수영의 건축구조 등을 카메라는 끝내 비춰주지 않는다.


또 하나의 예로, 길고양이 밥으로 시비가 붙는 장면에서의 인물배치.

카메라는 영지, 영순, 감희에게 위쪽 여백을 허용하고 남성의 머리가 프레임 밖까지 나가게 하여 남성의 거대함을 극대화시킨다. 또 “아내가 불편해 합니다.”라며 로맨티시스트 정신을 발휘한 남성의 머리를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게 할 뿐만 아니라 아내를 위해 미션을 수행하지 못한 남성의 얼굴을 끝내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아니 심지어 모든 인물이 사건 현장을 떠난 후까지 카메라가 머물러 고양이를 비춤으로써 영지, 영순의 편에 일방적으로 힘을 실어준다. 카메라는 일방적으로 영지, 영순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또 반대로 수영을 찾아온 시인의 경우에는 시인을 수영의 아래쪽에 배치하고 프레임을 벗어난 시인의 비 맞는 뒷모습까지보여줌으로써(심지어 오리지널 스코어도 깔아준다) 측은지심을 유발케 하는데, 이는 수영과 시인의 입장을 관객이 좀 더 균형감을 가지고 판단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도망친 여자>는 이렇듯 카메라가 관객의 감정과 사유를 일방적으로 몰아 부칠 수 있는 폭력성이 있음을 고발하면서도 갈등 상황의 양쪽 경우를 카메라가 어떻게 편들어 보여주는지,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지 확인시켜준다. 언급했듯 홍상수 영화는 끊임없이 “당신은 지금 영화를 보는 중이야”라고 상기 시킴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관객에게 주입할 수 있는 특정 가치관을 견제(헤게모니를 방어)하길 바란다. 또 관객이 다양한 가능성을,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아내어 좀 더 자신의 가치관이 확고해지길 바란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의 진정성, 폭력성, 타인의 시선을 판단하고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고 저항하는가.


[감희: 말을 그렇게 많이 하니까, 나중엔 저게 진짜 진심인가 그런 의심이 들었어요

          정말 그렇게 말하시면 다 날라가 버릴거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만 말하시면 좋을 거 같아요 이제.

정선생(권해효): 그렇게 느꼈구나.

감희: 제가 상관할 것도 아니지만.

감희: 근데 왜 너는 이런데 오고 그랬어.]


감희는, 관객은 어떠한가? 우리는 왜 이런데, 극장 같은 델 와서 정선생의 질문을 받나?


감희는 영순, 수영, 우진을 만나 세 번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지금 출장을 갔고, 그 전에 5년 동안 단 하루도 떨어져 있어본 적이 없고, 그것이 사랑의 자연스러움이라고 남편이 말했다고 한다. 화자인 감희의 주체적 주관이 배제된 반복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나는 의심이 인다. 감희 너는? 너의 생각은?


감희는 곧 관객이다. 감희가 두 번째 바라보는 스크린위로 “감희 김민희”가 올라간다. 감희가 비디제시스적 자막을 볼 수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감희란는 관객, <도망친 여자>를 보는 관객이 스크린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디제시스적 사운드가 비디제시스적 사운드로 변화 할 때, 혹은 충돌할 때 관객은 그 찰나의 순간 어떤 호기심(들)이 폭발함을 경험 할 수도 있다. 감희가 남편에게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아내로 살아가고 있는지 의심이 이는 것처럼 관객인 우리 역시 어떤 헤게모니에 잠식당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영화는 반복의 매커니즘이다. 그렇다면 진정성이 없는가?


<도망친 여자>는 홍상수 월드에 안착한 24번째 영화, 영화라는 기표다.

영화를 관람한 후, 수 없이 다양한 의견이 아주 많은 말로 오간다면 영화 이상의 사유가 확장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또 반대로 오롯이 홀로 조용히 음미하면서 자신의 견해가 오해받거나 비난 받지 않은 상태로 즐길 수도 있으리라. <도망친 여자>에서 카운터 시네마의 미학을 통한 어떤 사유의 즐거움, 사고의 유희를 느꼈다면 또 다시 언젠가 감희, 관객은 현실에서 도망쳐 다시 25번째 영화라는 기표 그리고  달시 파켓,  관객과 서로 조우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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