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은 ( 0 )이다
퇴사하기 전에는 갈 수 없는 곳
2026년 2월,
나는 28일간 남미로 여행을 떠난다.
페루를 시작으로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까지 다섯 개의 나라를 도는 일정이다.
국내여행 한 번도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나에게는
꽤나 용기가 필요한 도전이다.
물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짧은 여행은
1년에 몇 번씩 다녀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들도 다 하니까’
마치 해야 할 과제처럼 떠났던 여행들이었다.
프리랜서가 되어보니...
직장인의 라이프와는 사뭇 다르다.
일에 성수기와 비수기가 있고,
비수기가 되면 혼자 훌쩍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 그들 눈에는 비수기(휴식기)에도 집에만 머무는 내가
조금은 답답해 보였던 모양이다.
그럴 바엔 어디 근사한 곳에라도 다녀오라며 은근하게 권해왔다.
"로마 한복판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것도 근사하잖아!"라며
친절하게 내가 가야 할 곳과 행동지침을 알려주는 이도 있었다.
전 직장 선배는 직접 여행사 패키지 상품을 보내며 말했다.
"나는 퇴사하면 이런 여행 꼭 가보고 싶어.
내가 너라면 당장 떠날 것 같아."
순간 마음이 덜컥 끌렸다.
'퇴사하기 전에는 절대 갈 수 없는 곳'
하루 반나절이 걸리는 지구 반대편으로
한 달간 여행을 떠난다니.
시간과 체력, 돈 이 세 박자가 맞아떨어지는 이 시기가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닿지 못할 어떤 좌표처럼 느껴졌다.
그래! 가즈아~!
우습게도 여행의 시작은 늘 돈이다.
계획을 세우다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
여행사 경비 외에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끝이 없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얼마를 쓰느냐’보다
‘어디에는 써야 하고,
어디에는 쓰지 않아도 되는지’를
구분하는 감각이 더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생에 한 번 뿐일 가능성이 큰 여행이니
쓸 땐 쓰되,
의미 없이 새지 않도록.
그 균형을 찾는 것이 관건이다.
여행의 시작은 짐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장기간 여행이기도 하고 도시마다 기후가 크게 달라
자연스레 짐이 많아진다.
남미에 가면 옷이나 신발이 망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애써 갖춰 입지 않으려 한다.
(멋은 조금만 부리는 것으로)
예쁜 것보다 튼튼한 것,
새것보다 편한 것,
잃어도 괜찮은 것들로
가방을 채우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지인의 말로는
여행 갈 때마다 막 버려야 할 속옷과 양말,
옷들을 챙겨가서
휘뚜루마뚜루 입고는 그곳에서 해치우고 온단다.
눈이 번쩍 뜨이는 조언이다.
그래서 요즘 버릴 것들을 찾는 중이다.
어쨌든 이번 여행은 최대한 가볍게.
짐도, 기대도, 스스로에게 씌워왔던 기준들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으려나.
여행의 시작엔 설렘도 있다.
무엇을 보게 될지, 누구와 함께일지...
영화 비포선라이즈처럼 설레는 연인을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저 서로의 여행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해 줄 친구 한 명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가보고 싶다고 주문을 외던
우유니 사막에 가게 되다니. 미쳤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무덤덤함에 익숙해졌다.
인생의 희로애락에 대한 감정의 낙폭이 적다.
좋은 말로 대부분의 날들이 평온하다.
기쁜 일에도, 서운한 일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대신
감정의 진폭이 점점 얕아지는 쪽을 택해온 것 같다.
그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면서.
감정이 미쳐 날뛰던 어린 날에는 그토록 원했던 건데,
가끔씩은 삶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데 한 달간의 여행 준비를 하다 보니
오랜만에 마음이 먼저 반응한다.
어린 날 소풍 떠나기 전날밤
잠못이루던 설렘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설레고, 조금 두렵고, 조금 기대된다.
이 감정들이 아직 내 안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의외이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이번 여행을 통해 무엇이 달라질지는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신이 드는 건,
후회는 안 할 것 같다.
대단한 깨달음이나 극적인 변화는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낯선 거리에서 길을 헤매고,
예상과 다른 하루를 견디는 동안
지금보다 조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올 수는 있지 않을까.
가까운 지인은 '여행은 곧 성장'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꼭 ‘더 나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조금 더 느슨해지고,
조금 덜 확신하고,
조금 더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으면 충분하다.
그 또한 성장일 테니까.
이 또한 괜한 욕심이 아니길.
28일간의 여정.
몸은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이미 영혼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기록이 시작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