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은 착각

by 봄치즈

유난히 일이 많은 한 주다.

이번주에만 우리 팀원 두 명이나 일주일 휴가를 쓴 것. 너무 바빠 그들을 욕할 시간도 없었다.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만 집안은 엉망이란 뜻이다. 아침에 일을 시작해 몰두하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사방이 어둡고, 어느새 저녁 차릴 시간이다. 솔직히 장을 볼 틈도 없으니 이런 기간에는 보통 ‘냉장고 안에 있는 것 다 파먹기’라는 미션을 실행한다. 사실 이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냉장고 속이 비워질수록 재료들을 야무지게 이용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는 생각에 자부심이 생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미션에 방해꾼을 자처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남편. 냉장고에 조금의 빈 공간이 보이면 뭐가 불안한지 어느새 장을 봐와 그 구멍을 빈틈없이 메꿔놓는다. 그러면서 ‘냉장고가 꽉 차니 내 마음이 꽉 찬 거 같다’ 뿌듯해하니 ‘어쩜 나와 이리 다를까 싶다.’


그렇다고 마음껏 불만을 말하긴 조심스럽다. 바로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것 중의 하나가 ‘장보기’이기 때문이다. (나가는 것 자체를 귀찮아한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남편이 장보기 전 ‘필요한 것 있으면 리스트를 보내라’ 하니 항상 이때를 기회삼아 다음 주 저녁거리까지 생각해서 재료를 주문하게 되는 것. 또한 시도 때도 없이 ‘배고프다’ ‘먹을 것 없냐’를 외쳐대는 아이들의 빈번한 요구를 생각해 볼 때, 때 되면 알아서 장을 봐주는 남편의 행동은 분명히 나에게 실보다는 득이 훨씬 많다.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마트에서 장을 봐온 남편. 부엌에 가보니 남편이 냉장고 정리를 하느라 부산하다. 잠시 뒤 내 책상으로와 소복이 담긴 포도 접시를 놓고 간다.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진다. 평소 과일을 거의 먹지 않는 남편이 나를 위해 친히 포도송이를 씻어 갖다줬다니, 감동스럽다. 고맙다고 말하려던 찰나,


“냉장고에 음식 넣을 자리가 없더라고. 포도송이들이 어찌나 많은지. 얼른 후딱 먹어치우라고.”

“아…. 하하하… 고마워.”


몰랐으면 좋았을걸.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하고 혼자 착각하며 아주 기분 좋게 포도를 먹었을 텐데 말이다. 약간 허탈감을 있지만 그래도 씻어 손수 내 책상까지 갖다 준 게 어디냐. 자기 위안하며 입에 쏙 넣은 포도. 너무 달고 맛있어 눈이 크게 떠진다.


“자기야 너무 맛있어! 한 송이 더 플리즈!”

“좋아 좋아. 계속 먹어서 냉장고를 비우도록!”


더욱 넓어진 냉장고 공간에 매우 흡족해하는 남편. 가을 포도맛에 온종일 매료된 내 입술은 어느새 보랏빛으로 변했다.

다른 건 몰라도 장보기, 냉장고 정리를 위해서는 아주 탁월한 팀워크이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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